A.D.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즉위에서부터 590년 마지막 라틴 교부이자 초대 로마 교황으로 불리는 그레고리우스 1세의 즉위 때까지를 니케아회의 시대라고 부른다.
1.서론 : 이 시대의 특징
이 기간은 기독교 로마 제국 시대라고 부르기도 하고 니케아 회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후자처럼 부르는 이유는 최초의 세계적인 종교 대회인 니케아 회의가 그 기간 동안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 시대에 와서 성숙되고 안정되어 통일된 하나의 제도적 종교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기독교의 장래를 위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는 점도 있지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는 점도 있다. 이 시대가 끝나면 중세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중세 이래로 새로이 유럽의 주인공이 될 게르만 민족의 개종은 벌써 이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1.기독교 신앙이 자유를 얻음
325년은 교부시대 제 3기의 시작이며 총주교와 그리스도인 황제 시대가 열린 때이다. 이 기간에는 한 사람(배교자 줄리안)을 빼고는 모든 로마 황제가 기독교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기독교를 옹호했다. 이 시기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시작된다. 어떤 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를 니케아시대, 325년 이후부터 590년까지는 後니케아시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주후 313년부터 590년까지를 니케아시대라고 한다.
2.교리의 논쟁이 심화됨
이 기간은 오랫동안 계속 되던 박해의 시기가 끝난 시기였다. 박해시대 250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언제 새로운 박해의 선풍이 일어날지 몰라 늘 불안한 상태로 살고 있었다. 따라서 박해 중에는 (신학은 별로 없고) 오직 신앙만 있었다. 그러나 박해가 끝나면서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적 활동이 양지에서 행해지게 되었고 교회의 일도 많아지고 규모가 커졌다. 그러자 자연히 교리 논의가 왕성해지고 신학자들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아타나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이다.
3.세계 대회가 열림
교리와 신앙적 관심사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자 교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대회를 소집했고 그 가운데서 기독교의 근본 교리가 거의 제정되었다. 삼위일체 교리 논쟁과 니케아 회의, 그리스도의 二性 논쟁과 콘스탄티노플 회의, 그리스도의 인격 교리 논쟁과 에베소 회의, 그리스도의 일성론 교리 논쟁과 칼케돈 회의, 그후의 一意論 논쟁과 콘스탄티노플 회의 등이 그런 회의이다.
교회 정치 분야에는 {암브로시우스}이 유명하고, 설교가로는 {크리소스톰},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등이 유명하다.
4.교권이 증진됨
당시 로마 제국의 힘은 쇠해지고 북방 야만족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제국이 쇠해지고 정치력이 쇠해질수록 복음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교회 지도자의 세력이 점점 강대해졌고, 특히 로마 주교(교황)의 세력이 강대해져 교회는 정치적으로 큰 세력을 가진 단체가 되었다. 마침내 기독교는 국교가 되고 관직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5.수도원의 발전
이렇게 되자 교회는 현저하게 세속화되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금욕주의, 은둔주의가 성행하여 수도원이 생겼다.
2.콘스탄티누스 대제
1.콘스탄티누스 대제 略史
콘스탄티누스는 288년 나이시스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서부지역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클로루스였으며 어머니 헬레나는 경건한 여인으로 나중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소년 시절부터 전투에 참가하며 용맹한 군인으로 자랐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로마의 서부지역에는 황제를 자칭하는 자가 6명이나 나타났는데 클로루스 직전의 서부지역 황제였던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가장 유력한 사람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와 싸워 이기고 313년 밀라노에서 동부지역 황제인 리키니우스와도 만났다. 이때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에게 그의 누이를 왕후로 주었고 두 황제는 함께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 신자들이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후에 동부지역 황제 리키니우스가 이교의 편을 들게 되었을 때 그것을 반대하고 스스로 기독교의 옹호자로 나서서 323년 리키니우스와 싸웠다. 여기서 이김으로써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 전체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337년 65세 때 유세비우스에게 세례를 받고 죽었다.
2.기독교를 옹호하게 된 동기
콘스탄티누스가 처음으로 기독교를 믿을 결심을 하게 된 동기는 막센티우스와 로마 근교 밀위안 다리에서 전투를 할 때 태양 위에 빛나는 십자가를 본 경험을 한데서 비롯되었다. 그 위에는 이것으로 이기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는 이것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그날 밤 잘 때 꿈을 꾸었는데 이때 주님이 나타나서 낮에 본 것과 같은 십자가를 보이면서 이것과 같은 것을 만들어서 군기장(軍旗章)으로 삼으라는 말씀을 했다. 그가 그대로 했더니 전투에서 승리를 했고 이로 인해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고 기독교에 대해 배우고 옹호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독교에 들어온 후에도 죽을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는데 그것은 세례 후 다시 범죄하면 다시 속죄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3.업적
1.기독교 지지와 보호
콘스탄티누스는 스스로를 기독교의 옹호자요 보호자로 자처했으며 또 자신은 기독교회의 외부적 감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만큼 그는 궁중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말씀을 듣기도 했고 기독교 학자들이나 전도자들을 우대했다. 그리고 교리 논쟁이 심해지자 이단을 제거하고 교회를 통일하고 교회의 연합을 유지시키기 위해 국비로 니케아 회의를 열기도 하였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단지 기독교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교로 채택한 기독교가 분열되면 로마 제국 전체의 안녕과 평안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2.법적 뒷받침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위해 여러 국법들을 개정하였다. 십자가 형벌을 폐지하고 검투를 금지시키고 축첩과 간음을 엄중히 금하며 이혼을 제한시켰다. 또 여자들도 토지 외의 재산은 소유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켰고 죄인의 이마에 화인을 찍는 습관도 금지시켰다. 또 교회법을 국법과 마찬가지로 인정하며 교회 안의 분쟁에 대해 교직자가 내린 결정은 국가가 그 효력을 공인하였다. 교회의 대회의(大會議)의 판결은 그대로 로마 제국의 국법이 되었다. 또한 교회 건물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성역(피난처)가 되었고 죄인은 그곳에 피함으로써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또 죄인을 위하여 사죄와 감형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교직자에게 주어졌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위해 특별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일요일을 지키게 하는 법을 제정하여 이 날에는 법정을 닫고 시골에서의 농업 외의 모든 영업을 금지하고 군대의 훈련도 쉬게 하였다. 교직자는 병역과 세금 부담을 면제해 주었다. 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박해 시에 몰수된 건물과 토지를 돌려주기 위해 교회재산관리법을 제정하고, 교회에 내는 기부금을 공인해 주었다. 이밖에 기독교 외의 종교에 대해 박해하지는 않았으나 잔혹하고 불결한 행동과 제사 및 우상 숭배는 금했다.
3.천도(遷都)
콘스탄티누스는 332년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겼다. 그것은 동유럽의 야만인과 페르시아인을 제어하는 목적과 아울러 이교적 전설과 흔적이 적은 기독교적 새 수도를 건설함으로써 기독교를 옹호한 왕으로서의 자기 이름을 후세에 남기기 위한 목적으로 행한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티누스는 권력의 증대와 함께 허영심과 점차 교만과 자기 만족에 빠져갔다. 그는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왕위에 대한 집착에 빠진 나머지 자기 왕위를 빼앗으려 한다는 이유로 그의 처와 장남을 처형하고 조카까지 살해한 잔인한 행동을 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의 세 아들,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와 차남 콘스탄스 및 삼남 콘스탄티우스가 로마 제국을 분할하여 다스리게 되었다. 그들은 전쟁과 살인, 음모로 자신의 왕위의 안전을 도모했으나 장남은 340년 동생 콘스탄스와 싸우다 죽고, 콘스탄스도 350년 프랑크인 마그넨티우스와 싸우다 죽었다. 그 후에 동방 지역 왕이던 3남 콘스탄티우스는 마그넨티우스를 멸하고 로마를 통일하여 353년부터 혼자 황제로 있다가 361년 세상을 떠났다. 콘스탄티우스가 죽은 뒤에는 그의 사촌 '배교자 줄리안'이 왕위에 올라 18개월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짧은 기간동안 기독교를 제어하려고 애썼지만 곧 죽고 말았다. 줄리안이 로마를 다스린 뒤에 얼마 동안은 그리스도인 황제들이 동방과 서방을 아울러 다스렸다. 이들은 처음에는 콘스탄티누스가 채택한 종교 관용 정책을 썼다. 그러나 황제의 후계자들은 차츰 안으로는 이단자를 박해하고 밖으로 이교도들을 박해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쓰기 시작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379-395) 때 이교 억압이 가장 심했다. 그가 죽은 후에 로마 제국은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어져 각기 황제가 있게 되었다.
3.니케아(Nicaea) 회의 : 1차 세계 교회회의
1.날짜와 소집자
니케아 회의는 기독교회의 세계 대회의 효시였다. 이 회의는 당시의 최대 사건일 뿐 아니라 기독교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 회의가 교리 대 교리의 싸움을 처리하기 위해 열린 회의가 아니라 기독교 진리 대 사이비 거짓 진리의 싸움을 처리하기 위해 열린 회의였기 때문이다. 니케아 회의는 325년 5월 20일 콘스탄티노플에서 70킬로 정도 떨어진 소아시아의 작은 동네 니케아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했으며 여기에는 각처에서 300명 정도의 감독이 참석했다.
거기 참석한 감독의 대부분은 동방 교회에서 왔다. 언어(동방은 헬라어, 서방은 라틴어)가 다르고 거리가 먼 서방에서는 감독들이 별로 참석하지 못했다. 회원들 중에는 로마 제국의 박해 당시에 입은 고난의 흔적이 없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 회의는 5월에 시작하여 7월까지 42일동안 계속되었다.
2.소집 방법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각지 감독에게 안내장을 보냈는데 통지를 받은 각지의 감독은 장로 2명,수행원 3명을 데리고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를 위해 나라에서는 교통의 편의를 도모해 주고 여비와 체제비 및 회의 진행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를 국고에서 부담했다.
3.소집 동기
(1) 부활절 일자의 조정 문제 : 동방에서 지키는 부활절과 서방에서 지키는 부활절의 일치를 보기 위해서 모였다. 동방에서는 부활절을, 서방에서는 주일을 중심으로 날짜를 정하고 있었다.
(2) 더 중요한 동기는 당시 진행되고 있던 아리우스(Arius) 논쟁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 논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신학의 싸움터가 되고 혼란이 일어나게 될 우려가 높았다. 이를 그대로 두면 교회의 통일성이 무너지고 더 나아가서 로마 제국도 분열될 수 있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어떻게든 그것을 조정하고 정리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4.아리우스
아리우스(Arius)는 리비아 출신으로서 루키아누스(Lucianus)에게 사사했다. 루키아누스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성경 해석에 통달한 인물이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에 대항하여서 삼위일체론을 부정하고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 낳은 존재이며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창조함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한 루키아누스의 제자인 아리우스는 스승의 원리에 찬동하였고 오리겐의 영향도 받았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장로가 되었으며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는 열정적인 사람이었으며 금욕 생활을 통해 추종자가 많았다.
1.아리우스의 학설 (그리스도관)
①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다. 그는 참 신이 아니고 하나님과 같은 성질을 가진 분도, 같은 格을 가진 분도 아니며 오직 은혜를 받아서 세계 창조의 중재자가 된 '사람'일 뿐이다. 그는 시작이 있는 존재이다.
② 그리스도의 영은 로고스로서 人性을 가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선한 사람이다.
③ 그리스도가 악을 택하셨다면 악을 행할 수 있었지만 그가 선을 택했기 때문에 선한 사람이 되었고 그로 인해 아들로 인정되었다.
2.논쟁의 발단
① 아리우스 논쟁의 발단은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드로스가 삼위일체의 顯現을 세밀하게 가르지고 있을 때 장로인 아리우스가 이를 사벨리우스적이라고 공격함으로 일어났다.
아리우스는 신의 통일성과 자기 충족의 존재(하나님은 한 분으로 족함)를 강조했고 피조자이신 예수는 신의 본질과는 달리 다른 피조물들과 같이 무(無)에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또 예수는 비록 첫 피조물이요 세계 창조의 대리자이지만 영원하지는 못하다고 했으며 신에게는 시작이 없으나 아들에게는 시작이 있다고 했다. 또 예수님은 그 본질상 영원성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다르고 신보다 조금 낮은 존재라고 했다. 또 예수님은 성육신(成肉身) 때 로고스가 인체에 들어옴으로써 인간의 이성과 성령이 결합된 '신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로스 감독은 아들은 영원하시고 아버지의 본질과 같으시며 절대로 피조자가 아니라고 반박하며 아리우스와 정면 충돌했다.
② 논쟁이 격화되자 교회는 320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지방 대회를 열고 아리우스와 그를 지지하는 애굽 감독들을 파면했다.
③ 그러자 아리우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각지로 다니면서 반대 연설을 하고 지지자들을 많이 얻어내었다. 당시 유명한 니코메디아 감독의 유세비우스도 이에 합세했다.
④ 이리하여 동방에는 아리우스 설이 일반적으로 유포되게 되었다.
⑤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를 정복하고 동서 패권을 잡았을 때 동서 교회가 이처럼 어지러워져 있는 것을 보았고 교회 일치의 필요성을 느껴서 그의 교회 고문인 스페인의 코르도바 감독 호시우스(Hosius)에게 친서를 주어 알렉산드리아에 특파하여 '무익한 논쟁을 피하고 화해하라'고 권고했으나 성공치 못하므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니케아 회의를 소집하게 된 것이다.
5.참석자들의 형편
(1) 유세비우스는 참석자의 수가 250명이라 하고 아타나시우스는 318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계산한 회의 일수의 차이 때문인 듯 하다. 서방에서는 거리가 멀고 헬라어를 몰랐기 때문에 단 10명만 참석했다. 이때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박해 때문에 눈멀고, 양손이 불구가 되고, 갖은 악행을 겪은 자들이 많이 있었다.
(2) 모인 회원들은 세 파로 나누어졌다.
① 아리우스파 -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비롯하여 니케아, 칼케돈, 에베소 감독이 이 파에 속했다. 아리우스도 장로로 참석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는 한 파벌의 대표로서 싸울 역량과 품격을 갖춘 인물은 되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처음에는 그를 보호하다가 후에는 그의 겁 많음을 책망했다.
② 중립파 - 대다수는 여기에 속했는 교회사의 시조로 유명한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논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③ 정통파 - 소수였지만 유력한 인물들이 다 모여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로스 감독, 코르도바의 호시우스 감독, 회의의 대세를 지배하게 될 인물이며 알렉산드로스의 수행원으로 참석한 아타나시우스가 이 파에 속해 있었다.
6.회의
회의는 황제가 직접 참석하여 연설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의장은 유세비우스나 호시우스 중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먼저 아리우스파에 속하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신조 초안을 제출했는데 이것은 자기 교회에서 지금껏 사용한 것으로서 이것으로 중립적인 화해의 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정통파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 회의의 격렬한 논쟁의 논점은 그리스도가 동일 본질(homoousios)인가 아니면 유사 본질(homoiousios)인가 하는 문제에 귀착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추상적인 사변을 사용하지 않고 기독교 구원의 교리를 근본으로 하여 그의 주장을 펼쳤다. 그의 요지는 하나님과 인간을 결합시킬 수 있으려면 그 중재자는 피조물로는 안되며 반드시 하나님이라야 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교부들은 아들인 하나님의 신성을 천지 창조에 관여하는 측면에서만 설명했는데 아타나시우스는 이것을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설명하였던 것이다. 그의 합리적인 발언은 회의의 대세를 결정했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으나 결국 정통파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논쟁은 정통파의 승리로 끝났다.
7.결의
유세비우스가 제출한 초안은 수정되고 토론은 종결되었다. 이는 곧 아리우스설의 부정(否定)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의장은 일어서서 신앙고백을 낭복할 것으로 선언하고 유명한 니케아 신조는 낭독되어 출석한 사람들이 거기 기명하게 되었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하루 생각하고 서명했고, 니코메디아 유세비우스는 <이 문서에 동의치 않는 자는 처벌한다>는 마지막 문귀를 삭제하고 서명했다. 이집트의 감독 데오나스와 세쿤두스는 기명을 거절하였으므로 아리우스와 함께 일루리아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이것은 이단에 대해 형법의 처분을 내린 최초의 실례였다.
니케아 회의는 그 후 사도행전과 십계명에 기준하여 교회 정치에 관한 규정 제20조를 제정하고, 부활절은 유월절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주일을 기준으로 삼아 주일에 지키기로 했다. 모든 의식이 끝난 325년 7월 29일은 황제 즉위 20주년 기념일이었으므로 참석자 전원이 초대되어 잔치를 벌인 후 폐회되었다.
8.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사상 비교
아리우스 / 아타나시우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 유사함 / 동질임
아들의 신성 : 반신성(半神性) / 완전한 하나님
아들의 인성 : 특별히 주장 / 완전한 사람
아들의 창조 : 무로부터 창조 / 영원히 낳으심
아들의 영혼 : 영혼이 없음 / 로고스가 영혼
4.기독론 논쟁
1.제2차 세계 교회 회의
제2차 회의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소집함으로써 열렸다. 안디옥의 감독 밀레티오가 회의를 주도했는데 그가 죽은 후에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의장이 되었다. 이 회의가 소집된 동기는 신인양성(神人兩性)이 예수라고 하는 한 사람의 인격 안에 어떻게 서로 결합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아폴리나리스가 하나의 학설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논쟁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아폴리나리스는 플라톤의 심리학설 곧 인간은 몸(body)과 마음(soul)과 영(spirit)의 셋으로 구성되었다는 설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인간의 영을 대신했고, 로고스와 마음과 몸으로써 하나의 인격을 이루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영이 없다는 말이 되므로 아폴리나리스(Apolinaris)의 주장은 결국 그리스도의 인성을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논박한 가장 유력한 신학자들는 갑바도기아의 두 그레고리우스 곧 닛사의 그레고리우스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였다. 이들은 로고스가 그리스도의 자아(自我)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로고스는 모든 인성을 섭취하고 동화하여 인간적인 행위와 감정의 주체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아폴리나리스 학설을 부정(否定) 기각(棄却)하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라고 결의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인양성(神人兩性)이 모두 완전하다는 사상은 자연히 예수님 안에 하나의 인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인(神人)의 양격이 있다는 말이 되어서 나중에 이 때문에 다시 큰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2.제3차 세계 교회 회의
제3차 회의는 431년 에베소에서 열렸는데 소집자는 테오도시우스 2세였다. 이 회의의 의제는 네스토리우스(Nestorius)의 양성론에 관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안디옥의 대감독으로 있다가 나중에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이 된 사람인데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명확히 구별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고 로고스가 임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인격은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두 개의 격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로스(376-444)가 적극 반대하고 항의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성을 주장하였다. 키릴로스파는 동방교회의 회원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 틈을 타서 네스토리우스를 교회에서 추방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네스토리우스파가 도착하자, 그들은 그들대로 키릴로스를 이단이라고 결의하였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처음에 두 결의를 모두 비준하였는데 후에는 케릴로스에 대한 선고를 취소하고 네스토리우스를 출교하였다. 이로 인해 키릴로스는 점점 세력을 얻게 되고 435년에는 마침내 네스토리우스를 아라비아로 귀양가게 만들었다.
3.도적 회의
이 회의는 449년 에베소에서 열렸는데 의제는 유티케스(Eutyches)의 일성론(一性論, Monophysitism)에 관한 논쟁이었다. 유티케스는 콘스탄티노플 부근의 수도원장으로서 열심있는 키릴로스파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주장한 일성론이란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의 두 성질로 되어 있는데 두 성품이 합일한 후에 인성은 신성에 침범되고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몸과는 다른 신비적인 몸이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이전에는 양성으로 있었으나 후에는 일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지방 대회는 이러한 유티케스의 일성론을 부정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우리의 인성과 다른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키루스는 이 논쟁에서 일성론이 득세하는 것이 자파의 세력을 펴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유티케스에게 지지를 보내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권하여 회의를 소집하게 하였다.
알렉산드리아 감독 디오스코루스(Dioscorus)는 그 회의의 의장이 되어 군인들과 무뢰한들을 동원하여 반대파를 위협하는 가운데서 일성론을 반대하는 안디옥파 지도자들의 추방을 결의하고 이미 정죄받고 쫓겨난 유티케스를 복직시켰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 회의를 <도적회의>라 부르고 정식 교회 대회에 넣지 않는다.
4.제4차 세계 교회 회의
이와 같이 여러 차례 세계 교회 회의가 열려서 기독론에 관한 논쟁이 전개되었지만 교회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완전히 표현하지 못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서만 아니라 인간으로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주가 되기 위해서는 완전한 신성뿐 아니라 완전한 인성도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많은 다른 견해들이 존재하였고 이의 조화를 위해서는 아직도 더 많은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였다.
결국 451년 니케아 근처 칼케돈(Chalchedon)에서 또 하나의 종교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소집자는 마르키아누스(Marcianus)황제였고 600명 정도의 감독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유명한 칼케돈 신조가 작성되었다. 이 신조는 니케아 신조와 마찬가지의 중요성을 띤 신조이다.
이 신조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충분하고 완전한 신성}을 믿음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충분하고 완전한 인간성}을 믿는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더욱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두 성품, 곧 인성과 신성이 존재함을 고백하였다. 교회는 이 두 성품의 관계에 대해 두 성품은 혼동이 없고, 변함이 없으며, 분리가 없고, 불화가 없이, 조화를 이루며 존재한다고 말했다. 결국 교회는 그리스도는 두 성품을 가져도 한 인격이지 두 인격이 아니라는 고백을 한 것이다.
⊙ 칼케돈 회의의 결의 사항 요약
①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도 완전하고 인성에도 완전하며 각기 그 성질을 보전한다.
② 그리스도는 참 신이시며 참 인간으로서 이성이 있는 영혼과 육체를 소유하였다.
③ 그의 신성은 성부와 같고 그의 인성은 우리와 같으나 죄가 없으며 이 양성은 혼합되거나 변하지 아니하며 떠나지도 아니한다.
④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성으로 동정녀에게 탄생하였다.
5.제5차 세계 교회 회의
칼케돈 회의는 교리 논쟁에 있어서 일단락을 짓게 하였으나 싸움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는 즉위하자마자 곧 일성론자와의 타협을 꾀하고 또한 로마 감독에 대해서도 독립된 지위를 얻으려는 동기를 가지고 삼장령(三章令)이라는 발표하였으나(삼장령이란 안디옥파의 세 신학자, 테오도레트, 이바스, 테오도레의 주장을 반박한 것), 소득이 없고 도리어 소란만 일어나서 결국 콘스탄티노플에서 제5차 대회를 소집하였다. 여기서 칼케돈 신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정통 교리로 삼고, 일성론을 취한 교회는 분리하여 고립된 단체가 되었다. 이집트에 있는 콥트 교회, 이디오피아 교회, 알메니아 교회, 시리아 및 메소포타미아 근방에 있는 야곱 교회가 그것이다.
6.제6차 세계 교회 회의
제6차 회의는 콘스탄티노플에서 680에 열렸다. 소집자는 콘스탄티누스 4세로서 세르기우스의 一意論(單意論, Monothelitism)과 그 주장을 지지한 로마 감독 호노리우스를 정죄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다 가졌지만 오직 한 뜻 곧 神意만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는 이 주장을 배격하고, 그리스도에게는 두 의지가 있으며 단지 인적인 의지는 신적인 의지에 복종할 따름이라는 이의론(二意論)을 채택하였다.
7.제7차 세계 교회 회의
제7차 회의는 니케아에서 787년에 열렸는데 동방 교회 마지막 대회였다. 소집자는 콘스탄티누스 6세였는데 이 회의는 레오 4세 황제가 금한 성상(聖像) 사용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 위해 소가지 일으몄집되었다. 레오 4세가 성상 숭배를 금했을 때 많은 수도사들과 신자들이 반발했는데 레오 황제는 이들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6세가 즉위하여 다시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하였고 거기서 성화 숭배를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의에서는 '성화, 십자가, 복음서들은 존숭(尊崇)할 것이니 참 예배는 신성(神性)에 한하나 이상(以上)에 대한 존숭은 그 물질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표현하는 내면적 실재에 대한 존숭이다' 라고 선언했다. 이 회의가 성상 숭배가 정당하다고 결정한 근거는 예수님이 참 사람이셨다는 사실과 복음 사건들이 참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데 두었다. 신성이 물질계에서 멀지 않다는 것과 성육신(成肉身)에서와 마찬가지로 물질계가 하나님께 접근케 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원칙이 승리한 것이다.
⊙ 사벨리우스(Sabellius ?―260?)
사벨리우스는 로마의 신학자인데 리비아 태생이라고 하나 불확실하다. 삼위일체를 둘러싼 고대 교회의 기독론 논쟁에서 아리우스와 함께 양대 이단설 중 하나(사벨리우스주의)를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성부(聖父)·성자(聖子)·성령(聖靈)을 삼위일체로 보며 이 세 위격(位格)은 동일 본질과 영광을 지니지만 각각 3가지 고유성을 지닌다고 하는 전통적 기독론에 반대하여,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와 구별되는 고유성을 지닌 위격(位格)이 아니고 아버지인 신(神)의 단순한 현현양태(顯現樣態)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양태론>(樣態論;modalism)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수난을 아버지 자신의 강림과 수난으로 보는 성부수난설(聖父受難說;patripassianism)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사벨리우스는 비판을 받고 파문 당했다.
⊙ 아리우스主義
아리우스가 주장한 것으로서, 고대 기독교회의 기독론 논쟁에서 사벨리우스주의와 함께 양대 이단설 중 하나이다. 아리우스는 그리이스 철학의 사변(思辨)에 따라 하나님의 유일절대성(唯一絶對性)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결코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는 않았고, 설령 절대적으로 뛰어난 위치를 차지한다 할지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무(無)에서 창조해 낸 피조물(첫 피조물)이라고 하였다. 이것에 대하여 아타나시우스를 비롯한 정통적 삼위일체론자(三位一體論者)들은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주의를 배척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본질(同一本質)을 갖는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는 그후에도 정치 권력과 손을 잡고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성서적(聖書的)·구속사적(救贖史的) 기독교 신앙이 철학적·우주론적 헬레니즘 세계에 전해졌을 때, 필연적으로 대결할 수밖에 없었던 사상이었다.
5.기독교의 국교화 과정
기독교에 자유를 준 콘스탄티누스가 전체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은 그의 대적 리키니우스를 무찌른 324년이었으나 콘스탄티누스는 그 전에 이미 제국을 양분하고 있던 동방의 리키니우스는 협약을 맺어 모든 종교에 자유를 주기로 한 바 있다. 이것이 313년의 밀라노 칙령인데, 이로 인해 기독교는 오랜 박해를 벗고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틴과 최후 대결을 할 무렵에 입장을 바꾸어 다시 잠시 기독교를 박해했지만 얼마 안가 전쟁에 패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오래 가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재위 기간 동안 비록 기독교를 제국의 공식 국교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는 한 모든 호의를 베풀며 장려 보호했다. 그러나 361년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후 제국은 일시적으로 소위 '배교자 줄리안'이라고 불리는 콘스탄티누스의 사촌 줄리안(율리아누스)에 의해 2년 동안 지배를 받았다. 그는 기독교를 편향적으로 옹호하는 조치를 철회하였다. 그러나 전처럼 교회를 박해를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 동등한 자유를 부여하는 중립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기독교가 로마 제국을 봉합하고 번영케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콘스탄티누스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줄리안은 불과 재위 2년만에 죽고 말았다. 그가 죽은 후 스페인 출신의 데오도시우스 1세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는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정했을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이교와 이단을 박해했다. 그들의 기독교 집회 외의 모든 집회와 의식을 금지하고 집회 장소와 재산을 몰수했다. 더 나아가 438년에 데오도시우스 2세 때에는 데오도시우스法이라는 법이 공포되었는데 이 법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자들(예컨대 아리우스파 등)과 기성 교회를 부정하고 재세례(再洗禮)를 시행하는 자들(예컨대 도나투스파 등)에게 사형을 내리도록 하는 법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제 기독교는 로마에서 허용되고 장려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로마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바야흐로 이제 로마는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로마 제국의 사상적 변화도 있게 되었다. 줄리안이 등장하기 전에 콘스탄틴의 세 아들이 나라를 삼분하여 다스리는 동안 서방은 아다나시우스파의 니케아신조를 견지했고, 동방은 아리우스파의 견해를 견지했다. 그러나 동방을 다스린 콘스탄티누스의 셋째 아들 콘스탄티우스가 전체 로마를 다스리게 되자 로마 제국은 전체적으로 아리우스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 등장한 줄리안은 이교를 비롯한 모든 이단파들을 복권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제국 전반에 걸친 그동안의 아리우스파의 우세를 끝내고 아다나시우스파가 득세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것은 유배되었던 정통파 주교들이 줄리안의 조치로 복권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6. 수도원의 발달과 영향
1.발생 배경
(1) 기독교가 국교가 되자 기독교의 세속화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금욕 생활과 경건 생활을 추구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은둔 생활이 유행하게 되었고 수도원이 발달하게 되었다.
(2) 교회가 지나치게 조직화, 규율화 사회제도화 됨에 따라 좀더 단순하고 개인적이며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도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뜻을 이룰 수 있는 특수한 사회(곧 수도원)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3) 물질적인 가치보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꾸만 물질적, 육적 생활로만 기우는 복잡한 도시 생활에서 떠나 물질과 상관 없이 하나님과의 교제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을 도모하게 되었다.
2.기원
수도원은 이런 저런 이유로 도시 교회에서 갈라져 나와서 혼자 살게 된 은둔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수도원은 처음에 동방에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유명한 은둔자는 안토니우스(Antonius, 356년 사망)이다. 그는 이집트 사람으로서 부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조실부모하고 누이와 같이 살았는데 항상 속세의 일들이 번잡함으로 인해 고민하다가 마19:21에서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소유를 팔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에 감동하여 전 재산을 팔아 정리하고 혼자 굴속으로 찾아 들어갔다.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추종자가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빈부귀천을 불구하고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며 돌보았다. 그리고 박해가 있었을 때는 여러 번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신자들을 격려했다.
안토니우스가 가는 곳에 그를 사모하여 찾아가는 사람이 많았던 것처럼 유명한 은둔자가 거처하는 곳 주위에는 초막을 짓고 같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촌락을 이루고 때로 서로 만나서 기도를 같이 하였다. 그러다가 점차 한 집에 같이 살면서 공동생활을 하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은둔자들의 독거 생활 중 생길 수 있는 위험과 시험들을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3.규칙
1.규칙 제정의 필요성
수도원에 엄격한 규칙이 제정된 것은 수행자들의 독단적 수행으로 인해 극단적 금욕 행위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고, 게을러지거나 자유 방종케 되는 것을 방지하며, 조직의 유지를 위해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2.규칙 제정자들
수도원의 규칙을 처음으로 제정한 사람은 {파코미우스}이다. 그는 나일강의 타벤나이(Tabennae)섬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계획에 따라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파코미우스 제도의 특징은 금욕주의자들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한 권위자 아래서 복종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금욕 생활에는 단지 청빈과 순결만 요구되었는데 이제는 여기에 복종이 첨가되었다. 그들은 규칙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공부를 하며 노동을 하였다. 규칙적인 의식을 어기는 자에게는 징벌도 가했으며 훈련은 군대식으로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또 가이사랴의 {바실리우스}(Basillius the Great)도 애굽과 팔레스틴의 은둔자들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자신도 그런 생활을 실천하다가 수행 생활의 결점을 발견하고 친히 수도원을 세워서 새로운 타입의 수사 제도를 발전시켰다. 그의 수도원제도의 특징은 첫째, 개인적인 수도 생활보다 조직 안에서의 완전한 공동 생활을 주력한다는 것, 둘째, 수도원 건물을 사막에서 도시 가까운 곳으로 옮겨 세우는 것, 셋째, 수도원 생활이 지나치게 엄격해지지 않도록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기도 시간(8시간 이내)이나 고행 시간을 줄이고 일상 생활이 정상적으로 영위되도록 했다. 넷째, 학문을 닦게 했다. 이로 인해 수도원이 신학의 산실이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수도원이 이집트와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 유행되어 그 수가 증가하고 여성들을 위한 수도원도 생기자, 극단적인 금욕 생활의 위험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사들은 극단적으로 기도하며 거의 미친 사람처럼 생활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아코메타이는 주야로 잠을 자지 않고 기도하였으며, 시리아의 유케타이는 일을 하지 않고 기도만 하였다. 이러한 극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규율을 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4.서방 수도원
원래 동방에서 시작된 수도원 제도는 4세기 중엽에 서방에도 전파되었다.
(1) 마르티누스(Martinus)가 고올(프랑스)에 수도원 설립함.
(2) 암브로시우스(Ambrosius)가 밀라노에 수도원을 설립함.
(3) 카씨아누스(Cassianus)가 고올 남부 마르세이유에 수도원과 수녀원을 설립했다. 이곳은 서방 수도원의 중심지가 되고 카씨아누스의 글은 바실루스의 규칙 번역문과 함께 수도원 생활의 표준이 되었다.
(5) 서방에서 수도원 규칙을 세우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베네딕투스}(Benedictus, 480-543)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카씨아노 山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은 서방 수도원의 전형이 되었다. 베네딕투스가 세운 규칙은 서 유럽 수도원의 전형이 되었는데 그 규칙은 다음과 같다.
衁. 수도원장은 수도원 전체 선거에서 일치로 선출. 선거가 원만히 안될 때는 그 지방 감독과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원만히 처리되도록 할 것.
遁. 큰 일은 전체 회의에서, 작은 일은 원장이 수도사 연장자와 협의하여 처리할 것.
鑁. 수도원장이 되려는 자는 일정한 기간동안 시험을 받은 후에 수도원에 정주할 것과 엄격한 도덕을 지킬 것과 규율에 복종할 것을 서약해야 함.
鱁. 명상과 수행으로만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노동을 장려하고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력으로 생활할 것.
처음에 수도원은 세상을 멀리 떠나 은둔하면서 개인적 신앙 생활을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그레고리우스 1세는 수도원에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수도원을 학문의 중심지로 만드는데는 카씨오도루스(Cassiodorus)의 힘이 컸다. 그는 수도원에서 학문을 강의하고 저술을 하면서 수도원을 학문의 전당으로 만들었다.
수도원은 형식적으로는 세상을 떠나 있었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있는 일반 교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며 서로 교류하였다. 수사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의 주교나 사제로 임명되는 일이 많아졌으며, 이들이 주교로 임명되면서 수도원적인 금욕적 규칙들, 특히 독신주의를 교회의 일반 성직자들에게도 강요하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수사들은 교회를 섬기러 사회로 돌아오는 반면 주교들은 영적 충전을 위해 수도원으로 들어감으로써 교류가 이루어진 것이다.
5.수도원 제도의 한계
교회들이 성경의 가르침에서 이탈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자 교회를 성경의 정신대로 개혁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게 되었고 몬타누스파나 도나투스파와 같은 무리들이 이러한 교회 개혁의 선봉에 서 있었다. 이들 상당수는 세속적 삶에서 자기를 지켜 거룩과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통을 추구하였다. 경건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점점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게르만족 등의 야만인들에 의하여 로마가 초토화되고, 교회들은 국가와 결탁하여 진리에서 벗어나 타락하는 것을 본 이들은 세상(일상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또한 기존 교회의 틀 안에서는 바른 신앙 생활과 성도의 참된 교제를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들은 일상적 삶의 미혹과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이 찾지 않는 험한 광야나 산으로 갔으며 거기서 은둔자(隱遁者)처럼 살았다. 그들은 명상으로 자기 영혼을 맑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통찰력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도 세속적 삶을 떠나 안식할 곳으로 수도원을 찾았다. 남녀를 불문하고 약하고 곤고한 자들이 피할 곳은 수도원 뿐이었기 때문이다. 야만인이 득세하고 모든 것이 혼란해진 상황에서 그나마 학문이 보전되고 성경이 필사되고 번역되고 읽혀지는 유일한 곳은 수도원이었다.
그러나 마귀는 이러한 수도원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마귀는 수도원들로 하여금 우선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노력과 훈련에 더 관심을 두게 만들었다.
타락하고 물질화된 교회에 대한 반발로 수도원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수도원의 수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물질은 악하다'는 당시의 철학적 영향을 받아서 영적 삶을 저해하는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서 극도로 검소한 생활과 금욕적 수양을 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육체 단련과 금욕적 수행은 믿음으로 사는 것과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육체의 정욕을 꺾기 위해 고행을 하거나 세속적 삶을 피하는 것은 죄와 정욕을 처리하는 근본적인 방법이 될 수 없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을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으로 넣으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방법에 주의하지 않은 수도자들은 죄를 이기기 위해서 오직 자신들의 고행과 금욕적 노력에 의지하였고 이것이 효과를 보지 못하자 그들은 점점 더 심한 고행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여러 가지 기괴한 행위들이 다 나오게 되었다.
교회가 세속과 권력으로 집착할수록 수도원은 하나님과 영적인 순수함을 추구하려는 많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수도원 생활이 곧 성경적이고 정상적인 신앙의 길로 돌아가는 것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곧 깨닫게 되었다. 수도원의 수립과 발전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곧 교회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속화된 로마 교회를 떠나 수도원으로 온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 안에서도 참 교회가 줄 수 있는 생명과 안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수도원들은 점차 도저히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경험할 수 없을 정도로 조직적이고 규율적이 되었으며 종교적이고 율법적이 되었다.
이처럼 수도원의 영적 기초가 약화되자 이제 수도원의 외형적 경건도 무너지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가난과 절대적 자기 부인(否認)에서 시작한 수도원들이 나중에는 점차 부와 권력을 축적하게 되고 자기들이 이전에 떠나온 교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타락하게 되었다.
수도원이 잘못 끼운 첫 단추는 그들이 인간(수도자)의 연약함을 감안하여 수많은 규칙과 율법 및 그것에 따른 수행과 훈련이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의 인도와 성경의 가르침대로 행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성령보다 조직과 제도에 더 의지하고 말씀보다 의식과 훈련에 더 관심을 가진 교회들이 타락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보다 조직과 제도, 말씀보다 규율과 수행에 더 관심을 가졌던 수도원들도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수도원은 더 무서운 사탄의 공작을 받아서 걷잡을 수 없는 타락의 길로 내달았는데 그것은 수도원이 교황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진실한 신앙을 회복하고자 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도구가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회가 박해를 받던 때에는 별로 타락하지 않다가 국가와 세상의 환영 속에서 지지를 받고 그것과 연합하게 되었을 때 타락하고 만 것처럼 수도원도 카톨릭 교회의 관심 밖에 있을 때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교회의 관심을 얻게 되고 지지를 받아서 힘을 가지게 되자 곧 타락하고 세속화되고 말았다. 세속화되기 전에는 수도원은 타락하고 왜곡된 교회들에게 신선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수도원 자신이 세속화됨으로 인해 그들은 타락한 교회들과 함께 참된 신앙을 갈구하는 민중들을 압제하고 괴롭게 하는 또 하나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성령님은 암흑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계속 일으키셨다. 성령님은 도처에서 일단의 무리들을 일으키셔서 그들로 하여금 '성령'과 '성경'을 신앙과 신학의 유일한 근거로 삼게 하시고 개인 생활이든 교회 생활이든 오직 이것을 기준으로 하며 능력의 원천으로 삼게 만드셨다. 이들은 타락한 교황과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았으며 성경이 말하는 바를 따라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갔다.
7. 로마 교회의 교황권 강화
니케아 시대에 이르러서는 로마 교회와 감독의 영향력과 권위가 현저히 강화되었다.
1.교황권이 강화된 이유
첫째, 로마 교회는 로마 제국의 수도(首都)에 있는 교회였으므로 자연히 타 지역 교회들에 대해 위세를 떨칠 수 있었고, 또한 대도시 교회라서 유력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전도와 구제 사업을 많이 하며 각처에 지어지는 교회당 건축비 등 재정적 부담을 많이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영향력이 커졌다.
둘째, 로마는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지였으므로 로마가 신앙과 교회의 중심지처럼 여겨지게 되었고 따라서 로마 교회의 감독의 권위도 높아졌다.
셋째,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치적 수도를 동방의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후에는 황제나 기타 유력한 사람들이 로마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 교회의 감독(교황)이 상대적으로 로마에서 가장 유력한 사람이 되었다.
넷째, 레오 같은 유능한 감독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만인들이 침입하여 로마가 위기를 만났을 때 레오 감독은 그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군대를 일으켜서 이를 물리쳤다.
다섯째, 343년 불가리아의 살디카에서 지방 대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로마 교회가 교회의 본부 역할을 하도록 결정되었다. 또한 이 결의를 근거로 하여 그후의 몇몇 로마 황제들이 로마 교회의 지위를 더욱 격상시켰다.
2.레오 1세
레오 1세는 440년부터 461년까지 로마 감독이었다. 그는 웅변가요 설교가였으며 문학적인 재질과 행정적 정치적 재질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로마의 교권을 장악하였으며 또한 그 교권의 근거를 밝히기에 노력하였다. 그가 제시한 근거란 마태복음 16:9 말씀인데, 로마 감독은 바로 여기서 말하는 바 주님의 권위를 위임받은 베드로를 계승한 자라는 것이다. 레오는 하나님께서 로마 제국을 세운 것은 기독교를 위한 것이므로 수사도(首師徒;베드로)의 교위(敎位)가 있는 곳이자 제국의 수도에 있는 교회는 당연히 모든 교회의 수장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당시의 서로마 제국 황제 바렌티아누스 3세는 칙령을 내려, 로마의 감독은 서방 교회의 원수(元首)이므로 이를 거스리는 것은 국가를 거스리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에베소와 칼케돈 회의는 레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방 교회에서 레오는 일반적으로 존경을 받지 못했다. 레오는 기독론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유능한 사람이었으나 449년에서 451년 사이에 열린 회의에서 그의 정책은 배척을 받았다. 이때부터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에 대립은 커 갔으며 이것은 마침내 동서교회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8.동방의 교부들
A. 알렉산드리아와 팔레스틴의 교부들
1.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260-339년)
유세비우스는 가이사랴의 감독이며 교회사의 아버지로서 유명하다. 그는 260년 팔레스티나에서 출생하였고 신앙으로 인해 감금된 일도 있다. 그는 가이사랴에서 팜필루스에게 배우고 315년에 가이사랴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 논쟁이 벌어졌을 때 온건파로서 니케아 신조의 원안(原案)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후에 그는 황제의 은총을 입고 339년 죽을 때까지 궁정 출입을 하였다. 그는 변증, 역사, 해석, 변론 등에 대한 책을 많이 썼으나 가장 유명한 것은 {교회사}(敎會史)이다. 그의 교회사는 서방 교회사의 사료(史料)보다 동방 교회사의 사료가 많다. 그의 저서는 교회사 외에도 {기독교 변증론}(20권), {유대인 변호史}(15권), {콘스탄티누스 대제傳} 등이 있고, 고대 저술가들의 저술을 발췌하여 복음에 들어가는 길을 열고자 하여 쓴 {복음의 준비} 및 유대인을 위해 예언에 근거하여 기독교를 변증한 {복음의 증명}(20권)이 있다.
유세비우스 감독 외에도 교회사에 나오는 유세비우스는 6명이나 되는데 그 중에서 이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특히 훌륭한 변증가로서 그의 교회사 역시 역사적 사실로서 기독교회가 이교와 이단들과 싸워 훌륭히 이겼다는 사실을 변증하기 위해 쓴 것이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의 뒤를 이어 교회사를 쓴 유명한 세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5세기 초의 콘스탄티노플의 수사학자인 소크라테스(Socrates)이다. 그는 은퇴 후 유세비우스의 역사가 끝난 시대부터 439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소조멘(Sozomen)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 같은 곳에서 같은 직업에 종사한 사람이었는데 같은 시대의 역사를 소크라테스와는 다른 시각에서 기록하였다. 또 하나는 테오도렛(Theodoret)인데 그는 387년 경 안디옥에서 출생하여 부귀 영화를 버리고 전도에 헌신한 사람이다. 423년 구브로섬의 감독이 되었으나 이단 혐의를 받고 교회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후에 이단이 아님이 밝혀졌다. 그는 428년까지의 교회사를 기록한 교회사를 남겼다.
2.아타나시우스 (296-373년)
아리우스를 반대하여 정통적 교리를 세운 교부로 유명한 아타나시우스는 당시의 신학계에서 가장 유능한 학자였다. 역사학자 샤프는 말하기를 '콘스탄티누스가 정치계와 세속에서 니케아 시대의 중심 인물이었다면 아타나시우스는 신학계와 교계에 있어서 중심 인물이었다'고 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드루스가 죽으면서 그의 후계자로 추천되어 326년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되었다. 그는 46년 동안 감독직에 있으면서 정통 교회의 간성(干城)으로서 끈기 있게 아리우스 이단과 대항하였다. 그러나 궁정의 방침이 자주 바뀌어 33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트리야로 유배되었으며, 342년에는 로마로 유배되었고 351년에는 사막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이처럼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으나 말년에는 평화롭게 살았고 그 동안 이단을 반박하는 글을 끊임없이 썼다.
그의 저서로는 <로고스의 성육신>, <아리우스를 반격함>, <콘스탄티누스에게 바치는 변증론>, <안토니오의 전기> 등이 있다.
3.키릴로스(Cyril)
키릴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413-444)이었으며 네스토리우스와 논쟁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정통적이었만 성격이 과격, 포악했으며 당파심이 강하여 적을 대하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웠다.
B. 시리아와 소아시아 지방 교부들
1.데오도레 (Theodore)
테오도레는 길리기아의 몹스에티아의 감독이었는데 성경 주석자로 유명하다. 그 단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는 성경을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폐단에서 벗어나 시대를 앞서서 역사적 언어학적 주석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2.바실리우스(Basilius the Great, 330-379)
소아시아의 갑바도기아 지역에서 배출된 사람들으로서 정통 신앙의 중요 옹호자요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하여 싸운 세 명의 감독이 있는데 {대 바실리우스}와 그의 아우인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그의 친구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이다.
이 중 바실리우스 형제는 부유하고 경건한 가문 출신으로서 그의 선조들 중에는 순교자가 많이 있었다. 바실리우스는 330년에 출생하였는데 할머니의 신앙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아테네에서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와 알게 되어 한 평생 친구가 되었다. 그는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아테네에서 수학했고 355년 고향에서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한 자매의 권고로 수도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365년에 가이사랴 교회의 부름을 받고 그 교회의 부목사가 되었으며 5년 후에는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가바도기아의 총감독이 되었다. 바실리우스는 379년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병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교회를 지도하여 아리우스 주의에 대항했다. 그는 신학자와 설교자로서도 유명하였으나 교회를 통솔하고 지도하는 행정적 정치적 지도력이 특출하였다. 그는 수도원 생활의 규칙을 제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저서에는 <그리스도의 신성론>, <성령론>, 설교집, 서신 등이 있다.
3.닛사의 그레고리우스 (Gregorius Nassenus, 332-395)
바실의 동생인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형과 마찬가지로 몸이 약했는데 수사학 교사가 되었다. 후에는 형의 감화로 수도원에 들어갔고 372년에 닛사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감독으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380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신학 논쟁이 있었을 때는 총회에 참가하여 가장 탁월한 신학자로서 활약하기도 했다. 그도 자기 형처럼 삼위일체 교리와 화신(化身)의 교리를 입증하는데 주력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모든 니케아 시대 교부들 중 오리게네스의 사상과 가장 가까웠다고 한다. 그의 저서로는 아폴리나리스를 반박한 글이 있다.
4.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Gregorius Nazianzus)
그는 가바도기아의 교부 중 마지막으로 바실리우스의 친구였다. 331년 출생하여 390년 경에 죽었다. 그의 어머니는 논나(Nonna)인데 크리소스톰의 어머니 안투사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교회사상 유명한 어머니 중 하나이다. 그레고리는 젊을 때 장로가 되었는데 374년 감독인 아버지가 죽자 본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나지안주스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380년 콘스탄티노플에 초청되어 신학 논쟁에 참가하고 강권을 받아 대교구장에 추대되었다가 이듬 해에 콘스탄티노플의 대회가 열리자 그 의장이 되었다. 그는 닛사의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회의의 수뇌였다.
그레고리는 유능한 설교가였다. 동방 교회에서는 크리소스톰 외에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설교와 편지 및 시(詩) 등이 남아 있다.
이 세명의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다 자연을 매우 사랑하였다. 그들은 자연미에 대한 감흥과 그들의 영적 열망을 결합하였다. 그들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영원한 아름다움 간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이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오리게네스를 존경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아타나시우스가 밝힌 입장을 지켰으나 오리겐의 입장에서 아타나시우스의 교리를 해석하였다.
5.크리소스톰 (Chrysostomus)
크리소스토무스는 346년 안디옥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장군이었는데 일찍 죽었고 어머니 안투사(Anthusa)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와 같이 칭찬받는 신앙인이었다. 그의 이름의 뜻은 [황금의 입]으로서 그의 후례들이 설교에 능한 그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그는 훌륭한 성경 주석가요 설교자요 또한 법률가였다. 그는 당시 유명한 수사학자인 리바니우스에게서 문학을 배웠다. 리바니우스는 안투사를 칭찬하면서 그의 아들 크리소스톰이 그리스도인만 되지 않았다면 그의 후계자로 삼았을 것이라고 하며 아쉬워했다. 코르소스톰은 잠시 수사학자와 변호사가 되었다가 안디옥의 감독 멜리티우스에게 신학을 배운 후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안디옥 근처의 산에 들어가 수도 행활을 하였다. 거기서 그는 깊은 신앙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금욕 생활을 한 결과 건강을 해치게 되어 380년 안디옥으로 가서 집사와 장로를 거쳐 394년 안디옥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397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총감독)가 되었다.
그는 같은 시대의 교부들처럼 신학 논쟁에 참가한 적이 별로 없으며 사변적이기보다는 실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특히 설교와 성경 해석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설교는 대개 본문을 해석한 것으로서 성경 각 권을 순서대로 해설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만 600여편에 이른다. 그의 설교의 특징은 성경 해석을 중점으로 한 것 외에도 고문학의 소양이 풍부한 것과 도덕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서 당시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 많이 언급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당시 풍속이 문란하고 사치와 방종으로 흐르는 것을 공격하였다. 심지어 그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미망인인 황태후를 공격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404년 길리기아의 한 시골로 추방되기도 했다. 그는 귀양가서도 전도에 힘쓰고 신자들을 가르치며 권면하는데 힘을 썼다. 그는 407년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한 전기 작가는 그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편협한 독단설과 격한 논쟁을 피하고 실행이 없는 정통설보다 실제로 경건한 생활을 더 강조하였다'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그는 자기가 믿는 바를 설교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바를 설교하고, 성경에서 금하는 바를 정죄하고, 성경에서 명하는 바를 권장하였다'고 했다.
9.서방의 교부들
1.힐라리우스 (Hilarius, 295-368)
이 시대에 나타난 서방 교부들 가운데 가장 초기의 사람은 힐라리우스이다. 그는 지금의 프랑스 지역 프와티에에서 출생했는데 철학과 문학에 뛰어났다. 그는 장년이 되어서야 예수를 믿고 처자식과 함께 세례를 받고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350년에 고향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지방은 아리우스설이 왕성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통 교리의 투사로서 투쟁하여 [아리우스를 쳐부수는 방망이]라는 별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삼일일체 신론>, <신앙론>, <시편 주해> 등이 있다.
2.암브로시우스 (Ambrosius, 340-397).
4세기 후반과 5세기 전반에 활동한 서방 교회 지도자로서 유명한 3인은 암브로시우스, 히에로니무스 제롬,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이 세 명을 가리켜 라틴 교회의 교부들이라고 한다. 이 중 암브로시우스는 340년 고올(Goul)의 수도 토리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부친은 로마 정부의 고관을 지냈으므로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큰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의 재능으로 인해 그는 젊을 때(370년) 북 이탈리아 지역 장관이 되었다. 그의 거주지인 밀라노에는 많은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있었다. 밀라노의 감독 악센티우스가 죽자 후임자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진정시키려고 회의장에서 암브로시우스가 연설을 하자 어떤 소년이 '암브로시우스는 감독이다'라고 외쳤다. 이 말이 마치 하나님의 음성처럼 권위있게 받아들여져서 암브로시우스는 즉석에서 후임 감독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아직 세례도 받지 않고 있었으므로 곧 세례를 받고 감독직에 취임하였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생각하고 그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감독으로서 헌신하게 되었다.(374년)
암브로시우스는 니케아 신조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그는 아리우스파와 평생 싸웠다. 그는 많은 책을 지었으며, 위대한 교사, 학자로 불렸다. 그는 또한 성가(聖歌)를 많이 발전시켰으며 신학과 성경 연구에 힘썼다. 또한 그는 대단한 행정가로서 교회를 잘 통솔하며 교회의 권위를 유지시켰으며 신앙 생활의 높은 표준을 담대히 지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잔혹한 학살을 감행하자 암브로시우는 격분하여 황제의 성만찬 참여를 거절하고 공식 참회를 받은 후 8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사면해 주었다. 그는 그의 훌륭한 설교로서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저서로는 <설교집>과 <성경주해>, <찬미가> 등이 있다. 암브로시우스는 강인한 성격과 불굴의 정신, 정열과 고상한 인격으로 무너져가는 제국 속에서 교회를 지탱한 위대한 교회의 지도자로 불린다.
3.히에로니무스 제롬 (Hieronumus Jerome)
제롬은 고대 서방 교회가 자랑할만한 가장 유능한 학자였다. 그는 346년 달마티아 근교 스토리돈에서 출생했다. 그는 20세에 세례를 받고 오리게네스의 번역자 루피누스를 만나 종교 문학에 뜻을 두었다. 그는 여행을 좋아해서 수년간 로마 제국 각지를 여행했는데 안디옥에서 병을 얻어 머무르던 중 꿈 속에서 주님의 꾸지람을 듣고 374년부터 5년간 칼키스 사막에서 은둔 생활을 하면서 히브리어를 배웠다.
제롬은 교부들 중 수도원 생활을 가장 격려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완전한 묵상과 종교적 근신에 헌신하기 위해 세상을 떠나 수도 생활을 했다. 평생 그의 생활은 수도자의 자세로서 책을 읽고 저술하며 엄격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냈다. 그는 385년 동방 여행에서 애굽수도원을 보고 부유한 과부 파울라와 함께 베들레헴에 수도원을 여러 개 세웠다. 그는 수도원장으로 34년간 일하다가 420년에 죽었다.
제롬의 일생 일대의 사업은 신구약 성경의 라틴어 번역이었다. 당시에도 라틴역 성경이 있기는 있었으나 그것이 거칠고 오역이 많았기 때문에 교황 다마수스는 제롬에게 새로운 번역을 권했다. 이에 그는 먼저 388년 경에 신약을 번역했는데 이것은 이전 번역에다 일부 수정을 가해 완성하였다. 그리고 구약은 처음부터 새로 번역하였다. 약 12년의 작업 결과 완성된 이 번역은 심지어 어거스틴의 의견까지 무시하며 70인 헬라역(LXX)을 버리고 히브리 원문을 사용하여 완전하게 번역하려고 노력한 산물이었다. 이 라틴역은 후에 불가테(Vulgate ; 통용)로 불리며 카톨릭 교회에서 범용되었다.
10.제국의 변천
1.서로마 제국의 멸망
서방에서 제국 정부는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래로 끊임없이 변경으로 밀려드는 야만족들을 저지하는데 힘을 써 왔다. 갈리아는 주기적으로 프랑크족과 알라마니아족에게 위협을 당했고, 브리타니아(영국)는 픽트족과 스코트족에게 위협을 당했으며, 주변 해역은 색슨족에게 위협을 당했다. 다뉴브강 유역의 속주(屬州)들도 고트족에게 시달렸으며, 한 번 이상 그들에게 정복당했다. 동방 황제들과 서방 황제들이 서로 다투는 동안 제국의 국력은 약해졌고 무거운 조세가 속주들의 힘과 충성을 약화시켰다.
5세기가 시작되면서 로마는 심각한 위협에 처하게 되었고, 마침내 로마는 410년 알레릭이 이끄는 서고트족에 의해 처음으로 약탈당했으며 그 뒤 가이세릭이 이끄는 반달족에 의해 또 다시 약탈당한 뒤 로마는 마침내 거대한 세계 제국의 수도로서의 기능과 면모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476년 로마의 최후의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게르만 출신의 지휘관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폐위되었으며 이로서 로마 제국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2.제2의 로마
서로마제국은 멸망했지만 로마 제국 황제의 칭호는 제2의 로마라 불리던 동로마제국 곧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의 비잔틴제국 군주들에 의해 보존되었으며 로마 제국도 동쪽에서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 특히 6세기에 등장한 유스티니아누스(527-565재위)는 영토를 확장하여 옛 로마의 영광을 대부분 회복하였고 문화도 진흥시켰다. 그러나 그의 사후 국가 재정의 파탄으로 그의 후계자들은 서방의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겨우 동쪽 부분을 유지하는데 급급했으며 1세기 반의 암흑과 혼란의 시기를 거쳐 11세기 이후부터 비잔틴 제국은 크게 쇠퇴하였다.
⊙ 동로마제국 (Byzantine Empire)
동로마제국이란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수도로 한 로마의 동방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서쪽의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로마 제국이 망한(476) 뒤에도 나중에 비잔틴제국의 모체가 된 로마 제국의 동쪽 영토에는 1453년까지 그리스도교와 고대 그리이스 문화, 그리고 로마의 정치 체제가 지속되었다. 이곳의 언어는 헬라어가 공용어였다. 그리이스 정교(正敎)가 국교인 이 제국은 전 중세를 통하여 그리이스 정교권의 맹주(盟主)로 군림하였다. 특히 나중에 새롭게 탄생하는 슬라브계 여러 국가에게 있어 이 제국의 정치·종교·사회·문화 및 경제는 그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은 바로 [동로마]였다. 문화적으로는 그리스의 고전 문예를 가장 잘 보존·육성·발전시켜 이것을 서유럽 여러 나라 및 이슬람권에 전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인문주의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비잔틴 제국은 1453년 봄 회교 제국인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메트 2세의 공격으로 무너졌다. 그러나 그리이스 정교회는 오스만 투르크의 종교적 유화정책에 따라 존속이 허용되었다. 성화(聖畵), 교회음악과 교회건축으로 대표되는 종교 예술은 그리스정교회와 함께 오늘날까지 비잔틴문화의 계승자로 남아 있다. 비잔틴제국의 정치·법률·문화를 수용하고 그리스정교를 국교로 한 슬라브의 여러 국가, 특히 불가리아·세르비아·루마니아·키예프·러시아(나중의 모스크바 대공국)에는 제국 멸망 후에도 여러 방면에서 그 영향이 계속되었다. 그 중에서도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는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재위 1449∼53)의 조카 소피아와 결혼하였다. 그는 비잔틴황제의 즉위식을 본보기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스스로를 비잔틴제국의 후계자로 자처하였다. 또한 모스크바를 [제2의 로마](콘스탄티노플)>에 다음가는 [제3의 로마]라고 선언하였다.
11. 어거스틴
1.생애
아우구스티누스라고도 불리는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은 고대 교회가 낳은 가장 탁월한 신학자,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로마 제국 말기의 라틴 교부로서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지금의 알제리)의 타가스테(Tagaste)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시의원이었는데 성질이 사납고 방종한 인물로서 거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모니카(Monica)는 독실한 신자였다. 그녀는 어거스틴을 어릴 때부터 열과 성을 다하여 신앙적으로 양육했다.
청소년기에 어거스틴은 카르타고 등에서 수사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라틴의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도시의 퇴폐한 풍속에 물이 들어 품행은 그리 좋지 못하게 되었고 신앙도 잃고 말았다. 어거스틴은 17세 때부터 한 여자와 약 14년간 동거 생활을 했고 한 아들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감각적 본성에 일찍 눈뜬 것처럼 지성적으로도 일찍 깨었다. 19세에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감동을 받았고 그 후에 진리 탐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공부했으나 그에게서 지적 만족을 얻지 못하자 당시 유행하던 동방(페르시아)의 신비 종교인 마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기독교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성서의 소박한 문체나 가톨릭 교회의 보수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하는 마니교의 합리주의와 미적 종교성에 이끌린 것이다. 마니교는 기독교와 이교의 사상을 혼합한 이원론 사상이었다. 어거스틴은 8년간 마니교에 몰두했으며 그 중에 마니교적인 미학서 《미와 적합》을 썼다. 그러나 마니교에 깊이 들어가자 거기에 내재해 있는 지적(知的) 도덕적 불합리를 보게 되었고 마침내 마니교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마침내 어거스틴은 383년 로마에서 신아카데미아학파의 회의주의를 접하게 되어 마니교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친구들의 권유로 384년에 밀라노로 가서 수사학 교사가 되었다. 거기서 그는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책을 많이 읽었으며 그러던 중 진리의 실재(實在)를 깨닫게 되었다. 그가 주로 읽은 책은 신플라톤주의의 학자 플로티누스의 작품이었는데 386년에는 [불변의 빛]을 보았다는 체험 곧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적 황홀경 체험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회의주의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또한 마니교의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영적 실재에 대한 확신을 얻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밀라노에서 어거스틴은 여전히 방탕한 생활을 했다. 이 무렵이 그의 가장 암흑기였다. 그러던 중 함께 간 어머니의 기도로 인해 모종의 변화의 기회를 얻었는데 그것은 암브로시우스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인해 어거스틴은 차츰 기독교 설교자인 암브로시우스의 인격과 메시지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스스로 바울의 편지에 관해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게 되었으며 안토니우스의 전기를 읽기도 했다. 그런 중에 그는 점점 빛을 향하여 인도되었으며 마침내 근본적인 회심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회심에는 특히 빅토리누스(Victorinus)로부터의 영향이 컸다. 빅토리누스는 로마에 살고 있는 신플라톤 학파의 유명한 학자였는데 말년에 기독교를 믿고 신자가 된 인물이다. 그는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고 또한 바울의 사상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어거스틴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회심 후 그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밀라노 교외의 산장에서 토론과 명상을 하면서 《독어록(獨語錄)》 등 철학적 대화편을 저술했다.
그 무렵 어거스틴은 아프리카에서 여행하고 온 폰티티아누스(Pontitianus)라는 사람에게서 애굽의 수도원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자신의 초라하고 타락한 생활과 너무도 차이가 나는 새로운 삶이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로 갈등과 번민에 사로잡혀 정원 풀밭에 누워있었는데 그때 마침 담 너머에서 아이들의 민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내용은 "취하여, 읽으라(Tole, lege)"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아듣고 즉시 일어나 성경을 집어 읽었는데 그 부분은 로마서 13:13,14이었다. 곧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투쟁과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읽고 어거스틴은 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386년 늦은 여름에 맞은 이 체험으로 말미암아 어거스틴은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를 찾았고 죄악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느끼게 되었다.
다음해인 387년 그의 나이 34세 때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밀라노를 떠나 고향 아프리카의 타가스테로 돌아갔다. 가는 중에 그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거스틴은 고향에서 수도원을 세우고자 했다. 그 무렵 그는 아들을 잃고 실의에 잠겼으나 영적 소망으로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수도원 건립 계획의 추진을 위해 힙포에 갔는데(391년) 거기서 그는 반 강제로 안수를 받아 성직자가 되었으며 4년 뒤 발레리우스 감독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그곳 감독이 되었다.(395년)
그는 북아프리카에서는 처음으로 힙포에 수도원을 세웠고 거기서 많은 성직자와 수도사를 배출했다. 어거스틴은 그가 관할하는 교회들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했고 이웃에 대해 사랑의 손길을 많이 폈으며, 말씀 증거와 새 신자를 위한 교육에 힘을 썼다.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은 계속 글을 써서 당시 기독교회의 신앙적 문제를 정통적 입장에서 잘 변증하였다. 특히 기독교회의 이단 종파에 대한 그의 변증과 변호는 유명했다. 그는 게르만족인 반달족이 힙포를 포위했을 때인 430년 8월 28일에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거스틴은 다방면의 성격과 능력을 소유한 비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울과 같은 회심의 체험을 가지고 가장 바울을 잘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 번 매료되었던 플라톤 철학의 흐름과 마니교의 색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점도 있다. 그의 신학 사상은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빅토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서방 신학자들의 사상으로 영향을 받아서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동방의 신학자들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그는 라틴 신학을 집대성하고 장래에 일어날 여러 가지 사상의 근원을 마련하였다. 그의 사상은 포용하는 바가 크므로 자연히 모순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상은 한편으로는 대단히 개인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단체적이기도 했다.
민중들과의 접촉을 통한 어거스틴의 사색은 성경의 문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어 전달하려고 하는 '해석학적'인 방법을 취함으로써 더욱 깊어져 갔다. 그 동안 마니교도와의 논쟁, 타락한 성직자들을 인정하지 않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 인간의 자유 의지로 죄 없이 생활할 수 있다고 믿는 펠라기우스파와 같은 이단과 벌인 말년의 논쟁 및 로마 원로원의 이교주의(異敎主義)에 맞선 변증(辨證) 등을 계기로 그는 많은 신학적·철학적 작품을 발표하였다.
2.사상
1.신론
어거스틴의 신론의 주요 사상은 신을 '인격적 체험의 대상'으로 믿는 것이었다. 언제나 사람에게 참 만족을 줄 수 있고 선을 주실 수 있는 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을 철학적으로 생각할 때는 신플라톤학파의 용어를 사용했다. "신은 피조물과 구별되시는 순수, 절대자시요 모든 실존의 기반, 근원이다." 이런 관념에서 그는 삼위일체를 다룰 때도 신의 단일성을 강조했다. 그의 대작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은 이후 서방 사상을 결정적으로 지배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존하시며, 전지 전능하시고, 선하시고, 의롭고, 자비하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본질에 속해 계시며 창조주 하나님과 전능하신 삼위 일체는 구별될 수 없다." "삼신(三神)도 아니고 삼선(三善)도 아니고 오직 선하시고 전능하신 삼위일체가 구별될 수 없는 상태로 하나로 일하신다." 터툴리안이나 오리겐, 아타나시우스는 성자와 성령이 성부께 종속된다고 가르쳤으나 어거스틴은 신의 단일성을 강조하여 삼위의 완전 동등함을 가르쳤다. "삼위는 너무도 동등하사 신성에 있어서 성부는 성자보다 더 크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성부 성자의 합체도 성령보다 더 크지 않으시다." 그는 삼위(三位) 곧 위격(位格, person)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으므로 그 용어를 쓴다고 했다. 그는 "삼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인간의 용어는 너무 빈약하여 그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쓴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가지 비교법을 써서 삼위일체를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 예로 기억(memory), 이해(understanding), 의지(will)로 표현한 것이나 lover, loved, love 등으로 표현한 것이 있다.
2.그리스도론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두 성품을 똑 같이 강조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다. 온 세계보다 먼저 계신 하나님이시요 우리 세상의 사람이시다.....그러므로 그가 신(神)이신 점에서는 그와 아버지와 하나요 그가 사람이신 점에서는 그보다 아버지가 더 크시다.....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니 그를 통해서만 죄가 용서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그는 일관성 있는 분명한 설명 없이 단지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 드린 희생 제물이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고, 죄악의 세력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주기 위한 대속물이라고 했다.
3.은혜론
어거스틴에 의하면 사람은 선하고 바르게 창조되었고 자유 의지를 가졌으며 범죄치 않고 영생할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에 그 본성에 아무 충돌이 없고 행복하게 하나님과 교제하였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이런 상태에서 타락했는데 그 죄의 본질은 교만이고, 그 결과는 선(善)의 상실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박탈되고 그의 버림을 받은 영은 죽었다. 영의 지배에서 떠난 사람은 정욕(육신)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아담의 죄의 결과는 온 인류를 포괄했으며, 만일이 아담 안에서 죄인일 뿐 아니라 다 정욕에서 났기에 큰 죄인들이 되었다. 결국 온 인류는 갓난 아기마저도 멸망할 자식이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자식이 되었다. 이처럼 어거스틴은 죄의 원인이 의지에 있음을 말하였고 아담의 죄는 유전된다고 하여 죄의 유전설(traducianism)을 취하였다.
죄가 유전되고 의지는 죄 때문에 속박을 당하게 되었으니 인간은 자기의 의지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런 죄의 절망 상태에서 은총은 구주밖에는 없으며, 구주밖에는 인간을 구한 이도, 구하는 이도, 구할 이도 없다. 구원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구주의 선물이다. 그런데 이 은혜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만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형벌하시고 구원하실 자들을 '예정'하시는 것이다. 이 같은 그의 사상에서 예정론이 나타난다.
어거스틴의 은혜의 교리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자유 의지를 상실한 원죄의 인간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의해서만 속죄될 수 있으며, 인간의 행위와 공로는 무용지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며 구원받을 자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예정)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4.교회론
그는 교회를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분하였다. 전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곳이요, 후자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교회에서만 성령이 부어주시는 참 사랑을 찾을 수 있다고 하며 카톨릭 교회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교리와 조직면에는 정통이지만 배교자들을 용납하고 그들의 성례 집행을 허락한 카톨릭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고 부정한 도나투스파에 대해 '교회의 일치를 원치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회를 떠나서는 성령을 받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단들이 받는 것은 다 카톨릭 일치가 주는 특별 은사인 모든 죄를 가리우는 사랑이다' 라고 말했다. 또 성례는 하나님의 일이요 사람의 일이 아니므로 그 집행자에게 효력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타락한 사제로부터 받는 세례나 성찬이 유효함을 말했다. 이를 통해 그는 인격(영)과 분리된 의식(儀式)의 의미를 인정하였다. 즉 의식은 그 자체로서 효력이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는 "성례는 카톨릭 교회밖에서 받은 것도 유효하나 그 결실은 카톨릭 교회 안에서만 가능하니 이유는 거기서만 교회가 증거하는 사랑 곧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요소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5.성례론
어거스틴은 성례에 교회의 모든 거룩한 관습과 의식을 포함시켰다. 성례는 거룩한 것들이 의미하는 내용을 볼 수 있도록 나타내는 표시이다. 그래서 그는 마귀를 쫓아내는 축사(逐邪), 안수, 결혼, 세례후보자들에게 주는 소금까지 성례로 보았다. 그리고 세례와 성만찬은 특별 성례로 보았다. 그는 교회는 성례로 결속된다고 했다. "종교가 가짜건 진짜건 신자들을 맬 성례전이나 눈에 보이는 상징의 띠의 역할 없이는 종교 단체를 이룰 수 없다."고 했다. 더구나 성례는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 하여 "세례를 받지 않은 자나 성만찬에 참여치 못하는 자는 구원과 천국, 영생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6.인간론
젊은 시절 어거스틴은 《독어록(獨語錄)》에서 하나님과 영혼 외에는 어떠한 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그때 그의 사상은 이미 고대 철학의 우주론적 관심에서 벗어나 인간학적 지평을 열고 있었다. 우주 속의 미소한 존재인 인간이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과 그 은총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인간 존재의 의미라고 하는 사상이 그의 철학의 근저를 이룬다. 또한 그는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나누어진 존재가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하나로 된 통일체로 파악하였다.
어거스틴은 {利用}(uti)과 {누림}(frui)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데, 저서 {행복한 삶}에서 그는 '행복이란 오직 하나님을 누리는 데 있다'고 말했다. 《기독교 교의》제1권 첫머리에서 누림(frui)이란 '이용(uti)'과 관계 있다고 말했는데, 하나님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그 자체로서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 안에서 안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용한다'(우티)는 것은 事物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것을 위해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용이 아니라 누림의 유일한 대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행위나, 이용에 그쳐야 할 하나님 외의 모든 사물을 누리는 행위는 도착적(倒錯的) 사랑에 빠진 것과 같다고 했다. 이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서도 이 세상을 적극 이용하는 그의 사상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사상은 대체로 명료하지만 모순적인 부분도 많다. 그것은 그의 사상이 당시의 교회 전통에다 그의 종교적 신플라톤 철학을 혼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구원은 하나님이 그의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은혜로 베푸시는 것이라는 예정론을 가르치는 한편 성례전 특권을 가진,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진정한 경건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과 사랑의 인격적 관계를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율법적 수도원적 금욕주의도 적극 지지했다. 이런 점에서 중세기는 어거스틴을 넘지 못했다. 그의 학설의 모순들을 조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후대의 여러 가지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3.저술
어거스틴의 저서는 매우 방대하다. 철학적·신학적 저술 외에 일상의 목회 활동에 기초한 많은 설교집, 《시편 강해》, 《요한복음 강해》와 같은 성경 주해와 이단이나 이교도들과의 논쟁적 변증서 및 편지들도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자주 읽히고 있는 책은 다음과 같다.
①《독어록》(2권, 386∼387) : 초기의 대표적인 철학적 작품이다. "하나님과 나를 알고 싶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라는 대화로 시작된다. 이 책은 그가 진리의 근본이라고 믿던 '하나님과 영혼에 대해 탐구한 책이다.
②《그리스도교 교의》(4권, 396∼427) : 성경의 내용을 발견하는 방법(1-3권)과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4권)으로서의 해석학적 방법이 서술되어 있다.
③《Confession, 참회록》(13권, 397∼400) : 가장 유명한 책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고백한 글이다. 11-13권은 창세기 첫머리를 둘러싸고 미래의 삶을 논하였다.
④《삼위일체론》(15권, 400∼421) : 하나님의 삼위일체성(三位一體性)과 인간 영혼의 삼위일체성을 비교하였다. 1-7권은 삼위일체론의 전통적 교리를 그대로 설명하고 있고, 후반부인 8-15권은 믿음의 세계를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이미 주어진 삼위일체론을 더 깊이 이해하려고 하고 있다.
⑤《Civitas Dei, 하나님의 도성》(22권, 412∼426) : 이 책은 어거스틴의 일생 일대의 대작으로서 412년에 쓰기 시작하여 14년 후에 완성되었는데 410년 야만인들이 침공하여 로마를 약탈함으로써 기독교의 도성 로마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쓴 것이다. 어거스틴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고찰하면서 결국 지상 나라를 망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다스리심)는 영구불변하다는 것을 변증하고 있다. 10권까지는 이교도에 대한 반론, 22권까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 나라의 관계를 역사신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저술은 크게 다섯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성경 주석들이고, 둘째는 변증적 저술인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도성이다. 셋째는 마니교, 도나투스파, 펠라기우스파 등의 교리에 대해 반박하는 논쟁적 변증서들이며, 넷째는 금욕적인 생활에 관한 것으로서 주로 독백과 명상으로 이루어진 책들이다. 다섯째는 자서전적인 책인데 그의 참회록 및 만년의 생애를 기록한 회상록과 270통의 서신이 있다. 이러한 방대한 저술에 대해 샤프는 이렇게 말했다. "어거스틴은 그의 풍부한 사상을 다 기록해 놓았다. 그가 이처럼 많은 저술을 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지식에 있어서 그는 오리겐이나 유세비우스, 제롬 등에 비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지만 사상의 깊이와 풍성함에 있어서는 모든 헬라 및 라틴 교부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4.어거스틴의 잘못된 교회관
어거스틴은 서방 제국의 몰락을 보면서 자신의 유명한 책 {하나님의 도성}에서 "비록 지상 최대의 위대한 도시는 몰락될지라도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하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엇이 하나님의 도성인가에 대한 견해에서 그는 잘못된 가르침을 낳고 말았는데 그것은 눈에 보이는 카톨릭 교회를 그 신국(神國)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만 그리고 교회의 성례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구세주의 손에서 구원을 빼앗아 인간의 손에 맡긴다는 것, 구세주와 죄인 사이에 인간이 만든 체계를 끼워 넣는다는 것은 복음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친히 "내게 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사제나 교회도 그 사이에 끼어들 권한은 없다.
교회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어거스틴, 특히 교회가 하나로 일치되지 못하고 사소한 이유로도 분열되며 각색의 모양을 하고 있던 것에 대해 혐오하던 어거스틴은 거듭난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을 하나로 묶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실체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지나치게 교회의 외형적 일치를 중시한 나머지 교회의 영적 생명력과 교회의 궁극적인 일치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는 각 지역 교회들이 그리스도 및 성령님과의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 다른 교회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을 도외시하였다. 그는 교회가 성령 공동체임을 보지 못했다. 그 원인은 그가 교회도 세상 조직의 일부라고 보는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교회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며 또한 지나치게 눈에 보이는 일치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징벌이나 고통에 대한 두려움 飁문이 아니라 가르침에 의한 깨달음 때문에 이루어진다면 참으로 좋다. 그러나 가르침에 의해 더 좋은 사람이 만들어진다는 대의 명분 때문에 가르침을 거절하는 사람을 무시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베드로나 요한을 부르심같이 바울을 부르셔서 굴복시키기 위해 주님은 말씀(소리)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을 멀게 하시는 방법도 사용하셨다. 그러나 교회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기 위하여 강권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있다." 어거스틴의 이런 사상은 로마 교황으로 하여금 이교도였던 로마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행했던 것과 유사한 잔혹한 박해를 교회들에게 행하도록 부추기고 독려했다. 비록 단순하고 정열적이며 온건한 기질의 소유자였지만 성경의 원리에 철저하지 못한 것 때문에, 그는 비록 선한 의도에서였다 할지라도 광범위하고 잔인한 박해 조직에 연루되게 되었던 것이다.
12. 펠라기우스 논쟁.
1.배경
동방 교회가 기독론에 대해 논쟁을 하고 있을 때 서방 교회는 죄와 구원 문제에 대해 논쟁을 했다. 그것은 라틴인들의 특성이 이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보다 실제적인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헬라 교회는 主知的 성격을 띠었다. 종교는 하나님과 우주에 대해 옳은 지식을 가지고 이 지식 위에 세워지는 도덕이라고 보는 경향이 강했다. 인간의 현 상태에 관한 견해는 일반적으로 낙관적으로 기울었고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적극적인 반응에도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틴 교회는 인성(人性)에 대해 그처럼 낙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죄의 심각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죄의 유전(遺傳)을 가르친 이후 암브로시우스나 힐라리우스 같은 학자들은 원죄의 관념을 기초로 하여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에 의존한다고 주장할만큼 철저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것이 어거스틴 시대에 와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상이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이런 사상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더욱 분명하고 철저한 입장으로 확립되었다.
2.펠라기우스
펠라기우스는 영국인 수도사로서 5세기 초에 로마로 와서 도덕의 부패를 보고 이를 바로 잡기에 힘쓴 사람이다. 그는 성질이 온순하고 품행이 단정하고 지식이 많고 총명한 사람이어서 어거스틴조차 그의 인격을 인정했다. 그는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노력에 더 의존한다는 잘못된 주장을 했다. 그는 카르타고의 장로가 되려고 했으나 파울리누스의 반대로 되지 못하고 나중에 에베소의 장로가 되었는데 제자들에 의해 그의 학설이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431년 에베소에서 열렸던 세계 대회, 곧 네스토리우스 사상을 이단으로 정죄한 회의에서 펠라기우스의 사상 역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3.하나님의 은혜와 자유 의지에 관한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어거스틴은 생전에 펠라기우스(Pelagius)와 많은 논쟁을 벌였다. 평신도였던 그는 30세 경에 성경에 관한 잭을 저술하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펠라기우스는 일종의 개혁자였다. 신앙을 고백한 자들의 방탕하고 방종한 삶이 그로 하여금 인간의 책임과 자유 의지에 대해 강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진리의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졌다. 그는 인간의 책임에 대해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지나치게 축소하고 말았다. 펠라기우스가 이런 주장을 한 것은 그가 어거스틴과 같이 인간의 죄와 무능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거스틴과 같은 깊은 영적 체험을 갖지 못했으므로 이 문제를 단지 원리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의 구원은 인간 자신의 '선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적 노력'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거스틴은 인류의 시조 아담은 본래 죽지 않아도 되도록 지음 받았지만 범죄로 인해 죽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아담은 본래 죽을 인생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며 범죄 여부와 상관없이 죽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비록 아담이 범죄했지만 그 범죄는 아담 자신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며 인류 전체에는 무관하다고 말했으며, 아담의 죄는 죄의 성질 또는 도덕적 부패를 자손에게 유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손들이 죄의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오늘의 인류는 아담이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와 같은 상태에 있으며 다만 죄의 유혹하는 힘이 강해졌을 뿐'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원죄란 없고 모든 사람의 죄는 자신의 행위의 결과였다. 그래서 펠라기우스는 {선택의 힘}과 {실제적 선택}과 {선택한 바를 실제로 행하는 것} 이 세 가지 중에서 첫째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둘째와 셋째는 (일단은 첫째 것에 의해 성립되기는 하지만) 선택의 주체가 사람이며 실행하는 것고 사람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폈다.
또 어거스틴은 인간의 죄는 유전이 되므로 유아에게도 원죄가 있음을 주장했지만 펠라기우스는 어린 아이는 무죄의 상태서 태어난다고 말했다. 또 어거스틴은 인류의 죽음은 아담의 범죄와 죽음으로 인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온 인류가 살아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펠라기우스는 (인간에게 선을 택하여 실행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율법도 복음과 같이 인류를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주장했다. 또 펠라기우스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무죄한 자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유아 세례를 가르치긴 하였으나 카톨릭 교회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중생의 수단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어린 아이를 은총의 상태로, 하나님의 나라로, 구원과 생명, 죄 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그의 가르침은 카톨릭 교회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에 반대한 어거스틴은 회중들 앞에서 150년 전 키프리안이 쓴 글, 곧 '어린 아이들도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부분을 인용하여 펠라기우스에게 교회의 교리와 관례로부터 벗어난 잘못된 가르침을 삼가라고 경고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크게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널리 힘을 얻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회의가 소집되었다. 동방에서 온 사람들은 펠라기우스를 무죄라고 옹호하였고 서방에서 온 사람들은 그를 정죄하였다. 서방 교회의 이런 입장은 하나님의 의지를 인간의 의지보다 앞세우는 라틴 교회의 어거스틴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회의는 로마 교황 인노센트(Innocent)에게 판결을 의뢰하였고, 교황은 자신의 권위를 나타낼 기회를 가졌다. 교황은 펠라기우스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정죄하여 파문시켰다. 그러나 그의 후임자인 조시무스(Zozimus) 교황은 그들을 다시 복위시켰다. 이로 인해 서방 감독들이 다시 카르타고에서 모여 펠라기우스파를 파문시키고 재산을 압류시켰다. 이를 본 조시무스 교황은 자신이 불리해짐을 느끼고 자신의 견해를 바꾸어 펠라기우스를 정죄하였다.
펠라기우스의 가르침 속에는 진실하고 유익한 부분도 많으나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의 전체적인 방향은 성경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과 죄의 종된 상태를 스스로 알고 있으며 삶 자체가 그것을 확증해 주고 있다. 우리가 첫 사람 아담과 생명과 본성을 공유함으로서 그의 죄를 지고 그의 죽음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한 것이다. 우리 자신의 선택과 노력으로써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길을 찾을 수는 없으며, 오직 그 자신의 선택과 노력으로써 그런 길을 열어주신 둘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믿음으로써만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신학적 차이
아우구스티누스 / 펠라기우스
구원 : 하나님의 예정, 불가항력적 은총 / 인간의 의지적 노력으로.
죽음 : 아담이 범죄함으로 죽음 / 처음부터 죽게 정해진 것임
죄의 유전 :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영향 / 아담만, 인류에게 유전 안됨
원죄 : 유아에게도 원죄 있음 / 유아는 타락전 아담처럼 무죄
방법 : 그리스도만이 구원 / 율법도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
오직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야 함 /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도 무죄한 자가 있었음
4.반(半) 펠라기우스 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속에서 새로운 조화를 위해 반(半)펠라기우스설이 나왔다. 이 설은 마르세이유에 수도원을 세운 캇시아누스와 레이의 감독 파우스투스 등이 주장했다. 반펠라기우스설은 펠라기우스설처럼 인류의 죄악을 가볍게 보지는 않는다. 아담의 죄의 결과로 인류는 죄인이 되었고 죄로 인해 의지가 속박 당하고 자신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 있어서는 어거스틴의 주장과 같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어 각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 이것을 받든지 거절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알미니안의 주장과 비슷함) 어거스틴의 주장과 차이가난다.
13.니케아 시대의 생활상
이 시대에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는 크고 웅장한 교회당 건물이 건축되었다는 것이다. 박해 시대에는 집회소로 모일 건물조차 제대로 가지지 못하던 교회들이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처럼 보호받게 되자 이제는 크고 화려한 건물들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교의 사당을 개조하거나 일부를 수용하여 사용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건축은 바실리카 양식이 가장 많았다. 바실리카 양식이란 넓은 홀이 주랑(柱廊)으로 둘러싸여 있는 양식이다. 그밖에 원형, 혹은 다각형의 건축물들도 있었다. 이런 양식들은 세례당 혹은 순교자의 기념당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동방에서는 보통의 집회를 위해서도 이를 사용하였다. 동방에서 행해진 건축 양식은 비잔티움 양식이었다. 이 양식은 하나님의 중심이 있고 길이가 같은 네이브(nave)가 그 중심을 교차하여 십자형을 이루고 그 위에 둥근 지붕이 있어서 하늘을 상징하는 양식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교회당이 이를 대표한다.
굴 무덤의 벽 또는 석관의 외부에 조각을 하는 풍습은 이 시대에 널리 행해졌다. 그러나 이는 상징적인 성질을 띠었지 조각품을 경배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 기술은 5세기 중엽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림은 점점 더 많이 사용되었다. 순교자를 위해 세운 회당에 순교의 시종을 그리거나 성경의 사실을 그리는 일은 이전부터 있던 풍습이었으나 그리스도를 직접 그리는 것은 피하였다. 그러나 키릴로스가 네스토리우스파와 싸워서 승리한 후 예배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화상을 사용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오랜 초상은 440년 경의 것으로서 예배를 위해 그린 것이다. 그 후 6세기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의 초상을 회당 안에 걸뿐 아니라 집집마다 보관하여 모시게 되었다.
성자들을 숭배하는 풍습은 순교자를 숭배하는 풍습에서 시작되었다. 순교자의 무덤 앞에서 예배를 보는 풍습은 나중에 그곳에 회당을 세우는 풍습이 되었고 회당을 세울 때 순교자의 유골을 옮겨서 제단 밑에 간직하는 풍습이 행해졌다. 기도할 때 죽은 순교자들이나 사도 혹은 선지자들을 불러서 도움을 구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한 것은 그것이 기도의 응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갑바도기아의 세 신학자는 성자들을 찬미하며 그들이 인류를 수호하며 성도들의 기도를 듣는 자라고 했으며 암브로시우스나 제롬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순교자를 존중하는 풍습은 나중에 그의 유물과 유골까지 숭상하는 풍습으로 확대되었다. 그것은 그런 물건들에 병을 고치는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성자들의 유물이나 유골이 고가로 매매되기도 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숭배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났다. 바실리우스는 마리아에 대해 그녀는 예수를 낳은 후 다른 자녀도 낳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에피파니우스에 이르러서는 그런 생각을 정죄하고 이단시하여 영구처녀설을 확립하였다. 당시에도 마리아를 성부 성자와 성령을 경배하는 것처럼 직접 경배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원칙이 있었으나 마리아 숭배는 점점 보편적이 되어갔다. 직접 경배는 않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마리아를 불러서 도움을 받는 것은 아무 제한을 받지 않고 시행되었으며 마침내 마리아는 인류의 구원에 참여하여 역사하는 힘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암브로시우스와 같은 사람은 창세기 3:15를 마리아 숭배의 근거로 제시하였으며 에베소 대회때에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불러도 좋다고 결의했다.
그러나 천사를 숭배하는 것은 신약 성경에 이것을 직접 금하는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에 주저하였으나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면서도 행하였다. 이것은 점점 습관이 되어 성자들의 이름과 함께 이것을 섬기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경계하였으나 암브로시우스는 이것을 피하지 않았다.
이 시대의 집회(예배)는 사도 시대의 형태와 많이 달라졌다. 이미 속사도 시대에도 그러한 경향이 있었지만 이 시대에 들어와서는 모임은 말씀(설교) 중심이 아니라 거의 의식(儀式) 중심이 되었다. 설교는 서방보다 동방에서 더 왕성하였다. 서방은 일반적으로 설교보다 의식을 중시했다. 그러나 동방은 원래 수사(修辭)와 문장(文章)이 발달한 지역이었으므로 강론이 흥왕했으며 대 설교자들도 많이 나왔다.
부활절 풍습은 전 시대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 시대에 들어서 나타난 변화는 성탄절을 축하하는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성탄절 기원은 로마 감독 리베리우스 당시(354년)에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정하고 축하한 것이다. 그후 379년에 이르러서는 동방의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축하되었고 이집트와 팔레스틴에도 전해졌다. 본래 성탄절 풍습은 로마의 이교 풍습에서 비롯되었다. 로마에서는 12월 말에 세 가지 축제가 행해졌다. 첫째는 사투르나리아(Saturnalia, 17-24일)인데 이것은 사투룬 신이 지배한 황금 시대를 기념하는 제사로서 이 절기에는 모든 민중들이 환락에 함께 빠졌다. 둘째는 시길라리아(Sigillalia)인데 12월 하순에 거행된다. 이때는 어린 아이에게 인형을 선사하며 아이들로 하여금 즐기게 한다. 셋째는 브루마리아(brumaria)인데 이것은 동지(冬至) 제사이다. 이는 태양 빛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축하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축제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모여서 다른 의미의 축하 행사를 가질 필요를 느꼈다. 이에 그리스도는 참 태양이니 이 무렵(동지)을 구주 탄생의 날로 축하하자는 아이디어가 실현되어, 성탄절이 이 로마 축제 기간 중에 잡힌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에는 성경의 번역과 위경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50부의 신약 성경을 양피지에 복사하여 주요 교회에 기증했다. 여기에 포함된 성경들은 그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던 성경들(베드로서, 계시록 등)일지라도 정경으로 확증되는 효과를 얻었다. 365년에 아타나시우스는 구약 22권과 오늘날 인정된 신약 27권을 열거하면서 여기에 더 보태거나 빼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363년 라오디게아에서 열렸던 지방 대회에서 제정한 규칙에는 신구약 66권 중 계시록만 빼고 나머지를 다 포함시켰다. 그러나 393년 힙포와 397년 카르타고에서 열렸던 지방 대회에서는 신약 성경은 지금의 것과 같이 정했고 구약은 정경 외에 외경(Apocrypha)이 추가되었다. 제롬의 라틴역 성경의 목차는 지금 성경과 같다. 외경은 제외되어 있었으나 나중에 추가되었다. 이처럼 신구약 성경은 대략 이 시대에 완전히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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