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는 일반적으로 그레고리우스 7세가 등장한 1073년경부터 보니파키우스 8세가 죽은 1303년까지의 기간에 해당하는데 로마교회가 최고의 영화와 번영을 누리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사상면에서나 제도면에서 교회지상주의가 구가되었고 십자군 전쟁 등으로 유럽 역사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1.서임권 논쟁
(그레고리 7세의 교황권 회복 투쟁)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세기의 교회정치가 퇴폐 일로를 걷고 있을 때 등장하여 교황권과 로마교회를 개혁한 인물이다. 그는 중세 교황 중에서는 가장 탁월한 인물이었다. 당시 교회 상황을 보면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매우 복잡하고 암담했던 상황이었다. 외부 사정을 볼 것 같으면, 독일 황제는 권력을 이용하여 로마 교회의 내정을 간섭하였으며, 교황 및 감독의 임명을 좌우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국내 정세는 카를 대제의 사후 국왕의 권력이 약화되어서 사실상 대제후(영주)들이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교회는 영주의 손에서 그 흥망이 결정되었다.
또한 교회의 내부 사정을 볼 것 같으면, 교회는 부패하여 탐욕과 모략과 음모가 끊이지 않았고 폭력과 암살이 난무했다. 축첩 시대에 잇달아 일어난 교황 폐위 사건 등으로 인해 11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교황청의 권위가 완전히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1044년에서 1046년 간에는 대단히 보잘것없는 세 사람의 교황 베네딕트 9세, 실베스터 3세, 그레고리우스 6세가 동시에 교황이 되어 서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교회의 부흥과 교황권의 회복을 위한 개혁파가 일어났는데 그 대표자가 나중에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이 된 힐데브란트(1015-1085)였다. 그의 등장을 기준으로 로마교회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로 그는 로마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획기적으로 올려놓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세 명의 교황이 서로 다투다가 황제의 간섭으로 세 사람 모두 교황직에서 쫓겨났을 때 힐데브란트는 그 중 한 명인 그레고리우스 6세를 따라서 독일로 추방되었다. 그레고리우스 6세가 죽자 그의 백부가 원장으로 있었던 클뤼니 수도원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각지를 순회하며 교황권 확립을 위해 힘썼는데, 투르의 감독 부르노가 황제 하인리히의 간청으로 교황직에 오르려고 로마로 가게 되자 그도 함께 가게 되었다. 로마인들의 환영 속에서 부르노가 로마에서 교황직에 오르자 헬데브란트는 교황청 부집사가 되었다. 그 자리는 외형적으로는 크게 유력한 자리는 아니었으나 힐데브란트는 그의 인격과 수완으로 교황과 다름없는 실질적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1054년 교황 레오가 죽은 후 몇대의 교황을 모두 그가 선정하다가 드디어 1073년에 힐데브란트는 자신이 직접 교황이 되어 그레고리우스 7세라 칭하였다.
교황에 취임하자 힐데브란트는 교회의 지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혁명적 조치를 취하였다. 그는 교황인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리고 베드로의 대표로서 제국과 왕국, 공국(公國), 후작령, 심지어 모든 사람의 소유까지도 다 취할 수 있으며 다시 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땅에 사는 사람이면 황제로부터 비천한 농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권위에 순종하도록 만들려고 하였다.
또한 모든 성직자로 하여금 독신 생활을 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성직자들이 누리던 모든 세습적 특권을 빼앗고 오직 모든 것을 교황에게 의지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 횡행하고 있던 성직 매매를 엄금하였다. 당시 파렴치한 고위 성직자들은 영적 자격 유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최고 입찰자에게 성직을 팔아버리는 일을 빈번히 행하였다.
그러나 힐데브란트의 최대 싸움은 평신도의 성직자 임명권(Lay Investitue)을 둘러싼 것이었다. 봉건법에 따르면 봉신(封臣, 騎士)은 토지를 소유하는 대가로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법률적 권리를 인정받는 의식을 행했는데 이것을 서임식(敍任式)이라 하였다. 이런 원칙은 성직자에게도 적용되어 고위 성직자가 땅이나 영토를 취득할 때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서임식의 절차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힐데브란트는 클뤼니 수도원의 원칙에 따라 교회 일에 대해 세속 권력이 간섭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여, 성직자는 세속 통치자의 재가 없이(즉 서임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취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성직자를 임명하거나 교회에 속하는 토지나 재산을 감독하는 권한을 국왕이나 제후에게서 빼앗아 교황의 권한 아래에 둔 것이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는 교황은 국왕을 지배할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태양과 달이라는 두 빛을 세우신 것처럼 땅에도 교황과 국왕이라는 두 권세를 세우셨는데 그 중 교황은 태양과 같고 황제는 달과 같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그는 당시 독일 황제(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독일 왕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황권 확장 정책을 크게 반대했다. 만일 그레고리우스의 뜻대로 모든 교회 재산 감독권이 교황에게로 넘어가게 되면 당시 독일 제국 토지의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던 교회 감독들과 신부들의 땅은 교황 수중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이는 곧 황제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하며 독일 제국의 주권은 크게 침해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는 교황의 반대파와 결탁하여 보름스 종교 회의(1076년)에서 교황의 폐위를 결정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 역시 그해 6월에 회의를 소집하여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폐위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파문을 당한 황제를 돕는 자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이렇게 되자 영원한 형벌을 두려워한 민중들이 아무도 황제를 섬기려 하지 않았으며 음식이나 피난처조차 제공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어려움과 아울러 제후들의 권고 등으로 인해 하인리히 4세는 결국 굴욕을 참고 일년 이내에 교황과 화해하기 위해 그해 겨울 부하들을 거느리고 알프스를 넘어 교황이 머무르고 있는 카놋사로 찾아갔다. 황제는 맨발과 참회자의 초라한 복장을 하고 눈덮힌 궁전 뜰에 3일을 서 있어야 했다. 4일째 되는 날에 비로소 교황은 그를 받아주었다. 황제는 교황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며 자비를 구하여 사면을 받았다. 이것이 소위 {카놋사의 굴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카놋사의 굴욕은 표면상으로는 교황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하인리히 황제의 정치적 승리였다. 황제는 독일의 정적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교황이 주재할 아우스부르그 회의를 못하도록 막아버렸고 교황의 다른 계획도 좌절시켰다. 그러나 이 카놋사 사건은 독일 제국이 교회의 권위 앞에 심한 굴욕을 받았다는 인상을 남겨주게 되었다. 교회의 출교 해제가 있자 황제의 정적들은 1077년 3월에 루돌프 공을 세워 내란을 일으켰으나 하인리히 4세는 루돌프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황제에게 반대했던 제후들에게 보복을 가했다. 그러자 교황은 1080년 3월에 로마 회의에서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에 처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독일 국민의 동정이 국왕에게로 쏠려 파문이 효과를 내지 못했고 황제는 이 기회를 타서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하고 클레멘트 3세를 교황에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아예 교황을 죽일 생각으로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3년이나 걸려서 로마를 점령했고 1085년 5월 남부 이탈리아 살레르노의 한 산성에 숨어 있던 교황을 찾아내어 살해하였다.
2.교회와 국가의 관계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교회사 초기부터 늘 논쟁과 다툼의 관계였다. 교회와 국가의 세력과 권위는 항상 균형을 유지한 것은 아니고 그 지도자의 인품과 능력에 따라 때로는 국가쪽으로 때로는 교회쪽으로 기울었다. 이처럼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소위 세속적 권위라고 일컬어진 정치적 권위와 교회가 지닌 종교적 권위간의 다툼으로 결정되었다. 중세기에 있어서 지도권과 지상권(至上權)을 가지고 싸우던 이 두 개의 세력은 각각 신성 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교회라는 두 실체로 드러났다. 중세의 역사 대부분은 실제로 이 두 세력이 서로 권세를 잡으려고 다투고 싸운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논쟁과 충돌은 대체로 교황과 황제 두 사람 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때로는 외부적 상황에 의해서 때로는 지도자의 민첩한 행동에 의해 그 패권이 결정되었다.
1.칼릭스티우스와 하인리히 5세의 협약 체결
감독의 임명권에 관한 문제는 하인리히 4세 재위 기간에 교황 자리에 있던 빅토르 3세와 우르반 2세, 파스카리우스 2세를 거치기까지 해결을 보지 못한 채로 있다가 하인리히 5세가 황제 자리에 오르고 칼릭스티우스가 교황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해결이 되었다.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는 등 두 사람은 항상 다투었는데 양편 모두 싸움에 지쳐서 타협의 기회가 오자 1122년 보름스 협약을 맺고 타협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감독으로서 영지를 받게 될 때는 황제가 영주의 자격으로 홀을 주어서 이를 임명하고 감독의 자격으로는 교황이 반지를 주어서 임명하도록 하였다. 전에는 황제가 반지를 주어서 마음대로 감독을 임명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 권한이 교회로 옮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② 그러나 감독을 선택하여 임명할 때는 황제 또는 그 대리자가 임석해야 하며 임직식을 거행할 때는 황제가 앞서고 교황이 그 뒤를 따르는 순서로 되었다. 그러므로 인물 선택의 권한은 교회에 있더라도 황제가 제후의 권세로 그의 임직을 거부할 때는 감독으로 세워질 수 없었고 영토도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황제의 권한이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2.알렉산더 3세와 프리드리히 1세의 관계
알렉산더 3세(1159-1181년)는 탁월한 교황이었고 그 시대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도 중세 독일 제국의 영광이 가장 찬란했던 시대의 뛰어난 황제였다. 프리드리히는 왕권의 근거를 분명히 해두기 위해 볼로냐 대학 교수 4명에게 부탁하여 그 근거를 조사케 했는데 그 결과 원래 왕권은 현재 영위되고 있는 것보다 훨씬 광대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황제는 국왕의 권위를 다시 떨치기 위해 옛날의 로마법을 들고 나와 교황과 싸우게 되었고 교황은 카논법을 방패로 하여 황제와 맞서 싸웠다. 이로 인해 독일은 교황과 교황을 지원하는 여러 이탈리아의 도시 동맹과 전쟁을 치렀으나 끝내 로마를 정복하지 못하고 결국 1177년 교황과 강화 조약을 맺게 되었다.
3.켄터베리 대주교와 헨리 2세의 관계
영국에서는 왕인 헨리 2세(1154-1189년)와 켄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킷 사이에 유명한 싸움이 있었다. 헨리는 왕권을 강화하고 통일을 도모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토마스 대주교는 그를 반대하여 싸웠다. 이 때문에 헨리는 1164년에 클래런던에서 감독과 귀족을 소집하고 회의를 열어 {클래런던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의 내용은 성직자와 관련된 종교 사건도 국가재판소가 관할하며, 성직자는 국왕의 허락 없이 해외 출입을 못한다. 대감독과 감독사원장 선거는 국왕의 명에 따라 시행하며 국왕 회당에서 행할 것, 상고(上告)는 국왕에게 하며 국왕에게 충성을 다할 것 등이었는데 이 법의 취지는 감독과 그밖의 성직을 국가의 주권 밑에 두고 교황의 권위에서 오는 압박을 막자는데 있었다. 그러나 켄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킷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5년 후 그는 왕과 화해하여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결국 1170년 12월에 피살당했다. 그런 후 1172년에는 클래런던법이 폐지되었다.
4.인노센트 3세와 국가의 관계
알렉산더 3세가 죽은 후 로마교회의 세력과 명예는 일시 쇠퇴하였으나 인노센트 3세가 교화의 위(1198-1216)에 오르자 다시 권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교황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의 통치권은 세계를 포괄하는 것이며 왕중왕이므로 군왕의 심판자가 된다. 교황은 태양이고 제국은 그 빛을 받아서 빛나는 달과 같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는 자기 사상을 실천에 옮기려고 애를 썼으며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우선 그는 프랑스 왕 필립 2세가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를 취한 일을 승인하지 않고 다시 본처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영국 왕 존이 교황의 명에 따라 켄터베리 대감독으로 취임한 스티븐 랭톤을 승인하지 않자 인노센트 3세는 영국 왕을 파문에 처하고 그의 영토를 몰수하여 프랑스 왕에 준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영국 왕은 굴복하고 사죄했다. 인노센트 3세는 남프랑스의 이단파로 알려진 알비파를 박멸하기 위해 제4차 십자군(1202-1204)을 일으켰으며, 역사상 큰 오점을 남긴 악명 높은 종교재판제도가 그의 시대에 시작되었고 고해성사제도 또한 그의 시대에 시작되었다.
5.보니파키우스 8세와 필립 4세의 관계
프리드리히 2세 이후 독일 제국은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하였고 로마 교황의 전성시대도 역시 지나갔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높은 이상을 지녔으나 이전의 교황들의 힘에 못 미치었다. 그리하여 그는 프랑스 왕 필립 4세와 권력 다툼이 벌어졌을 그 싸움에서 패하고 말았다. 필립 4세는 교황이 1296년에 선포한 법령 즉 국왕 제후는 교황의 허가없이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령에 반대하고 또한 왕의 비준 없이 금은을 국외로 반출함을 금지하였다. 이에 교황은 프랑스 왕을 파문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낙심 끝에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교황청의 권위가 크게 실추해 있음을 보여주었다. 교황의 교만과 권력 추구는 교황청이 가지고 있어야 할 영적 권위를 추락시켰으며 거기에 더하여 여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던 민족주의 사상은 교황의 국제적 지배권 행사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3.십자군 운동
1.십자군 운동이 일어나게 된 근본 동기
중세 기독교의 십자군 운동은 매우 특이한 사건으로서 신앙적 정치적 경제적 원인이 복합되어 일어난 것이다.
우선 신앙적 원인을 살펴보면, 이전부터 기독교 신자들은 신앙적 돌파구를 찾고자 할 때 그 한 수단으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등의 성지를 순례하였는데 638년 예루살렘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점령된 후로는 그 순례를 자유롭게 할 수 없었고 1071년 터키군이 소아시아의 대부분과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부터는 아예 성지 순례가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불만이 고조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정치적 원인을 살펴보면, 이전에 동방에서 이슬람교도에게 패했던 기독교인들은 그 무렵 이슬람교도들과 싸워서 이기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1060-1090년 간에 남부 이탈리아이 노르만족은 시실리아를 빼앗았고 페르디난드 1세는 이슬람교도들에게서 스페인을 되찾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서유럽 국가들의 국민들 간에는 이슬람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으며 그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험심과 약탈 욕망, 영토 확장욕 등의 세속적 충동과 합쳐져서 십자군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경제적 원인을 살펴보면, 11세기 유럽의 곤고한 상황을 주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970-1040년 간의 48년이 흉년이었고 1085-1095년 간에는 사정이 더 악화되어 사회적으로 불안과 참상이 널리 퍼졌다. 이런 상태를 벗어나 보려는 욕망이 민중들 가운데서 팽창하게 되었으며 또한 그러한 경제적 곤란은 종교적 열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수도 생활과 금욕 생활을 추구하였고 현세보다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간절히 가지게 되었으며 그 종교적 열정으로 교황청을 개혁하고 성직 매매와 성직자의 결혼 등과 같은 타락을 제거하고 교회와 국가 간의 권력 싸움에는 교회 쪽에 힘을 불어넣는 작용을 하였으며 더 나아가 십자군 운동과 같은 명분 있는 신앙적 투쟁에 기꺼이 몸을 바칠 수 있도록 만들었다.
2.십자군 운동의 직접적 발생 동기
동로마 황제 미카엘 7세(1067-1078)는 셀주크 투르크족의 소아시아 점령을 두려워하여 로마의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당시 로마 교황권 확장에 열중이었던 그레고리우스는 이것이 동방교회(헬라 정교회)가 서방교회(카톨릭)와 연합하려는 시도인 줄 알고 1074년에 하인리히 4세에게 파병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서로의 임직식 관계로 좌절되었고 나중에 교황 우르반 2세가 시행했다. 그는 동방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터키 군대의 위협을 감당할 능력이 없음을 자인하고 원조를 요청했을 때 원조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1095년 3월 북부 이탈리아의 피아쎈짜에서 회의를 소집했고 그해 11월에 클레르몽에서 다시 회의를 열어 십자군 원정을 호소했다. 이에 신자들은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참여키로 했고 교황은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자의 모든 죄를 사면해 준다고 선언했다.
3.십자군 운동의 진행
제1차 원정 때는 어느 나라도 왕은 직접 가지 않았다. 은둔자 베드로가 인솔한 오합지졸이 먼저 출발하고 브와롱의 고드프리, 뚤루즈의 레이몽 백작, 노르만디의 로베르, 벨망드와의 위고 같은 지도자들이 30만의 십자군을 이끌고 큰스탄티노플을 거쳐서 1097년 6월에 니케아를 함락시켰고 에뎃사와 안디옥을 점령했다. 그리고 1099년 6월에는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격전 끝에 7월 15일 드디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8월 12일에는 이집트의 이슬람교 원정군을 격퇴시키고 성지 회복에 성공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장기적 방어를 위해 일종의 신정 국가 형태의 예루살렘 왕국을 수립하고 보와롱의 고드프리(Godefroy of Bouilon)를 성묘보호자(聖廟保護者;Protector of the Holy Sepulachre)라는 이름의 왕좌에 앉혔다. 고드프리는 1100년 7월에 죽고 그의 동생 볼드윈이 예루살렘 라틴 왕국의 공식적 첫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1146년 에뎃사가 이슬람군에 의해 함락되었으므로 예루살렘 왕국은 매우 위험하게 되었다.
제2차 십자군은 당시 명성 높던 베르나드(St. Bernard)가 모집하고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드 3세의 협조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1147년 원정을 떠났으나 전과 같은 열정이 없는 대부분의 군인들은 소아시아에서 죽고 소수의 남은 십자군은 1148년 다메섹을 공격했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그들은 이 참패가 동로마제국의 제후들 탓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동방에 대한 서방의 감정만 악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왕국은 약 40년간 명맥만이라도 유지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슬람교도들 간의 내분 때문이었다. 그러나 1171년 아시아 남서부의 쿠르드 출신 이슬람 장군인 살라딘이 일어나서 1174년 다메섹을 점령하고 1183년에는 그의 영토가 예루살렘 라틴 왕국의 동쪽과 북쪽, 남쪽을 두르게 되었다. 그리고는 1187년 7월 드디어 하틴에서 라틴 군대를 격파하고 예루살렘과 성지 대부분을 점령하고 말았다. 이 재난의 흉보를 들은 유럽인들은 민심이 크게 흥분되어 제3차 십자군을 일으키게 되었다.
제3차 십자군은 1189년에 조성되었다. 3차 십자군은 이전의 어느 십자군보다 많은 준비를 하였다. 당시 용맹한 군인 출신의 독일 황제 프레드리히 1세(1152-1190 재위)와 프랑스 왕 필립(1179-1223), 그리고 영국 왕 리차드(1189-1199)가 대군을 거느리고 성지를 향해 떠났는데 독일 황제는 소아시아까지 가서 이코니엄 강에서 목욕을 하다가 익사를 하고 말았다. 가장 용맹한 지휘관을 잃은 군대는 사기가 떨어졌고 기타의 문제들로 인해 군대는 예루살렘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프랑스와 영국 왕은 서로 점령지에 대한 분쟁 문제로 싸웠고 그러던 중 프랑스 왕은 본국에서 자기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도중에 돌아가 버렸다. 그런 가운데서 영국 왕은 살라딘과 싸우다가 3년간 휴전 협정을 맺었고 살라딘으로부터 성지 순례자는 괴롭히지 않는다는 약조를 받아내고는 전쟁을 끝내고 말았다.
제4차 십자군은 1202년에 있었는데 그 병력의 숫자는 보잘것없었지만 그 정치적 종교적 결과는 중요하였다. 이 십자군은 인노센트 3세가 주장하여 프랑스 북부 샴페인, 블로와, 프랑드르 지방에서 모집되었는데 그들은 예루살렘 점령의 첩경은 이집트 정복이라고 확신하고 베니스 상인들과 그곳으로의 군대 수송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 운임을 조달할 길이 없어서 교활한 베니스 상인들의 제안대로 도중에서 헝가리로부터 짜라라는 도시를 빼앗아 베니스인들에게 주게 되었다. 그 후에도 십자군은 동방 제국의 왕위 찬탈에 개입하여 알렉시우스 3세를 폐위시키는 등 성지 회복이라는 본연의 목적과 거리가 먼 정치적 술책에 휘말리게 되었다.
제4차 십자군은 엉뚱하게도 동방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교회의 보물을 탈취하여 서방으로 가져왔으며 거기에 라틴제국을 세워 볼드윈을 왕으로 삼았고 큰스탄티노플 대주교를 로마 교회 계통으로 세워서 로마 교회에 예속시켰다. 이로 인해 동서방제국과 교회간에는 증오감만 쌓이게 되었다.
제5차 십자군 운동은 소위 [소년 십자군]으로서 매우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목동 스테반과 독일 소년 니콜라스가 수만명의 소년들을 모아 출전했으나 이슬람군대에 의해 크게 참패하고 이탈리아로 흩어졌으며 많은 숫자가 기아로 죽거나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다.
제6차 십자군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 때 독일 황제 프레드리히 2세가 인솔하여 원정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원정을 계속 미루다가 마지못해 잠시 떠났다가 금방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이에 교황은 황제를 파문했으나 그는 1228년 다시 출전하였고 이슬람군대와는 싸우지 않고 이집트의 술탄과의 협상을 통해 향후 10년간 휴전한다는 약속을 받았고 예루살렘과 나사렛, 베들레헴을 얻고 1229년 귀환했다.
그러나 잠시 기독교도 손에 들어왔던 예루살렘은 1244년 다시 이슬람교도 손으로 돌아갔고 이 때문에 프랑스왕 루이 9세는 제7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군사들 대부분은 살해되고 루이 자신은 많은 속전을 내고 살아 돌아오는 신세가 되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온 루이는 1270년 다시 군대를 이끌고 튜니스로 향했으나 그곳에서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와 동시에 영국의 에드워드 1세(1272-1307년 재위)가 아직 황태자 시절인 1271-1272년 사이에 원정을 하여 아크레(Acre)로 진군하고 나사렛을 점령하였다. 그는 협상으로 약 10년간의 휴전을 얻어내고 돌아왔다. 그후 십자군 운동은 없어지고 결국 기독교는 성지를 회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1291년 예루살렘은 완전히 이슬람교도들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그후에도 십자군 운동에 대한 약간의 거론이 있었으나 십자군 운동은 완전히 포기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교황을 제외한) 모든 유럽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수한 열정으로 이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불순하고 복합적인 이유로 이 운동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이 운동은 그럴듯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갖은 부도덕과 약탈과 살육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 운동은 분명한 성령의 인도를 따른 것이 아닌 것으로 증명되고 말았다. 이 일은 영적 일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일이었으며 종교적 일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4.십자군 운동이 실패한 원인들
첫째,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일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일어난 순리적이고 영적인 일이 아니라 당시 유럽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세속적 요인들로 말미암아 일어난 정치적 사회적 운동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실패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교황에서 군사통솔권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 일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주도한 일이었는데 그 책임자인 교황에게 군대와 군사권과 지략과 같은 전쟁 수행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병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도 없었고 이해가 상반된 각 나라의 군대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할 수도 없었다.
셋째, 출전한 귀족들과 기사들 간에 전쟁 참여 목적이 다르고 이해 관계가 상반되었기 때문에 온전한 원정이 될 수 없었다.
넷째, 복음을 위한 헌신적 정신으로 성지 회복을 주장했던 초기의 종교적 열정은 곧 식어버리고 계속적인 내분과 재물을 약탈하고자 하는 불순한 동기, 거칠고 저속한 군대의 행동들로 인해 군대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다섯째, 소년들로 구성된 5차 십자군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십자군 병력이 마음만 있을 뿐 훈련은 거의 되지 않은 오합지졸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잘 훈련된 기병과 지리에 익숙한 원주민들로 구성된 이슬람 군대를 근본적으로 상대할 수 없었다.
5.십자군 운동이 남긴 것
십자군 운동은 처음 목표와 관련하여서는 실패한 운동에 지나지 않았으나 중세 유럽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첫째, 이 운동은 유럽 각 국민의 단결을 촉진시켰고 기독교회가 하나의 목적 아래 단합과 통일이 되는 기회를 가지게 만들었다.
둘째, 십자군 운동은 적어도 이슬람교가 더 이상 서방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셋째, 이 전쟁으로 인해 많은 귀족들이 죽거나 재산을 잃음으로써 봉건제도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대신 중산 사회가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재정적 정신적 인적 손실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었다.
넷째, 대규모의 군대와 물자를 장기간에 걸쳐 수송하는 가운데서 해운의 발달이 촉진되고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지중해 연안 도시가 번영하게 되었다.
다섯째, 서방 출신 십자군이 동방으로 왕래하는 가운데서 유럽 사회가 동방 문화에 깊이 접촉하게 되었고 서방 세계의 정신적 지적 시야가 크게 넓어지게 되었다.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야만인들이 동방의 고대 문화와 훌륭한 도시들을 보고 크게 각성함으로써 서구의 정신 문화와 물질 문화의 발전 계기가 마련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전후하여 중세기 신학의 최고봉인 스콜라신학이 나오게 되었다.
여섯째, 십자군 운동의 결과 로마 교회의 수입이 증가하게 되었다. 그것은 상공업이 발달하게 됨으로써 도시 상인 계급들이 점점 부유하게 되어 교회를 위해 많은 헌금과 그릇, 책, 비단, 금은을 기증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십자군 원정 때 교회가 면죄부를 많이 팔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교회는 부해졌고 교황권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세속권을 많이 흡수하여 이전보다 많이 강화되었다.
일곱째, 십자군운동은 후대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에 의하지 않고 인간의 정치적 세속적 필요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한 종교적 명분으로 포장되어 있고 부수적 유익을 준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은 가져오지 못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십자군 운동은 이교도로부터 하나님의 세계를 지켜 보호하자는 기치 아래 일어났으나 실제로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지나 확장에는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신자들의 영적 각성과 진보에도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사탄이 요소 요소에 개입하여 살육과 협잡과 혼란을 일으키도록 만든 점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4.스콜라 철학
중세 신학은 흔히 스콜라 신학이라고 부른다. 중세의 철학은 곧 신학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스콜라 철학이라고도 불린다. 중세에 있어서 철학의 본분은 이미 정해진 교회의 교의(dogma)를 철학적 방식으로 설명하고 변증하고 조직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스콜라(Scholar)라는 말은 샤를마뉴 황제 시절의 궁정 학교를 가리키던 이름인데 변증학적 방법을 적용하여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학교와 강단을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을 스콜라주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스콜라 신학 또는 스콜라 철학은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과 신앙 체계를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스콜라 철학의 전개 시기
스콜라 신학의 역사는 세 단계로 구분되는데 제1기는 발생기로서 9-12세기의 기간이고 제2기는 전성기로서 13세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제3기는 쇠퇴기로서 14-15세기의 기간이다.
① 초기(발생기)
샤를마뉴 대제 시대(9세기)에서 12세기까지이며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을 도입하고 거짓 디오니시우스의 번역에 의해 큰 영향을 받은 J.S.에리우게나와,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명확하게 한정하고 스콜라 철학의 방법을 확립하여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가 대표자이다. 신의 존재에 관한 안셀무스의 증명은 유명하다.
② 전성기
스콜라철학의 전성기는 13세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서에서 아라비아철학을 이입(移入)함에 따라 재래의 신학과 독립된 지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새로운 연구를 대폭 채용하면서 그것을 전통적 스콜라 철학의 체계 속에 하나로 융화시킨 것이 아퀴나스이다. 신학에 대한 철학의 원리적인 독립성이 유지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신학의 체계로 종합되어 있다. 이에 대해 보나벤투라는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누스적, 신비주의적 경향을 지켰다.
③ 말기(쇠퇴기)
말기인 14세기에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가 차츰 약화되었다. 유명론자(唯名論者) W.오컴, 신비주의자 M.에크하르트가 있다.
1.스콜라 철학의 발생기
스콜라 철학은 교양과 지성의 조화, 즉 종교와 철학의 유기적인 조화를 강조했다. 이 철학은 사실 고대 헬라 철학을 기독교에 혼합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스콜라 철학의 종류는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곧 이상론(理想論), 실재론(實在論), 유명론(唯名論)이 그것이다. 이상론은 플라톤 철학에, 실재론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유명론은 스토아 철학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들 고대 철학자들의 사상은 중세 교회 지도자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중세 후기 교회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논증하는데 크게 작용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초기의 교부들은 대체로 플라톤 철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세 초기의 스콜라 학자들은 신플라톤 철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스콜라 학파 학자들의 중요 논점은 실재론과 유명론 철학 중 어느 것을 취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중세 후반기의 철학이 되었으며 그 후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의 신학이 되었다.
1.스콜라 철학의 특징
스콜라 학파는 성경 진리(교의)와 이성(理性)을 조정함으로써 교회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소위 [가장 완전한 신학](Summa Theologia)이라는 것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완전한 신학이란 계시와 이성 곧 하나님의 빛과 인간의 생각을 절충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교의 신학을 그 시대 사조에 맞게 재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교의와 이성을 조정하려고 한 것은 이성을 신앙의 근거로 삼기 위해서였으며, 교회 교리를 정리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모든 지식을 정리함으로써 세상이 보다 쉽게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성경을 학문의 기본으로 삼았고 성경 해석을 위해 교회의 전통도 참고하였다. 그리고 스콜라 철학자들은 교부들로부터 계승받은 교의의 전달자였다. 이들은 성경 해석이나 성경 신학에 새롭고 근본적인 공헌을 하려고 힘쓰기보다도 조상들로부터 계승받은 교의를 확인시키기에 힘썼다.
스콜라 철학의 가치는 그 지적 구조가 대단히 광대했으며 신학 방법에 일대 진보를 이룩하였다는 점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기독교의 진리와 신학을 합리적이고도 철학적으로 논증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진리를 해석하는데 무리를 하거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애썼다.
그러나 스콜라 철학에는 큰 약점이 있었는데 우선 그들은 역사적 평론을 무시하고 터무니없는 철학의 기초 위에 신학 체계를 수립했으며 그들이 행하였던 성경 해석 또한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전설(전통)에 지나치게 의존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그들은 형식적 논리를 너무 과도하게 구사한 나머지 궤변으로 흐르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한편 그들은 성경이나 교회 역사에 근거가 없는 이론을 도입함으로써 '이단을 뒤집어 놓은 것이 정통'이라는 터무니없는 독단을 낳기도 했다.
스콜라 철학의 특징 요약
① 중세의 학문 연구는 먼저 성경과 교부(敎父)의 저서, 고대 그리스·로마의 철학자와 기타 저술가가 쓴 저서의 문헌적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그 저서들의 독해·주석·해독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이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서 가장 중시되었다.
②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신앙에 의해 인간에게 받아들여지는데 '신앙'은 곧 인간이 거기에 내포된 하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여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라는 것이 스콜라 철학이 지향하는 목표였다. 이때 신앙과 이해(이성)는 서로 한 쪽이 다른 쪽을 요구하면서도 한 쪽이 다른 쪽에 용해되어 없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긴장 관계에 있으며 이것은 중세 철학을 구성하는 이대(二大) 요인이다. 한 쪽이 다른 쪽에 예속되면 스콜라 철학은 없어지며, 신앙과 이해가 긴장 관계에 있으면서도 종합될 때 스콜라 철학이 성립하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의 다양성은 바로 이 종합의 다양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③ 교부와 철학자의 저서는 이것을 위해 사용되었다. 각 문제점에 따라 참조할 만한 전거(典據)들 곧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여러 학설들이 수집, 정리되었던 것이다. 12세기 초의 P.롬바르두스의 [명제론집]은 이런 종류의 저서 중 대표적인 것이다. 아벨라르는 이 여러 견해를 각 논점에 대하여 긍정측과 부정측의 대립하는 양 쪽으로 분류하는 방법('이다'와 '아니다'의 방법)을 도입하였다. 13세기의 [숨마](Summa; 완전하게 정리된 결정적 신학)는 이 대립하는 여러 견해 사이에 조화와 종합을 이루려고 한 시도의 집대성이다. T.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은 그 가운데 가장 저명한 것이다.
2.이 시기의 대표적 학자들
1.스코투스 에리게나(Scotus Erigena)
에리우게나라고도 불리는 에리게나는 아일랜드 사람으로 중세 초기의 가장 탁월한 사상가였다. 그는 845년 샤를 황제의 궁정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거짓 디오니시우스]라는 책을 불어로 번역하고 [자연의 구분]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의 사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벗어나 범신론적 입장을 띠었다. 그는 '하나님은 어떤 거룩한 신적 본질이며 연속적인 본질의 유출로 말미암아 우주 가운데 편만하신 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말하기를 '우주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우주 안에 있어서 그 본질과 정신과 생명이 되시며 그의 창조는 영원하며 영속적이어서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다'고 했다. 그는 또 주장하기를 '우주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자연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것은 그가 철학과 신학, 이성과 신학은 동일한 목적을 가지나 다만 형식만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에리게나 이후에 나타난 그와 비슷한 철학자로는 중세의 에크하르트(Eckart)와 근대의 헤겔(Hegel)이 있다.
2.안셀무스(Anselmus, 1033-1109)
스콜라 철학은 안셀무스에서 시작하여 토마스 아퀴나스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고 그 후에 몰락하였다. 안셀무스는 이탈리아 피드몬트의 아오스타에서 태어나서 프랑스 노르망디의 베크 수도원에서 수도하였다. 1093년에는 켄터베리의 대감독이 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유명한 [독백](Monologia), [대화],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심]이 있다. 안셀무스가 기독교 사상에 공헌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실재론적 입장이었다. 그는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서 극단적인 실재론자였는데, 개념은 실물을 떠나 있으며 실물 이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변증법을 가지고 기독교의 교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저서 [대화]에 나오는 논리를 보면, '신은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다. 신은 생각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만일 신이 사고(思考)에서만 존재한다면 그보다 더 높은 존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했다. 이것은 신앙과 이성의 접촉점을 찾으려는 스콜라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의 [대화] 제1장 마지막 글에서 그가 한 말 곧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는 말은 신앙은 이성에 앞선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그러나 신앙은 계시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연구해야 완전하게 되고 완성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안셀무스의 실재론적 입장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의 '속죄론'이다. 그의 속죄론은 [말씀이 육신이 되심](Cur Deus Homo)이라는 책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속죄론은 최초의 체계적 속죄론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속죄론은 하나님의 영광에서 출발한다.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유지하며 마귀를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약하며 마귀의 유혹에 싸여 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죄를 이기기만 한다면 사람보다 강한 것은 없으며 아무도 사람을 유혹할 수 없다. 그렇게 하여 타락한 마귀를 부끄럽게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친히 사람이 되시고 사람들의 죄를 지고 죽으심으로써 구원의 길을 얻었다. 인류의 죄는 한없이 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모든 죄를 덮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스도는 그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류보다 크시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원본이 수많은 사본보다 더 크고 중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전 세계 인류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러한 안셀무스의 속죄론의 영향을 입은 사람은 후에 나타나는 마그누스와 그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3.아벨라르(Abelard, 1079-1142)
안셀무스보다 조금 후에 등장한 아벨라르는 많은 점에서 안셀무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프랑스의 브르따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인격이 고매한 교수로서, 탁월한 철학과 신학 강사로서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학자였다. 그가 1115년 노트르담에 있을 때 그의 재능과 대담한 이론을 접한 많은 학생들로 인해 그의 사상과 생애는 널리 퍼지게 되었다.
아벨라르는 안셀무스의 제자였으나 그의 사상을 공허한 것으로 여기고 그와 대립하였다. 그 무렵 그는 파리에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알게 된 여제자 엘루아즈(Heloise)와 사랑에 빠져서 비밀 결혼 생활을 했으나 그녀의 숙부에게 거세를 당하고 서로 헤어지게 되는 비극적 결말로 끝났다. 그 후 아벨라르는 1119년부터 1136년까지 수도원에 있었다. 그가 수도원장으로 있을 때도 그의 인기는 계속 높아져서 문하생이 수천명이나 되었다.
아벨라르의 탁월한 재능은 많은 적대자를 낳아서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에 관한 논문이 공의회에서 소각되는 등 많은 박해를 받았다. 특히 그는 비평적인 사상으로 인해 한 때 그를 존경했던 기욤과 그의 제자로서 당시 가장 유력한 사상가요 신비주의자였던 베르나르두스(Bernardus)의 거센 반대를 받아 1140년 이단으로 선고를 받았고 2년 후 클루니 수도원에서 쓸쓸히 죽었다.
아벨라르는 중세에 있어서 가장 대담한 사상가였다. 그의 신학 사상은 진보적인 면이 강했다. 그는 신학 연구의 자유를 주장하였으며 성령의 영감에 대해 자유로운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성령의 계시는 신앙과 소망과 사랑과 성례에만 관계되는 것이고 다른 일에까지 확대시켜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선지자나 사도도 잘못될 수 있다고 했다. 원죄설에 대해서 그는 '죄는 각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하는 것이므로 죄를 원죄와 너무 연관시켜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속죄설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은 죄인들의 영혼을 감화시키기 위해 행해진 것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이런 점에서 그는 근세의 도덕감화설(道德感化說)의 시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중세를 초월하여 근대 사상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다만 그의 사상은 논리로부터 출발하였을 뿐 신앙적 체험에서 나온 것이 적다는 점이 약점이다.
2.스콜라 철학의 전성기와 쇠퇴기
1.대학의 설립
초기 스콜라 철학은 12세기 중엽으로 끝나고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는 13세기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는 유럽 각지에서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대학은 처음에 교회나 수도원 부설의 교육 기관이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이름난 학자들이 그런 교육 기관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게 되자 많은 학생들이 몰려 들어 전문적 교육 기관인 대학을 이루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볼로냐(1158년 설립)는 교회법과 민법으로, 프랑스의 파리(1186) 대학과 영국의 옥스포드(1200)는 신학으로, 이탈리아의 살레르노(1200)는 의학으로 이름이 났다. 당시 대학은 교사와 학생들이 상업조합(trade guild) 같은 단체를 만들어 상호 보호와 질서 유지 및 효과적인 지도 운영을 도모했으며 교수의 직업 규정도 만들었다. 그리하여 학생과 선생의 universitas scholarium(University of Scholars)이라 이름했다. 이런 대학교 조직은 1200년 경에 형성되었다.
중세 유럽의 대학들은 학문의 도장으로서 국가나 교회가 간섭하지 않았으며, 세금과 병역 의무가 면제되는 등 특권이 부여되었다.
2.이 시기의 대표적 학자들
1.알렉산더(Alexander of Hales, 1170?∼1245)
영국의 신학자요 철학자인 알렉산더는 헤일스에서 나서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했다. 그는 박식하여 '불가항박사'(不可抗博士), '신학자의 왕자'라고 일컬어졌으며 스콜라 철학과 프란시스코회 학파를 창시하였다. 주요 저서인 {신학대전(神學大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형이상학 및 아라비아, 특히 아비켄나의 사상을 받아들인 최초의 대전이었다. 그러나 그의 견해가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은 어거스틴·빅토르학파 설과 대립될 때에는 그들(어거스틴·빅토르학파)의 의견을 우선한다는 방법을 취하여 13세기 프란시스코회 신학 기초를 쌓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통달하였고 그것을 사용하여 신학의 계통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궁극적 진리는 성경뿐이라고 하면서 온건한 실재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세속적인 일에는 지식이 믿음보다 앞서며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믿음이 지식보다 앞선다'고 했다. 그러므로 "신학은 지혜를 모아놓은 것이지 과학이 아니다. 신학은 경험을 통하여 얻는 지식처럼 연구를 통해 얻게 되는 지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사상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계승하였다.
2.보나벤투라(Bonaventura, 1221∼1274)
중세 이탈리아 신학자·철학자로서 토스카나 지방의 바뇨레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알렉산더의 제자로서 1257년 T.아퀴나스와 함께 탁발수도회 수사로서는 처음으로 파리대학 신학박사 칭호를 얻었다. 그의 신학은 어거스틴에게서 시작되어 안셀무스가 확인한 전승적인 것이었다. 아퀴나스에 비해 그는 시간에서의 세상 창조를 이성의 빛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을 인지하고 하나님의 존재와 무한 선을 이해함으로써 풍요로워지며 명상은 기도, 묵상, 덕성, 사랑이 요구되는 바 하나님의 은혜로 추진되어야 완성이 된다고 하였다.
3.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1200?∼1280)
독일의 신비주의자로서 도미니코 단원이었던 그는 당대에 가장 유명한 신학자였다. 이탈리아 파도바대학 재학중 도미니크회에 들어가 풍부한 학식으로 <보편적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생전에도 Magnus(위대한 사람)이라고 존칭될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는 쾰른에서 18년간 교수하였으며 경험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동·식물과 광물계의 관찰과 천문학적 연구를 하였는데, 이 영역에서는 경험만이 확실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관찰 결과에 근거하여 주저 없이 정정하였다. 그는 신학자였으나 신학 연구와 교육을 위해서는 세계와 인간에 관한 학문, 즉 철학이 불가결하며 이와 같은 세속적 학문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선의 교사라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견지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모든 부분을 라틴세계 인간에게 이해 가능한 것이 되게 하자'고 계획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주요 저서의 주석을 씀으로써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처럼 그는 누구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여 그것을 이용하여 교회의 교리를 세우려 하였다. 그의 체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 뿐 아니라 신플라톤 철학이나 이슬람의 아비켄나에서 유래하는 요소도 섞여 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있어서 신학을 하나의 과학으로 정의한 사람이었으며 매우 많은 저서를 낸 대학자요 주석가였다.
4.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이탈리아 출신의 아퀴나스는 중세 스콜라 철학을 완성한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카톨릭 세계관에 도입하여 체계화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어거스틴, 칼빈과 함께 서방에 있어서의 세 가지 주요 신학 정신을 형성한 인물로 꼽힌다.
① 생애와 저술
아퀴나는 로마 황제령과 프리드리히 2세 영역의 경계에 있는 로카세카 성주의 아들로 출생하여 5살 때부터 몬테카시노에 있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15세 경 전화(戰禍)를 피해 몬테카시노를 떠나 나폴리대학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학문연구를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탁발수도회인 도미니크회를 접하게 되었다. 가족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도미니크회에 들어간 그는 파리를 경유하여 쾰른으로 건너가 거기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지도를 받았다. 과묵하고 큰 체격을 가진 아퀴나스는 마그누스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파리대학 교수의 후보자로 추천되었다. [명제논집]의 해설 강의를 마친 아퀴나스는 1256년에 교수자격을 획득하였으나 탁발수도회원을 배격하던 파리대학의 규정에 따라 강의의 시작은 1년 뒤로 미루어졌다.
신학과 교수의 주요한 직무는 성경 강의 및 학문적 논점에 대한 토론의 주재(主宰)와 설교였으며, 이 시기의 대표직 저서로는 [유(有)의 본질에 관해서]와 소수의 성경 주석 외에, 당시의 철학·신학의 주류였던 어거스틴주의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바탕을 두는 진리에 따라서 보완하려고 시도했던, 정기토론집 [진리에 대하여]가 있다.
아퀴나스는 관례에 따라 3년간 교수로 재직한 뒤, 이탈리아로 돌아가 약 10년 동안 교황청 및 도미니크회 부속학교에서 교수직과 저작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에 그의 사상은 두드러지게 성숙하였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은 같은 도미니크 회원인 모르베카의 길레루무스의 번역활동에 도움 받아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철학의 정교한 연구를 달성하였다는 점과, 정열적인 교황 우르바누스 4세의 요청을 받고 동방교회와 공동으로 그리이스 교부(敎父) 및 교의사(敎義史)의 본격적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던 점이다. 이 시기의 주요 저서로는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 정기토론집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보통 [황금연쇄](黃金連鎖)로 불리는 4대복음서의 연속 주석 및 [신학대전(神學大典)] 제1부 등이 있다.
1269년에 다시 불붙기 시작한 탁발수도회 배격운동에 대처하기 위해서, 아퀴나스는 다시 파리대학 교수로 취임하게 되었는데 그는 계속해서 3년간을 프란시스코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보수파 및 인문학과의 극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도 포함된 3개파의 논적(論敵)들과 논쟁하면서 [신학대전] 제2부, 그리고 몇 가지의 성서 주석과 정기토론집,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서의 주석 등 많은 저작 활동을 하였다.
1272년 도미니크회의 새로운 신학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나폴리로 돌아온 그는 다른 저서와 병행해서 [신학대전] 제3부를 연이어 저술하였으나,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우스의 축제일 미사 후 돌연 집필을 중단하였다. 이 사실에 놀란 동료들에 대해서 '나에게 새롭게 계시한 점에 비하면 이제까지 저술한 것은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한다. 1274년 초 교황의 요청에 따라 병든 몸을 무릅쓰고 리옹 회의로 향해 여행길에 올랐으나 중도에서 병세가 악화되어 고향 근처인 포사노바의 시트회 수도원에서 죽었다.
아퀴나스는 50세를 채 못 살았지만 60여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이 저서들은 주로 철학서와 성경 주석, 설교 및 변증학 서적들이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는 교리 신학과 윤리학이며 그의 필생의 대작 [신학대전](Summa Totus Theologia)이다. 그는 이것은 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② 사상
그의 사상 체계는 신플라톤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철학과 카톨릭 교회 교리를 통일, 종합한 것이었다. 아퀴나스는 신학 연구의 목적이 하나님을 알고 인간의 기원과 미래, 운명을 아는 데 있다고 했다. 또한 그 지식은 이성과 계시로써 얻는데, 이성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계시의 보충이 필요하며, 계시는 성경에 있고 성경은 유일하고 궁극적인 권위이며 성경은 기독교회의 회의와 교황들의 해석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이 계시를 이해하며 철학과 신학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상관 관계에 있으며 상대적인 것임을 의미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불투명하며 계시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그를 통해서 성경의 계시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그의 신론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의 개념을 결합시킨 것이다. 그는 신은 제1 원리요 순수한 활동이므로 가장 참되고 완전하신 존재라 하였고, 신은 절대적 본질이시며 만물의 근원, 종국(終局)이라고 하였다. 또 그는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는 어거스틴과 칼케돈 신조를 따랐다. 그는 또한 영혼(soul)과 정신(spirit)의 옛 구별을 버렸다. 사람의 영혼은 지성과 의지를 가진 한 단위로 비물질적이라 했고, 인간의 최고선(最高善, summum bonum)은 명상과 영적 교제로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창조된 인간은 원래 자연의 능력에 덤으로 그 최고선을 찾으며 기독교의 3덕인 신망애(信望愛)를 실천할 수 있는 은사를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을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게 되었으며 타고난 자연적 능력까지 부패되어 본래의 의를 상실했을 뿐 아니라 더 낮은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인간의 회복은 신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만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은 예수의 희생 없이도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은혜를 주실 수 있었으나, 예수의 거룩한 사역이 하나님이 택하실 수 있는 가장 지혜롭고 효과적인 방법이었으므로 그것을 사용한 것이라고 했다. 예수의 거룩한 사역은 인간의 죄에 대한 보상을 뜻했고 그는 상 받으실 공로를 세우셨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퀴나스는 안셀무스-아벨라르의 견해를 발전시키고 결합시켰다. 그는 예수의 죽으심은 인간의 죄 값을 치르고도 남았으나 하나님이신 그에게는 필요한 것이 없어 직접 상을 받으실 수 없으므로, 그의 동생격인 인간들이 그 덕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인간이 스스로 할수 없는 거룩한 사역을 대신하신 것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한 번 구속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행한 선행은 상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아퀴나스는 은혜는 아무렇게나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성례전(聖禮典)을 통해서 온다고 했다. 그리고 성례는 형식과 내용의 두 요소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즉 성례의 집행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에 명한 것을 대행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며, 성례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믿음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성례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중요한 도구로 보았다.
그는 성만찬은 화체설(化體說)을 인정하였을 뿐 아니라 더욱 분명히 설명하였다. 즉 집례자가 예문(禮文)을 읽으면 떡과 포도주의 모양과 맛은 그대로 있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물질의 본질이 예수의 살과 피가 된다는 것이다.
그의 내세관은 악인은 죽으면 곧 지옥으로 내려가며 교회가 제공한 은혜를 충분히 받은 자들은 즉시 천국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받지 못한 대부분의 성도들은 연옥으로 내려가서 얼마동안 훈련과 징계를 받고 그들을 위한 성도들의 기도와 선행으로 다시 하나님 나라로 간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아퀴나스의 교회관을 엿볼 수 있는데 그는 오직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구원 기관이므로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했다. 또한 보이는 교회에는 보이는 머리가 필요한데 이 머리는 로마의 교황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실제로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교황에게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 교황 무오설(無誤說)을 주장한 것이요 로마 교황을 신앙과 생활의 실질적 주관자로 인정한 것이다.
아퀴나스의 신학적, 철학적 위치가 크기 때문에 그의 성자적, 시인적 위치는 등한시되고 있으나 그는 신학자로서뿐 아니라 이 두 방면에서도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는 생활이 순결하였으며 그의 논리는 딱딱하지 않고 아름답고 질서정연하였다. 그가 쓴 찬송가 특히 그리스도의 몸에 관해 쓴 것은 카톨릭 교회의 오랜 찬송이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 체계는 신플라톤적인 그의 사상의 새로움에 압도적 인상을 받았던 그 시대 사람들에 의해 학설의 일부가 1277년 파리와 옥스퍼드에서 개최된 이단 선언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어거스틴을 기원으로 하는 교부 사상,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신플라톤 철학, 이슬람 사상, 유대 사상 등의 유산을 풍부히 계승하면서 <아퀴나스적 총체>로 불리는 독창적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통일성을 추구하였으나, 이것은 한편에서 학(學)으로서 신학의 성립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자율적인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기초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③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사상적 차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은 어거스틴의 사상과 일치하는 점이 많았으나 차이도 있었다.
신관(神觀)에 있어서,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설을 확립하였으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분으로 믿었으나, 아퀴나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성과 아울러 계시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인간관에 있어서는, 어거스틴은 원죄의 유전을 믿었고 영혼도 유전하는 것이므로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존재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행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데 비해, 아퀴나스는 인간의 완전 타락을 인정하지 않았고 선행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론에 대해서도 차이가 있었는데, 어거스틴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으로써만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 양성을 지녔다고 믿었고, 아퀴나스는 그리스도 없이도 인류의 속죄는 가능하나 그리스도의 구속이 가장 효과적이고 귀중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은 십자가에서의 죽음만이 아니고 전 생애가 다 구속사라고 했다.
구원론에 대해서도 같은 차이를 보였는데 어거스틴은 카톨릭 교회의 신자가 됨으로써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했다. 이에 비해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의 구속 없이도 구원은 가능하나 그리스도를 통하는 구원을 얻는 것이 최선의 길일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신비적 일치)으로 얻는다고 했다.
예정론에 있어서 아퀴나스는 반(半)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따랐다. 즉 구원을 얻으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안되지만 사람 또한 구원을 얻기 위해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상응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5.둔스 스코투스 (Johannes Duns Scotus, 1266∼1308)
스코투스는 영국의 신학자, 철학자로서 스코틀랜드 로디언의 둔스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281년 프란체스코수도회에 입회하였고 1290년경 옥스퍼드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1291년 사제(司祭)가 되었다. 그는 그가 수학한 옥스퍼드와 파리대학에서 피터 롬바르드의 [명제집](Sentences)을 강의했다. 그 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프랑스 왕 필립 4세와의 분쟁에서 교황 편에 가담했다가 1303년 파리에서 추방되어 영국으로 귀국했다. 그는 1307년 독일의 쾰른 대학 교수가 되었으나 다음 해에 요절했다.
그가 남긴 주요 저술은 옥스퍼드와 파리대학에서 썼던 두 권의 [명제집] 주석이다. 그의 사상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학자들로부터 '난해한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16세기의 인문주의자와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 역시 그의 불명료한 문제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에서 저능아(dunce)라는 단어를 만들어내었다.
젊어서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가 남긴 책은 적지만 그는 중세기 신학자 중 가장 대담한 자였다. 그는 자기 선배들의 학설을 거침없이 비평하였다. 그는 당시에 이미 로마 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으로 인정받고 있던 유명한 아퀴나스의 학설까지도 비평하였다.
아퀴나스와 스코투스의 근본적 차이는 신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아퀴나스는 신학과 철학간에 불일치는 없으며 단지 신학이 찾을 수 있는 모든 진리를 철학이 다 찾을 수 없을 따름이라고 했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신학에는 철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철학으로 설명되거나 입증될 수 있으며 오직 교회의 권위로 그것을 진리로 인정할 따름이라고 했다.
또 아퀴나스는 이성(理性)과 지식이 의지(意志)에 비해 우위에 있다고 믿었다. 의지는 이성이 의지에게 최고 선이라고 제시한 것을 따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이성의 사용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의지의 우위성을 주장했다. 이성은 의지에게 무엇이 가능한지를 보여주지만 그것들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의지 자체라고 했다. 의지는 이성이 지시하는 것을 무조건 따르지 않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추론된다. 스코투스는 하나님의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본질을 그 절대적인 '존재'(being)에 있다고 보았지만, 스코투스는 하나님이 지니신 절대 자유 의지, 곧 '최고 의지'(supreme will)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은 둘 다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자유 의지를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모든 결정이 최고 선이 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가장 좋은 구원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이 그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만일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의지(意志)하셨다면(기뻐하셨다면) 성육신과 십자가가 아니라 그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아퀴나스가 '예수님의 죽으심'이 구원의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단지 하나님이 그 방법을 취하셨다는 것뿐이다' 라고 했다.
스코투스가 하나님의 자유를 강조한 것은 이성과 철학의 역할이 필연적으로 감소되었음을 의미한다. 안셀름(Anselm)과 아퀴나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는 매우 필연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방법 이외의 다른 선택을 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데 비해 스코투스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주장한 것은 하나님의 자유를 매우 강조한 것이며 또한 교리가 '합리적'임을 증명할 가능성을 제한한 것이다. 스코투스는 심지어 주님은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어도 성육신하셨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것은 성육신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지 인간의 죄로 인해 그분께 부과된 필연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스코투스는 이성과 철학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의 일부 곧 그 분의 무한성 같은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대부분의것들 즉 하나님의 선, 공의, 자비, 예정 등은 단지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며 믿음으로서 수납될 수 있는 것이지 이성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고 했다.
스코투스는 구원의 요건으로서 '회개'의 필요성을 크게 중요시하지 않았다. 아퀴나스는 진정한 회개가 꼭 필요하며 형벌을 무서워함으로 하는 불완전한 회개는 반드시 은혜를 통해서 완전한 회개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만 하면 그런 불완전한 회개도 죄 사함을 얻는 회개로 간주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인정하는 인간의 충분한 반응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아퀴나스와 스코투스 간의 가장 큰 견해 차이는 동정녀 마리아의 무오수태(無誤受胎)에 대한 것이었다. 아퀴나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만인의 구주이지만 마리아는 인류의 원죄를 지닌 자로서 수태 후에야 비로소 무죄한 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마리아는 처음부터 보통 인류와는 달리 원죄가 없는 거룩한 존재라고 했다. 이 주장은 로마 교황 피우스 9세에 의해 1854년 천주교 교리로 선포되었다.
6.오캄의 윌리엄 (William of Ockham, 1280-1348)
스코투스의 제자인 윌리엄 오캄은 1280년 경 영국의 서레이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배운 후 파리에서 대학 교수로 있었는데 사람들로부터 '무적의 학자'(Doctor Invincibilis)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프란체스코 교단의 가장 진지한 단원으로서 스코투스보다 더 극단적으로 철학을 신학에서 분리시킨 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권(敎權, 교회)과 정권(政權, 세속 정치)의 분립 특히 정치가 교회에서 독립해야 함을 죽을 때까지 강하게 주장하였다.
오캄이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초기에 받은 교육은 주로 논리학이었다. 오캄은 명사(名辭)에 관한 학문이 신(神)·세계·교회기관·시민기관 등 사물에 관한 모든 학문을 연구하는 데 기본적이고 없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 생애를 통해 논리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일생 동안 모든 논쟁에서 논리학은 상대에 맞서는 주된 무기로 쓰였다. 오캄의 글들은 추상적이고 개인 감정을 섞지 않은 문체로 되어 있었지만 그의 지적·정신적 태도를 잘 드러내었다.
그는 논리학을 대단히 중시하였기 때문에 흔히 [신학자 논리학자](theologicus logicus ; 루터의 표현)로 불렸다. 그는 논리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엄격한 합리적 평가,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의 구분, 증거와 개연성(蓋然性) 사이의 차이 등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는 인간의 자연적 이성과 인간 본성을 크게 신뢰하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다른 한편, 신학자로서 그는 교리에 나온 그대로의 하나님이 일차적으로 중요하고, 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은혜롭게 구원한다고 말했다. 즉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의무를 부과하지 않고 주기만 하는 것이며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한 데서 유감 없이 증명되었다고 했다.
"가장 단순한 것이 최상의 설명이다", "작은 말로 충분할 때 쓸데없이 많은 전제들을 설정해서는 안된다"는 그의 법칙은 흔히 [경제 법칙] 또는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왔다. 오캄은 특히 스콜라 철학자들이 소위 '실재'(實在)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많은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 원리를 사용했다. 유명론(唯名論)이라는 형식을 창시한 인물로 여겨지는 후기 스콜라 철학 사상가로서 그는 모든 형태의 실재론(實在論, realism)을 강하게 공격했다.
유명론이란 예컨대 '아버지'와 같은 보편 개념이 그 보편자나 일반명사가 가리키는 개체들과 따로 실재성을 가진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상이다. 그는 오직 개체의 대상만이 존재하며 유(類)와 종(種)은 단순히 미래에만 있는 것으로서 객관적 실재는 없다고 주장했고, 단순히 상징적 기호(술어; terms)를 사용하여 그것(각 개체)을 일컬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기호주의자(terminist)라고 불렀다.
좀더 그의 사상을 설명하자면 오캄은 언어를 문자·음성·개념으로 구별한 다음, 보편은 개념으로서의 말이라고 하였다. 또 그는 음성과 문자가 약속에 의하여 성립한 기호인 데 대하여, 개념은 이해의 작용으로서 사물의 자연적인 기호라고 하였다. <인간>이라는 말을 놓고 볼 때 [인간]은 어디까지나 개별 사물들의 기호이지만, 반드시 개별 사물을 대표한다(가리킨다)고는 할 수 없고, [인간은 명사(名詞)이다]에서는 음성을, [인간은 종(種)이다]에서는 개념을 대표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실재하는 것은 개체(개별 사물)뿐이고, 이 개체들을 인식하는 직관(直觀 ; notitia intuitiva)이야말로 명증적 지식(明證的知識)의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생각은 많은 신학적 명제를 '믿어야만 할 것'으로 만들었고, 이것과 경험과 지식의 분리를 촉구하여 근세의 자연과학적 사상의 선구가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신학적 교리는 철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하면서, 교리는 이성에 의해 수락된 것이 아니라 외부적 권위에 의해 수락된 것일 뿐이라는 그의 스승 스코투스의 주장을 따랐다. 그는 그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교회라는 사실은 인정했으나 무책임한 교황의 종교 회의 결정보다는 성경이 그 궁극적 권위여야 하며 오직 그것이 성도들을 구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까닭에 루터는 그를 '존경하는 선생'이라고 불렀다.
오캄의 견해는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 보급되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종교 개혁 직전까지 유명론이 신학계를 지배하며 아퀴나스-스코투스 주의를 고대(古代, via antigua)라고 부르는데 비해, 오캄 이후를 근대(近代, via moderna)라고 불렀다. 이것은 스콜라 신학의 파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교회의 권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기존 교리들에 대한 철학적 자유 비판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의 기반이 합리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독단적 권위에 근거를 둔 것으로 생각케 하여 신학의 토대를 무너뜨리게 했다. 이미 그 무렵 사람들은 지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참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 스콜라 철학의 훌륭한 사색 체계에 대해 취미를 잃은 14,15세기의 사람들은 신비주의로 넘어가거나 스콜라 신학이 줄 수 없는 기적과 종교적 안위를 찾아 어거스틴에게로 돌아갔다.
오캄의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는 청빈 문제였다. 그는 그 문제로 오랫동안 교황과 다투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 프란치스코의 복음주의 율법 아래서 살기로 선택한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며 따라서 우주의 왕이지만 소유권을 포기하고 세속적 권력을 내어놓고 오직 믿음으로써만 세상에 군림하려 한 가난한 사람이었다. 이 군림은 교회라는 형식으로 표현된다. 교회는 교황이나 종교회의 같은 소위 절대무오류(無誤謬)의 권위를 가진 무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진실한 신앙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설사 일시적으로는 어느 정도 줄어들고 위축될 수 있더라도 지난 수백 년 동안 버텨온 것처럼 앞으로도 틀림없이 계속 버틸 것이다. 지위와 성별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교회 안에서 모두에게 공통되는 신앙을 지켜야 한다."
오캄이 보기에 교황의 권력은 복음과 자연법으로 확립된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에 부딪쳐 한계를 맞게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캄이 교황권에 맞서 제국을 편든 것이나 1339년 교회 재산에 세금을 물린다는 영국 왕의 권리 선언을 옹호한 것은 당연하였다.
오캄은 이단 혐의와 수도회의 청빈 강조, 교황권의 한계 천명 등의 이유로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교황 요한 22세 및 베네딕투스 12세에게 저항하였다. 그는 1334년 요한네스 22세가 죽은 뒤에 그리고 베네딕투스 12세의 재위 기간(1334~42)과 클레멘스 6세의 선출 및 1347년 루드비히 4세의 죽음 후에도 여전히 같은 견해를 유지했다. 이 마지막 몇 해 동안 그는 논리학에 관한 2편의 소논문을 쓸 시간을 얻었다. 이 논문은 그가 논리학에 일관되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음을 입증한다. 또 교황 클레멘스가 제안한 중재 절차에 관해서도 토론했다. 오캄은 1349년경 흑사병으로 추측되는 병으로 뮌헨의 한 수도원에서 죽었다.
참고 : 普遍論爭
유럽의 중세 철학에서 <보편>을 둘러싸고 전개된 존재론적·논리학적 논쟁을 보편 논쟁이라 한다. 보편에 대한 문제는 이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도 논의했는데, 포르피리우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테고리론》의 서문에서 ① 유(類;genus)나 종(種;species)은 실체로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단순한 표상(表象)에 지나지 않는가 ② 만일 그것들이 실체로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물체적인가 또는 비물체적인가 ③ 그것들은 감각적 사물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가 아니면 그 안에 존재하고 있는가 라는 3가지 문제를 제출하였고, 로마의 철학자 A.M.S.보에티우스가 그 주석에서 문제 해결을 시도한 이후, 중세 특히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보편에 관한 여러 가지 존재론적·논리학적 견해가 나타나 논쟁이 오갔다.
이 문제에 대한 첫 해답은 {극단적인 실재론}(實在論, 實念論)이다. 그것에 의하면 類나 種이라는 普遍은 정신 안에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정신 밖에 있는 대상 속에 실체로서 존재한다. 오세르의 레미기우스, 캉브레의 오도, 샹포의 기욤 등이 이 입장을 취했다.
이에 반하여 보편은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 사물'뿐이라고 하는 주장을 {유명론}(唯名論)이라고 한다. 11세기에 살았던 대표적인 유명론자 [로스켈리누스]는 보편이 <음성의 숨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보편을 <사물>에 귀착시키느냐, <명칭>에 귀착시키느냐에 따라서 실재론과 유명론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보편을 개념이라고 보는 주장을 개념론(槪念論)이라고 한다.
12세기 P.아벨라르는 로스켈리누스와 기욤을 비판하여 독자적인 주장을 세웠다. 그는 "보편은 다수에 대하여 술어(述語)로서 적합하나 개별적 사물은 그렇지 않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定義)에서 출발하여 보편에 대한 문제를 보편적 명칭의 명제에서 술어 기능이라는 관점으로 고찰하였고, 보편적 명칭의 표의작용(表意作用 ; signi-ficatio)의 분석을 통하여, 보편은 사물도 음성도 아니고 <말(語)>이라고 하였다. T.아퀴나스나 J.둔스 스코투스도 실재론의 입장을 가졌는데, 유명론을 발전시킨 사람은 14세기의 W.오컴이다. 그에 따르면 보편은 개별적 대상을 나타내는 명사(名辭) 내지 기호이다.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 사물뿐이며, 보편은 개별적 사물이 아니므로 어떤 뜻에서도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보편은 논리학적 신분만을 지닌 술어 또는 의미이다. 보편에 관한 여러 가지 논쟁은 중세의 논리학 및 존재론의 형성과 치밀한 전개에 이바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5.신비주의 운동
스콜라 철학 제1기와 때를 같이하여 일어난 것이 중세의 신비 사상이다. 유럽 중세기의 사상계는 스콜라 철학과 신비주의 사상이 두 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 이 두 사상은 근본적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었다. 스콜라 철학의 뿌리는 신비 사상에 두고 있다. 둘의 대표적 차이는, 스콜라 철학은 추리를 중히 여기고 신비 사상은 직관을 중히 여기는 것과 스콜라 철학에는 객관적인 요소가 많고 신비 사상에는 주관적인 요소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비적 사상가들 중에서도 차이가 있었으니 독일의 신비주의자와 프랑스의 신비주의자의 특성이 달랐던 것이다. 독일은 철학적이고 프랑스는 감정적, 시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1.독일의 신비주의 운동
독일 신비주의 사상가들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신통주의(神通主義)]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강조하였으며 따라서 상대적으로 인간의 공허성(空虛性)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들의 약점은 영감으로 오는 체험을 성경보다 중히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1.에크하르트(Johannes Meister Eckhart, 1260-1327)
독일과 네델란드에는 거의 범신론에 가까운 쪽으로 기울어진 신비주의자들이 많이 등장했다. 그 근원이 된 사람은 독일의 에크하르트였다. 에크하르트는 중세 말기의 신비주의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로 꼽히며 독일 최대의 신비주의자로 꼽히기도 한다. 그는 15세에 엘푸르트에 있는 도미니코파의 수도원에 들어갔고 1293년 파리에 유학하여 1302년에는 신학석사가 되었다. 1311년에 파리에 교사로 파견되었다가 나중에 슈트라스부르크와 쾰른에서 교사와 전도자로 봉사했다. 생애 말년에는 그는 로마 교회로부터 이단 혐의를 받았다. 그가 죽은 후인 1329년에 교황 요한22세는 그의 저서들에 나타난 28개의 전제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에크하르트는 도미니코파로서 스콜라적인 신념을 가졌던 신비주의자였다. 그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는데, 이들에게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측면보다는 신플라톤주의적 측면을 받아들였다. 그가 정죄를 받게 된 것도 주로 신플라톤주의에서 나온 일련의 경솔한 진술들 때문이었다. 그는 철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승을, 신학에서는 아퀴나스는 따랐으나 강조점이 달랐다. 그는 또 어거스틴에게서는 시간과 영원에 대한 추상을 빌었으며, 플로티누스, 가짜 디오니시우스,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등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에크하르트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관계였다. 그는 만물에 있는 참 실재는 하나님이요, 사람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불꽃'(spark) 또는 '근저'(ground)가 들어있다고 했으며, 사람의 영혼은 그 속에 특별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께서 완전히 거하시는 곳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안에 있는 이 참 실재 곧 하나님의 성질만 남기고 나머지 개성적인 인간적 특성들은 다 버려야 한다고 했다. 사람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살려내고 나타내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것이 곧 사람이 하나님과 완전하게 사귀는 것이요 내재하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노력의 모범이시며 그러한 예수 안에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성을 입으시고 거하였다고 했다. 하나님이 영혼을 주장하시면 영혼은 사랑과 의로 채워지며, 선행을 통해서가 영혼이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의로워진 영혼이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 생명을 충분히 누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하기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아의 의지이며 우주에 편만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주관을 성부(聖父)로, 객관을 성자(聖子)로, 사랑을 성령으로 보았다. 그의 이러한 신비적 경험은 신플라톤주의의 용어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범신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에크하르트는 후에 자신이 과장된 표현을 쓰는 잘못을 범했다고 인정하였고 어거스틴주의와 아퀴나스주의의 교리에 근거한 정통적 설명들을 제공함으로써 논란이 되는 그의 주장들을 다른 방법으로 옹호하였다.
2.타울러(John Thauler, 1300-1360)
에크하르트의 가장 유명한 제자는 타울러였다. 독일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출생한 타울러는 도미니코파의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가 되었으며 에크하르트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1348년 영국에서 흑사병(임파선 페스트)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병자 구원에 전력을 기울여 더욱 유명해졌다.
타울러 역시 에크하르트처럼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내주(內住) 장소인 '불꽃' 또는 '근저'를 영혼 속에서 파악했다. 그러나 그는 조심스럽게 이 근저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영혼의 본래적 속성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영혼이 그 원천으로 돌아감은 은혜의 활동이며 인간 의지와 신적 의지의 연합을 동반하는 것이지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로 흡수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루터는 훗날 타울러의 설교를 순수 신학의 샘이라고 찬양했다. 루터의 찬탄을 자아낸 것은 타울러의 독특한 신비적 가르침이 아니라 고난과 자기 부인, 은혜 의존이라는 내적 신앙에 대한 그의 가르침이었지만 루터의 이러한 판단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은 종종 타울러를 종교 개혁의 선구자로 본다. 이런 말을 들을 만큼 그는 신앙의 내적 생명력을 매우 강조하여 기독교 신앙이 외적 의식에 의존하는 것을 비난했다. 그의 설교는 하나님의 내재(內在), 내적 조명(照明)에 대해 많이 말했으며 복음적 사상이 강했다. 또 그의 사상은 실제적이어서 죄의 관념이 강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회개에 대해 강조했다. 그는 또한 사랑과 자기 희생을 강조했다.
3.로이스부르크(Jan van Ruysbroeck, 1293-1381)
신비주의 신앙은 네델란드 플랑드르의 가장 탁월한 신비주의자 로이스부르크에 의해 더욱 커져갔다. 그는 오랫동안 브뤼셀에서 교구 사제로 지냈는데 은퇴 후 친구들과 제자들을 모아 그룬엔달에 어거스틴주의적 표준의 명상 공동체를 세웠다. 거기서 그는 그의 첫 저술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를 제외한 모든 책을 썼다. 그의 사상의 많은 부분은 신비주의자 하데비치(Hadewijch)에게서 나온 것으로, 하데비치는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관계를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로이스브루크의 교훈과 신앙에 관한 체계적인 개요는 에크하르트의 저작들이 보이는 내성적인 성격과 대조적이다. 그의 대표작 [영혼의 결혼](1350)은 삼위일체에 관한 견해를 전개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을 찾는 영혼들을 위한 안내서이다. 그의 많은 저작들은 당시의 어거스틴주의자를 위해 씌어졌으나, 라틴어 번역서를 통해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그는 15세기의 '데보티오 모테르나'(devotio moderna:공동생활형제단의 창시자인 헤라르트 흐로테가 시작한 신앙운동)의 출현을 예고했는데, 그 운동을 대표하는 저술은 토마스 아 켐피스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리스도를 본받아]이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의 철학적 업적 때문이 아니라 그의 깊고 순수한 정서 때문이었다. 다른 신비주의자처럼 그 역시 내면 생활과 명상을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일치와 연합을 강조했다.
4.주조(Heinrich Suso, 1295-1366)
주조는 독일 베르크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콘스탄스에 있는 도미니코파 수도원에 들어갔다. 쾰른에서 공부할 때 타울러와 만났고 에크하르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후에 그는 콘스탄스로 돌아와 수도원장이 되었다. 주조는 대개 신비적 연합을 신체의 연합보다는 의지의 연합으로 묘사하고 피조된 존재와 피조되지 않은 존재의 지울 수 없는 차이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구약의 잠언 가운데서 여성화(의인화)한 [영원한 지혜]를 상상과 동경의 대상으로 이후 일편단심 그것을 섬기는 생활과 명상의 생활을 하였다. 그는 수도자들의 정신적 지도자로도 이름이 나 있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명상집으로 지은 그의 저서 [진리의 소책자](The Little Book of Truth)는 후대의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보다 더 인기를 얻었다.
5.신비주의적 단체들
신비주의 사상은 비단 사상가들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들에 의해서 고취된 독일과 네델란드의 여러 영적 공동체들에 의해서도 널리 보급되었다. 특히 에크하르트, 타울러, 주조는 14세기 라인란트와 스위스에 있는 성직자들이나 평신도 신비주의 단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단체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친구](Gottesfreunde)라고 불렀는데 이런 단체들로부터 14세기 후반 익명의 신비주의 논문인 [독일 신학]이 나왔다. 이 책은 1516년과 1518년에 자신이 서문을 써서 발행한 젊은 루터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16세기의 재세례파와 영성주의자들(Spiritualist)은 이 책을 개혁의 기본 서적으로 애용하였다.
베긴회(Beguines)는 11세기 경에 이미 존재한 여자 독신 단체인데 공동 생활을 하였으며 검소한 옷을 입고, 함께 기도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힘써 돌보았다. 베가르드(Beghards)는 베긴회와 같은 성질의 남자 단체로서 방적업자를 비롯한 평신도들이 많이 속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견실한 생활과 자선사업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이들은 나중에 과도하고 과격한 성향을 띠게 되어 기성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기도 했다. 그들이 정죄된 것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됨으로써 영적인 완성 상태를 누릴 수 있다는 것, 둘째, 이 거룩하고 온전케 된 사람은 성례적 은혜와 선행을 포함하여 종교의 모든 형식들을 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셋째, 그런 사람은 더 이상 교회법이나 심지어는 하나님의 도덕법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자가신론(autotheism;영혼과 하나님이 하나됨), 반율법주의, 급진적 영성주의(신앙 생활에서 모든 외적 도움을 제거함)를 주장한 것으로 정죄된 것이다. 성령의 인도에만 모든 것을 의지하는 이러한 주관적 신앙 태도는 결국 기성 교회와 교권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성직제도를 반대했으며 예배와 예식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마거리트 포레테라는 한 베긴회원 여성은 1310년 [순박한 영혼의 거울]이라는 책에서 위와 같은 이단적 생각을 개진했다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다. 특히 자유신령파라고 불린 극단적 성향의 신비주의파들은 그 경향이 매우 급진적이어서 일반 신비주의자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다. 그들은 자가신론(自家神論)을 주장하였고 종종 해방된 영혼은 전통적인 구원 방식이 필요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인들과는 달리 완전에 이르는 길에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철저한 자기 부인이 필요하며, 완전케 된 사람들이 무절제한 생활을 하는 경우는 없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친구들]이라는 단체는 공동 생활을 하는 단체는 아니었다. 서로 인맥을 통하여 경건한 생활과 봉사를 위해 서로 돕고 장려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1348년 흑사병이 유럽을 돌 때 이들은 병자를 돌보고 위급과 혼란의 상태를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중세 말에 가장 널리 퍼지고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운동은 네델란드 동부에서 로이스부르크의 제자 헤라르트 흐로테(Geert Groote Gerhard, 1340-1384))와 흐로테의 제자 플로렌티우스 라데빈스(Florentius Radewijns, 1350-1400)에 의해 시작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곧 현대신심(現代信心, Devotio moderna)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1370년대와 1380년대에 흐로테와 라데빈스의 사역으로 설립된 세 공동체들 곧 데벤터에 설립된 [공동생활 자매회]와 [공동생활 형제회](Bretheren of the Common Life), 빈데샤임에 설립된 [어거스틴 참사회(社會) 공동체]을 통해 펼쳐졌다.
데벤터 출신의 흐로테는 파리대학교에서 법학, 의학, 신학을 공부하였고 그 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그는 성직자가 아니면서도 많은 성직록을 보유하고 부유한 생활을 하다가 1370년 회개를 체험하고 모니쿠이첸 수도원으로 들어가 생활하는 중에 라인란트의 신비주의자들 특히 로이스부르크의 저서들을 공부하였고 그 제자가 되었다. 그는 본격적인 수도 생활과 신비주의자 생활을 다 원치 않았기 때문에 부제로 임명받은 위트레흐트 교구에서 선교사와 설교자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당대의 부패, 특히 성직자들과 수도원들의 부도덕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1383년 설교 자격을 박탈당했다.
흐로테가 원래 지녔던 이상은 세속 사회를 떠나지 않은 채 신앙을 실천하는 공동 생활이었다. 이 이상에 가장 가까이 남은 사람들이 바로 라데빈스가 데벤터에 있는 자신의 총사제관에서 조직한 평신도 [공동생활 형제단]이었다. 이들은 주로 필사본을 베끼는 가난한 학자들로 구성되었다. 공동생활 형제단의 주요 활동은 네델란드와 독일의 도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신앙적으로 돌보는 일이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그들은 특히 수도 생활 또는 성직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일부 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고 형제단원들이 그들에게 신앙 교육을 할 수 있는 숙소들을 건립하였다. 형제단원들 자신들은 거의 대학 교육이나 신학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학교를 설립하거나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필사를 통해 유익한 서적을 보급함으로써 청년들의 신앙 교육에 힘썼다.
이 단체의 대표적 인물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와 요한 벳셀(Johann Wessel, 1420-1489)이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켐펜에서 태어났는데 공동생활 형제단에서 12세부터 교육을 받고 1399년 형이 원장으로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 1413년 신부가 되어 이후 70년간 아그네스 산에 있는 빈데샤임파 수도원에서 수도하며 전도와 저술, 사본 정서(淨書), 수도사 지도에 힘썼다. 그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하였으나 사교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애를 거의 서재에서 혼자 조용히 책을 쓰며 보냈다. 그는 39권의 책을 썼으며 그 중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흔히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고 큰 영향을 미친 경건 서적으로 꼽힌다.
요한 벳셀은 흐로닝엔 출신으로 공동생활 형제단에서 배웠다. 그는 토마스 아켐피스의 책을 읽고 또한 그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파리, 로마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그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교리를 이해하였으며 이를 가르치는데 명쾌하고 열심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데벤터에서, 루터는 마그데부르크에서 각각 공동생활 형제단원들이 교사로 있던 학교들에 다녔다. 그러나 형제단원들이 기독교 인문주의 또는 종교개혁의 직접적 선구자라고 볼 수는 없다. 공동생활 형제회와 자매회, 그리고 빈데샤임 수도회원들이 실천한 '새로운 경건'은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 관계에 대한 각성에 그 기초를 두었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을 강조하였으며,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의식들로부터 자양을 얻었다. '데오티보 모데르나'(현대신심) 운동가들은 비록 진보적이기는 했지만 반(反)성례적이거나 반제도적(反制度的)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경건을 가르침으로써 신앙의 형식주의와 교회의 부패를 극복하는 데에만 목표를 두었다. 더욱이 이러한 경건은 신부주의가 아닌 묵상을 그 성격으로 삼았다. 데오티보 모데르나 운동가들은 본격적인 신비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라인란트와 플랑드르 지방의 신비주의자들이 쓴 책들을 대체로 무시하였다. 이 보수주의적 경건이 남긴 가장 큰 열매는 토마스 아 켐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고 할 수 있다.
2.프랑스의 신비주의 운동
12세기에 신비주의 신앙을 고취시키고 신비주의를 발전시킨 사람 중 대표자는 씨토(Citeaux) 수도원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이다. 프랑스 디종 근처의 퐁탱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교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22세에 그는 30명의 동지들을 데리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엄격하다는 씨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행한 3년간의 극도의 고행으로 그는 평생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로 지냈다. 그는 1115년 12명의 수도사를 데리고 클레르보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워 원장이 되었고 거기서 평생을 지냈다. 그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비적 명상이 최고의 영적 기쁨이라고 생각하고 오직 극단적 금욕 생활을 근간으로 하는 경건 생활에 힘썼다. 그는 수도원에서 평생 지냈지만 대중 설교가로 나섰고 전도 여행을 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생활과 신앙의 영향력은 교황을 능가하기도 했고 1130년 추기경들은 그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분열된 교황청을 수습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제2차 십자군을 일으키는 제창자가 되기도 했다.
신학에 있어서 베르나르는 전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아벨라르의 자유사상과 싸웠다. 그의 사상은 신비적이었지만 단지 무한자(無限者)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그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사모하여 그 고통에 동참하고자 하는 신앙적 신비였다. 그의 신학의 근본적 윤리적 원리는 겸손과 사랑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먼저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사랑하고 다음에는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일이 거듭되면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마침내 하나님을 위하여 만민을 사랑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베르나르의 이 신비적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초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명상함으로써 영혼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고 갈보리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명상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신비적 사랑을 일으키고자 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고난은 베르나르의 철학과 신학의 총체이며 정수였다.
이러한 베르나르의 정신을 계승한 씨토(일명 Cistercian) 교단은 놀라운 확장력을 가지고 뻗어나가 13세가 중엽에는 1800개의 수도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가르침이나 목회 사역에는 비교적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금욕적인 경건의 모범을 끼친 것을 제외하면 그들이 사회에 끼친 주된 공헌은 광대한 황무지를 열성적으로 개간하여 농업에 종사한 것이었다. 그들의 수도원은 의도적으로 거친 벽지나 기독교 세계가 팽창하는 변경에 세워졌다. 그들은 농노 고용을 거부하였고 주로 평신도 형제들(conversi)을 이용하여 토지를 경작하였다. 그들은 또한 이교도 전도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그들의 금욕적인 성실함은 자연히 물질적인 번영을 가져왔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이 그들의 정신적 쇠퇴를 가져오고 말았다.
6.탁발수도회 운동과 그 영향
1.탁발수도회의 생성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 Mendicant Orders)란 청빈(淸貧) 서원(誓願)을 하고 교회 재산 없이 오직 노동과 자선금으로만 생활을 유지하는 중세의 여러 수도회를 총칭하는 말이다. 이들이 발달하게 된 것은 교회의 무사안일주의 때문이었다. 당시 교회 개혁이란 주로 성직자와 수도승들의 개혁을 뜻했다. 성직자 대부분의 영적 상태는 한심스러웠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회에는 막대한 재산이 축적되었고 감독들은 풍부한 수입으로 호사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순전히 세속적인 사람들이 감독이 되어 오직 예배 의식만 중히 여기고 설교를 경시했으며 부와 권세를 얻을수록 세속적인 안락에 파묻혀 신자들의 신앙에는 무관심했고 가난하고 곤고한 민중들을 멀리했다.
성직자들뿐 아니라 수도사들도 문제가 많았다. 그들은 현실도피주의자 내지 타계(他界)주의자들로서 청빈생활, 금욕생활, 고행주의, 그리고 신앙적 경건주의에만 집착하여 물 좋고 산 좋은 깊은 산 속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전도와 구호 생활을 등한히 했다. 이에 반발하여 탁발수도사들은 친히 민중과 접촉하여 그들의 친구가 되고 조언자가 되어서 고백을 듣고 설교를 했다. 그들은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들의 입장에 서서 전도와 구제사업을 하며 그들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맛보는 것을 실행하려고 했기 때문에 걸식(乞食)수사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들 탁발수도회 중 현재에도 남아 있는 것으로는 도미니쿠스 수도회, 프란체스코 수도회, 어거스틴 수도회, 갈멜 수도회, 삼위일체 수도회, 튜튼 기사단 등이 있다.
탁발수도회를 창설한 주요한 두 명의 인물은 1216년 도미니쿠스 수도회를 창설한 성 도미니쿠스(1170-1221)와 1210년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창설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1182-1226)이다. 그들이 죽은 지 한 세대도 채 안 되어 이 두 수도회는 유럽 전역과 아시아로 퍼져나갔고, 수사들의 수는 늘어나 수만 명에 달했다. 서유럽의 모든 대도시 곳곳에 탁발수도회가 세워졌으며, 대학에서는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들과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들이 신학을 가르쳤다. 이 두 수도회에 이어 13세기에는 갈멜 수도회, 어거스틴 수도회 같은 큰 탁발수도회가 생겨났다.
청빈사상은 성 프란체스코의 근본 사상으로, 성 도미니쿠스와 다른 탁발수도회 창설자들도 성 프란체스코의 청빈사상을 모방한 것이 거의 분명하다. 성 프란체스코는 걸식과 자선금이 수사들의 생계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수사들이 손수 노동하여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노동으로 생계비를 마련할 수 없을 때만 구걸에 나서라고 했다. 그러나 수사들은 얼마 안 가서 거의 다 영적 사역에 전념하는 성직자들이 되었고, 수도회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그들이 손수 노동하여 생계를 마련한다는 것은 점점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성 프란체스코가 애초 생각했던 것보다 구걸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졌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수사들이 최대한 청빈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하며, 토지나 고정 자산, 고정 수입원을 갖지 말고 최소한의 소지품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상을 유지하는 것이 실제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도미니쿠스 수도회에서는 그러한 이상이 완화되거나 폐기되기도 했고,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는 이 문제로 인해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났으며, 계속된 개혁과 새로운 출발에 의해 그 원칙이 되살아나곤 했지만 성공은 잠시일 뿐, 얼마 안 가서 냉혹한 현실 때문에 원칙이 포기되는 것이 상례였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갈라져 나간 카푸친회는 성 프란체스코의 이상을 가장 성공적으로 지켜나갔으나 그들 가운데서도 일정한 정도의 완화조치는 인정될 수밖에 없었다.
2.대표적 수도회
1.씨토회
씨토 수도회는 베네딕투스 수도회 본래의 엄격하고 순수한 규칙을 지키고 싶어했던 몰렘의 수도원장과 소수의 수도사들에 의해서 1098년 부르군디의 씨토에 설립되었다. 그들은 작은 교회와 여러 개의 초막을 짓고 고생을 해 가며 스스로 옷을 지어 입고 노동을 하며 예배와 수도 생활을 하였다. 이 수도회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앞에서 언급한 베르나르이다.
2.갈멜산 수도회
이 수도회는 십자군 시대에 이탈리아에 잔류한 병사들이 모여서 이룬 수도회이다. 설립자는 베르톨드(Berthold)인데 그는 옛날 엘리야가 살았던 팔레스틴 해안의 갈멜산에 수도원을 세웠다. 이 계통의 수도원은 유럽 각국에서 번창하였다.
3.어거스틴 수도회
이 수도회는 이탈리아의 몇 개의 은둔자 단체를 병합하여 설립되었다. 이 수도회는 중세기 말에 큰 세력을 이루었는데 루터가 들어간 수도원도 이 수도회에 속한 것이었다.
4.프란체스코 수도회
이 수도회는 프란체스코(Francesco, 1182-1226년)에 의해 설립되었다. 프란체스코는 아탈리아의 앗시시에서 태어났는데 젊은 날에는 방탕생활을 하였고 당시 서민층과 귀족층 사이에 충돌이 자주 있을 때 서민층을 옹호하였으며 페루기아 전쟁에서 포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전쟁을 거치면서 부귀와 명예와 모든 인간 삶의 가치들이 다 자신에게 무용지물이요 인간 삶 자체가 고통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다른 한편 그는 길거리의 병자들과 빈민굴의 가난한 자들을 볼 때 한편으로는 증오를 한편으로는 가지게 되었다. 어느날 그가 로마를 순례할 때 '하나님의 무너진 집을 다시 세우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즉시 집으로 가서 아버지의 포목상 창고에서 물건을 훔쳐다가 아시시 근처에 있는 성 다미안 교회를 재건하였다. 그 일로 그는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고 2년간의 유리걸식에 나섰다. 그때 그는 맨발로 다녔으며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위로하고 보살폈다.
1208년 프란체스코는 마태복음 10:7-14을 읽다가 감동을 받아 사도적 청빈과 전도 생활을 실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주는 대로 먹으며 회개와 천국의 도래(到來)를 외치고 가난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려고 애썼다. 그는 철저하게 가난한 생활을 견지하며 자기를 따르는 모든 형제들에게 손으로 수고하여 일하게 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삯을 받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수입 중 그날 그날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는 전도와 봉사와 금욕 생활에 너무 힘을 쓴 나머지 건강을 잃게 되었고 말년에 조용한 산중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사랑과 절대 청빈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는 단체였다. 그들은 둘씩 나아가 전도하며 노래하고 농민들을 도우며 나환자와 버림받은 자들을 돌보았다. 그들은 전도와 청빈과 봉사를 신앙 원리로 삼고 일하면서 점차 단원을 늘려갔는데 처음에는 [소(小)형제단] 또는 [앗시시의 참회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1216년에는 [겸손한 형제들]이라 칭했다. 이 수도회는 인노센트 3세에게 정식으로 공인받고 급속히 성장하였는데 1221년에는 수도사의 숫자가 3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새로운 규칙을 제정하였는데 탁발이 첫째 원칙이고 둘째 원칙은 전도였다. 1219년에는 지방마다 조직을 만들어 목사를 두었다.
또한 프란체스코의 처음 뜻과는 달리 이 수도원에서는 학문을 가르칠 뿐 아니라 그 세력을 대학에 심는데 힘을 썼다. 이것은 프란체스코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평민들 속에서 구원 사업을 하기를 원했다. 1224년에는 프란체스코의 제자인 클라라를 지도자로 하는 부인 수도회가 설립되어 교황의 비준을 받았고 이 역시 청빈과 공동 생활에 힘썼으며 엄격한 규율 속에서도 크게 발전하였다.
프란체스코의 수도원은 그가 살던 당시에 이미 그의 뜻에서 벗어나 많이 변질되었다. 그러다가 그가 죽은 후 몇 십 년 동안 수도회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이 일어나 수도회는 결국 엄수(嚴守)파와 수도(修道)파로 갈라지고 말았다. 엄수파는 프란체스코의 근본 정신을 엄격히 따르는 파이고 수도파는 프란체스코의 절대적인 빈곤생활에 대한 엄격한 규율을 다소 완화하여 다만 수도원에 머물며 수도 생활만 하면 생활은 그다지 따지지 않는 파였다. 교황은 이 수도파를 지지하였고 이 파는 훗날 크고 유력한 프란체스코 수도회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 수도회는 프란체스코의 이상에서 벗어나 고등학문을 숭상하고 선교사 후보생들을 뽑아 외국어를 가르쳤기 때문에 중세 교회의 강력한 선교기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 전역에 복음을 전했으며 훗날 남으로는 모로코, 동으로는 중국, 서로는 북미 남미 대륙으로까지 전도하게 되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대륙과 영국에 큰 세력을 얻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영국의 탁월한 학자 대부분이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속한 사람일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이 수도원도 다른 수도원들과 같이 처음의 경건한 상태는 없어지고 명예와 재물로 인해 규율이 문란해지고 말았다.
5.도미니코 수도회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함께 유명한 수도회가 도미니쿠스(Dominicus, 1170-1221년)에 의해 창설된 도미니코 수도회이다. 도미니쿠스는 스페인의 칼라로가에서 태어났으며 팔렌시아에서 공부했고 그곳 감독 디에고의 은총을 입어 어거스틴 교단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이슬람교와 이단을 교화시키는데 열심을 가졌다. 그러나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복음을 변증하는데 무력했다. 그는 결국 1215년에 그의 친구가 기증한 집을 수리하여 독자적인 신앙과 생활을 전개하였고 이것이 도미니코 수도원의 시초가 되었다. 그들은 꾸준한 전도와 사도적 청빈 생활을 하였거 교황은 호노리우스는 도미니코가 주도하는 그 단체를 수도원으로 인정하였다.
그들은 설교도 하고 이를 실천하며 구걸도 하였기 때문에 탁발 수도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들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 아니었고 다만 수도원에 은둔하여 조용히 그리스도를 섬기며 살고자 했으나 곧 분주한 상황 속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것은 이 수도회의 성장이 매우 빨랐고 많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왔기 때문이다. 도미니코는 수도사들을 전도를 위해 각 지역으로 파송했는데 그가 죽을 무렵 이미 이 수도회 소속 수도원이 여덟 지역에 세워졌으며 나중에 60개가 되었다.
니코 수도회는 가난을 맹세했기 때문에 탁발수도회(mendicant order)가 되었는데 그 의미는 '구걸하는 수도사의 단체'이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오래지 않아 학문의 전당으로 이름을 얻게 되었다. 대학 도시들이 특히 그들의 활동 무대였는데 도미니코 수도사들은 서 유럽의 모든 중심적 대학에서 교수로서 가르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그들은 이단을 뿌리 뽑기 위해 교회의 종교 재판을 조종하며 주도하였다. 이 수도회 소속의 수도사들은 중세의 가장 충성스런 형벌 집행자였다.
탁발수도회원들은 당시 사회의 신앙 생활과 일반 생활의 몇몇 분야 특히 대학과 학문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민중의 벗이 되어 일반 민중의 고백을 듣고 민중이 알아듣기 쉬운 언어를 사용하는 등 가장 서민적인 전도 방법을 사용했다. 그들은 매우 서민적이어서 어떤 환경 아래서도 구애받지 않고 전도했으며 음식은 감사히 받았으나 돈을 받는 것은 거절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영혼을 마귀로부터 건지고 생활의 염려에서 건지는 일에 매진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것을 자비가 아니라 의무로 생각하고 성직자들의 생활을 개혁할 것을 강조했다.
이들은 대학에 큰 세력을 뻗쳐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대학이 있는 도시에 교회를 세워 대학 교수들을 그 세력 아래 두었고, 점점 그 세력을 대학 안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13세기 나타나는 유명한 학자 대부분이 탁발수도회 소속의 수도사들이었다.
탁발수도회들의 가장 탁월한 업적은 선교사업이었다. 1219년 프란체스코 자신이 탁발 수사들을 스페인, 헝가리, 아시아에 파송하였고 도미니코 수도회도 그 활동 영역을 프로방스 밖으로 넓혔다. 이 두 수도회는 모두 사라센족과 그밖의 이민족들의 개종을 도모하기 위해 각 대학에서 동양 언어를 연구하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7.중세 교회의 예배 형태와 생활상
중세 교회의 예배는 설교보다 의식과 예전을 중시하였는데 갈수록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이것은 교회의 타락과 형식화의 결과였다. 서유럽 각국의 교회들에서 예배 때 사용되는 용어는 당시 이미 사어(死語)가 된 라틴어였다. 성경 낭독도 라틴어로 했고 설교도 성직자와 학생들을 상대로 한 라틴어 설교였다. 따라서 일반 신자들은 설교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예배는 자연히 귀로 듣는 말보다는 눈으로 보는 형식을 더 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 중세의 성직자들은 대개 지식 정도가 매우 낮아 설교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설교는 길지 않았으며 기독교의 복음 진리를 설명하기보다는 생활에 필요한 도덕 윤리를 강론하였다. 성자들의 이야기를 자주 했으며 옛날 설교집을 참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세 교회에 사용되는 예전(禮典)은 그 종류가 다양하였으나 피터 롬바르드(1110-1161년)는 7가지로 정하였으며 1439년 프로렌스 대회의에서 이를 공인하였다. 7가지 성례전이란 세례, 견신(堅信), 성찬, 고해(告解), 혼배(婚配), 종부(終傅), 서품(敍品)이다.
여기서 세례는 몸에 물을 뿌리거나 침례의 형식을 통해 입교를 증거하는 의식이었고, 견신은 세례자의 신앙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기름 부음을 받는 형식으로 성령을 받게 하는 의식이었다. 성찬은 7가지 성례전의 중심이 되는 것으로서 그 의미에 대해서는 화체(化體)설이 통용되었다. 이 용어는 2세기 초부터 사용되었는데 피터 롬바르드가 분명한 형식으로 교리화했다. 그는 말하기를 "떡은 그리스도의 살로, 포도주는 그의 피로 변화하기 때문에 떡을 나눌 때나 포도주를 나눌 때에는 그리스도의 몸 전부가 제단 위에 임재(臨在)하신다"고 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로마 카톨릭교회의 신앙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이밖에도 고해는 죄를 신부에게 참회하고 고백함으로써 신부로부터 죄를 사함 받는 예식이고, 혼배는 교회가 합법으로 인정하는 결혼을 공표하는 예식으로서 신성시하였다. 종부는 초대 교회 이래로 시행되어 왔는데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며 병 낫기를 기도하는 의식이었다. 이러한 기름은 병자의 영혼을 도와주며 몸을 돕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12세기부터 종부는 주로 죽음에 임하는 준비로서 해석되었다. 신품이란 영혼에 인(印)을 쳐서 성직에 임명하는 예식이었다.
이 일곱 가지 성례 중에서 세례, 견신, 신품은 일생에 오직 한 번만 받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예식들은 영혼에 사라지지 않는 인(印)을 치는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교회에는 고질화된 풍습 중 하나는 성자 숭배였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풍습인데 중세에 와서 그 정도가 점점 심해졌다. 죽은 자에게 성자의 칭호를 주는 풍습은 800년부터 900년 사이에 일어났는데 십자군 운동은 이러한 풍습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원래 동방에서 주로 행해지던 이 풍습은 서방으로도 전파되었다. 이 문제는 스콜라 철학자들의 토론 주제가 되었는데, 아퀴나스는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는 예배(Lattria), 성자에게는 숭배(Dulia), 성모에게는 최고 숭배(Hyperdulia)를 바쳐야 한다"고 했다.
회개의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선행을 힘쓰는 것은 오래된 풍습인데 중세에 와서는 어떤 종류의 선행을 한 사람은 죄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교회가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감독이 그것을 공포했으나 나중에는 교황이 대규모로 이를 공포하게 되었다. 이것이 면죄부(免罪符)의 시초였다. 처음에는 죄의 사면을 받기 위해서는 통회 자복이 우선적인 조건이었으나 나중에 그것은 허식에 지나지 않게 되고 오직 죄의 사면은 헌금과 선행에 의해 얻어지는 것으로 믿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스콜라 철학자들은 공덕축적설(功道德蓄積說 ; Theory of Merits)이라는 교리를 만들어내었다. 이것은 아퀴나스에 의해 완성된 이론인데 내용인즉 그리스도의 희생을 비롯한 여러 성자와 선인들이 행한 공덕들은 쌓이고 쌓여서 교회 안에 보존되는데 교황은 그 권위로서 이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미사(Missa, Mass)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 또는 죽은 후 연옥에서 고생하는 사람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다. 죽은 자를 위해 행하는 미사는 일종의 공양(供養)과 같은 것이었다. 하나의 미사를 위해서는 하나의 제단이 필요하고 그것을 집행할 한 명의 사제가 필요하므로 큰 교회에는 많은 제단과 많은 사제들이 있게 되었고 미사는 그러한 사제들의 주요 수입 원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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