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다음에는 믿음의 문제가 따른다. 우선 로마서 6:6의 표현을 주목하여 보라.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못 박혔다는 말은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 우리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끝났다. 우리가 이 사실을 확실히 안다면 다음으로 할 일은 무엇인가? 본문을 보자.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이 말씀은 6절 말씀에 따르는 연속적 말씀이다. 그 두 구절을 함께 읽어 보자. " 너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면 우리는 그 다음 단계로 그것을 정말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먼저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은 자로 알아야 한다. 이 아는 지식의 바탕 위에 정말로 자기를 죽은 자로 여기는 믿음이 더해져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음의 바탕에 사실을 참으로 아는 영적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만일 [알거니와]가 없이 [여길지어다]가 되면 그 믿음은 공중에 떠 있는 가공적, 미신적 믿음에 지나지 않게 된다. 믿음에는 기초와 토대가 있어야 한다. 사실 믿음이라고 하지만 믿음이란 확실한 빛을 보게 되면 거의 저절로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알 때 자연히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우리는 여기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은 종종 알지 못한 채 믿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믿으려고 하는 사실에 대해 성령께서 주신 분명한 빛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믿으려 하니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다. 유혹이 오고 육체의 격동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스스로 '나는 죽었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음을 믿는다' 라고 미친 듯이 외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아무리 힘을 써서 믿으려 해도 믿어지지도 않고 또 믿음을 발하는데도 자기 믿는대로 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로마서 6:11이 말하는 것은 단지 이론일 뿐이야. 아무리 내가 죽었다고 간주해도 되지를 않아' 라고 하며 말씀을 의심한다. 우리는 로마서 6:11은 6:6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지 못한 채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아무리 외쳐도 사탄은 그것을 알고 있으며 승리는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참으로 믿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계시가 반드시 필요하다.
마11:25-27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엡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주님을 믿고 그 안에서 승리하는 이 일에는 억지가 없으며 억지가 있을 수도 없다. 내가 자신을 죽었다고 간주한다고 해서 죽지도 않은 내가 죽을 수도 없는 것이며 죽지 않았다고 간주한다고 해서 죽은 내가 살아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이루신 일 그대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실제로 죽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는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믿고 간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간주는 죽음을 향한 간주가 아니라 죽음으로부터의 간주이다.
第二 단계 : "이와 같이 여길지어다"
여긴다(看做)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헬라어에서 이 말은 ՋՏՃԿՆՏՌՁՉ(logizomai)라는 말로 되어 있는데 이 말은 계산하다 셈하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사람이 하는 일은 대개 정확하지 못하고 대략적이다. 그러나 수학적 계산은 사람이 하지만 정확한 것이다. 하나에 하나를 보태면 둘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 천사가 하나 사람이 하나 마찬가지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셈은 정확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라고 말씀하실 때 여긴다는 것은 그렇게 셈하라는 것이다. 정말 죽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셈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죽지도 않은 것을 죽었다고 계산하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계산은 희망 섞인 바램과는 다르다. 죽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죽었는지 안죽었는지 모르지만 죽었다고 치자는 식으로 믿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실제로 죽었기 때문에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지 우리가 간주하는 동안에 죽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너희도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 라는 말씀이 말하는 바는 우리가 이미 죽었으니 그것을 알고 그대로 붙잡으라는 것이다. 죽기를 희망하면 죽은 자로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것 말고 또 하나 강조되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죽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모든 것이 사실이다. 죽음도 부활도 승리도 다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루 종일 자기 자신만 쳐다보며 거기서 죽음과 승리를 찾으려 한다면 그는 실패할 것이다. 우리 안에는 죽음이 없다. 도리어 여전히 펄펄 살아있는 혈기밖에 찾지 못할 것이다. 죽음의 원천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나의 죽음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지 않는 사람, 그의 생명으로 살지 않는 사람, 종일 그리스도를 붙잡고 있지 않는 사람은 죽음도, 승리도 실제로 경험할 수 없다.
믿음과 여김
로마서의 큰 주제 중 하나가 믿음이다. 믿음이란 말이 여러 군데서 사용되고 있다. 로마서 6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여긴다는 말은 믿음과 같은 말로 그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를 내가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은 언제나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일에 토대를 두고 있다. 히브리서 11장에서와 같이 믿음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측면에서는 미래의 일과 관련을 가지게 되지만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미래와 관련하여 주로 쓰는 용어는 소망이라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어디까지나 뒤를 돌아보는데 쓰이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막11:24에는 믿음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나온다.
막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벌써) [받은] 줄로 여기라는 것이다. [받을지도 모른다]든지 [받을 것 같다]든지 심지어는 [받을] 줄로 여기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받은] 줄로 여기라는 말이다. 그것만이 참 믿음이다. 그렇게 할 때만 실제로 받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참으로(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것은 틀림없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무엇을 구하여 받는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따지면 분명히 미래적인 일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과거와 관련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받은 것처럼 여기는 것이 믿음이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할 수 있다"든지 "하나님은 하실지도 모른다"든지 "하나님은 하셔야만 한다"든지 혹은 "하나님은 하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 믿음은 항상 "하나님이 이미 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그 죽음을 경험하려면 더 이상 하나님께 나를 죽여달라고 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믿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을 해야 할 것이다.
믿음에 도전이 되는 유혹과 실패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처리하신 한 방향과 죄인인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처리하신 또 하나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을 우리가 알고 그리고 사실로 간주한다(믿는다)면 우리는 승리의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를 순탄하게 믿음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생각해야 할 문제는 마귀의 유혹이다. 우리가 진리(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를 깨닫고 믿는데도 우리 안에는 우리 옛 사람이 여전히 살아서 나를 유혹하는 것을 느낀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더구나 우리가 알면서도 그 유혹에 넘어가서 여전히 죄를 범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으로 인해 빛도 믿음도 다 무위로 돌아가는가?
마귀의 주요 목표 중의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를 가만 놓아두지 않고 흔든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이루어진 모든 사역과 승리는 명백한 것이지만 마귀는 언제나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혹은 그것이 불확실하며 환상적인 것에 불과한 것처럼 우리를 속인다. 그는 첫 사람에게도 그렇게 속였다.(창3:4)
성령의 빛으로 인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깨닫고 그렇게 믿으면 사탄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한다 "네 마음 가운데 생기는 혼란은 무엇이냐? 네 안에서 생기는 욕망은 무엇이냐? 너는 죽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무엇이라고 답해야 하겠는가? 결정적인 믿음은 이때 발휘되어야 한다. 이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확증된 영적 사실을 믿을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속에서 떠오르는 정함 없는 생각과 느낌을 믿을 것인지 성령께서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비추신 빛을 믿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마귀가 하는 공작은 두 방면에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우리가 아는 바를 의심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를 정확하게(제대로) 알지 못하고 부정확하게 알아서 헛 것을 붙잡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우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우리가 붙잡고 있는 진리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재삼 재사 확인하고 분명한 진리를 붙잡도록 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죄에서 해방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우리 속에 있는 죄성을 뿌리 뽑았다고 말씀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 안에 있는 본질로서의 죄성은 제거되지 않는다. 그렇게 간주하고 있다면 그것은 헛된 믿음이 될 것이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먹지 않고 자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 것과 같다. 죄는 근절된 것이 아니다. 죄는 여전히 거기에 그대로 있다. 그러므로 기회를 타면 우리를 주관하여 우리로 하여금 부지불식 간에 다시 범죄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는 보혈의 역사를 알고 있어야 하며 그것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범죄를 처리하시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방법은 單刀直入的이다. 즉 하나님은 보혈로 우리의 범죄를 기억에서 아주 지워버리신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성과 죄의 권능으로부터 해방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은 간접적이다. 하나님께서 제거하시는 것은 죄가 아니라 죄인이다. 우리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이 때문에 전에 죄의 종 노릇을 했던 몸은 무력하게 되었다(롬6:6) 몸의 옛 주인인 죄는 여전히 일하고(살아서 활동하고) 있지만 그를 섬기던 종은 죽임을 당해서 죄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죄의 입장에서 볼 때 몸은 실직한 것이다. 전에 도박을 하던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함으로 인해 더 이상 도박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죄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손은 실직한 것이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헛 맹세 하던 혀도 실직되었다. 지금은 이 지체들이 하나님께 의의 병기(롬6:13)로 드려져서 쓰이고 있다.
롬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죄인을 처리하신 결과는 [죄를 없애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권능으로부터의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롬6:7,11에 나오는 바 "죄에서 벗어나"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라는 두 표현은 죄가 우리 안에서 더 이상 역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역사하고 있지만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무용해졌기 때문에 죄의 세력이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아직도 여전히 실재하고 있는 죄의 능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죄는 여전히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살아 움직이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죄의 능력과 권세로부터 자유하는 것이다.
이 해방은 대단히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에 요한은 다음과 같은 대담한 말을 했다.
요일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 말씀은 잘못 이해하기 쉬운 말씀이다. 요한이 여기서 말한 것은 죄가 세상에 다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든지 혹은 그리스도인은 다시 결코 범죄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로 난 자의 성품(생명) 안에는 죄 짓는 성질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거듭남으로 우리 안에 심어졌다. 그 성품 곧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새 생명은 죄를 범치 못하는 거룩한 생명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이 거룩한 성품(생명)이 있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우리가 여전히 육신 곧 죄의 몸을 가지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영 안의 생명과 육신은 둘 다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거룩한 새 생명이 있어서 우리는 죄를 범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이고 한편으로 아담으로부터 받은 육적 생명이 우리 안에 여전히 있기 때문에 틈만 생기면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이다. 마귀는 우리가 영을 좇지 않고 육을 좇아 행하려 할 때 즉시 기회를 얻어서 우리로 하여금 범죄하게 만든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듯이 육적 생명으로 행하여 거듭 범죄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좇아 살므로 거룩한 삶을 살든지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은 믿는 자 안에서 승리의 삶을 가져다 준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루신 모든 사실을 참으로 믿어야만 현실 속에서 참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 없이는 아무 것도 안된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고후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히11:1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정의해 주고 있는 말씀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다. 실상이란 말에는 [實際化한다] 혹은 [實證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실체화 또는 구체화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눈은 사물의 모습을 내 안으로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귀는 사물의 소리를 내 안으로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이때 눈이나 귀는 나에게 사물을 실체화하는 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물들의 색깔과 모습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감각하든지 못하든지 말이다. 그러나 눈이 있음으로 인해 그것이 내 안에서 실제로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눈은 나에게 있어서 실증 혹은 실제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내가 소경이라면 사물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든지 안하든지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하고 있는 영적 세계를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기관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적 감각 기관이나 머리로 그것을 경험할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세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 놓으신 모든 것을 실증하고 실제화할 수 있는 기관(기능)이 바로 믿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경험하고 고백한 말씀들을 들었다. 예를 들어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이라는 롬6:6을 읽었다 하자. 이것은 당연히 사실인가? 적어도 믿는 자에게는 그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말씀을 의심이나 분명한 빛이 없이 단지 머리로만 이해한 사람에게 그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객관적으로 어떤 일이 실재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이 다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문제가 안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그 사실들이 정말 사실이 되며 경험되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와 배치되는 말과 사상, 느낌과 경험은 다 거짓이다. 그것은 다 마귀에게서 나온 거짓말이다. 어떤 사람이 질병으로 여러 날 고생하다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신유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고쳐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몸이 곧 나을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낫지는 않고 오히려 몸이 더 아파졌다. 그때 마귀가 그에게 와서 말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어디 있느냐? 너의 믿음은 어디 있느냐? 네가 드린 기도는 어떻게 되었느냐? 하나님은 너를 낫게 할 수 없다." 그때 그는 다시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마음이 답답할 뿐이었다. 그때 그의 마음 속에 다음의 말씀이 떠 올랐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그는 생각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면 이 모든 증상은 다 무엇인가? 결국 이 증상들은 마귀에게서 온 일시적인 증상이요 거짓임에 틀림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 그는 마귀에게 선언했다."이 두통과 불면증과 고열, 숨가쁜 증상은 다 거짓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치료하신 것만이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그런 후 그는 5분만에 깊은 잠에 빠졌으며 다음날 아침 깨었을 때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
정교한 거짓말쟁이는 거짓을 말로만 할 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한다. 마귀는 말로만 거짓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기 위하여 거짓 표적을 행하며 감정과 경험에 호소하기도 한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생명의 길로 행하지 않고 육신의 존재를 지나치게 생각하며 거기에 매이도록 하기 위해 각종의 수단을 사용할 것이다. 우리는 물론 육신의 실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성령(영) 안에 있는 우리에게 무력하다. 사탄도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공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을 대하여서는 살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하는데 집중된다. 그는 매일 매일의 체험을 들어 우리는 전혀 죽지 않았고 여전히 생생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덤벼든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믿느냐 아니면 경험과 느낌을 동원하여 우리를 속이는 마귀의 거짓말을 믿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느끼고 있어도 그것은 사실이고 느끼지 못하고 있어도 그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이다.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나의 체험이 그것을 입증하든지 부정하든지 사실은 변치 않는다. 내가 그 사실 위에 확고히 서 있는 동안 사탄은 나를 절대로 이길 수가 없다. 사탄이 공격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믿음이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한다면 결국 사탄은 우리를 그의 권세(죄의 권세) 아래로 끌고 가서 계속 범죄하며 육신의 종 노릇을 하도록 만들고 말 것이다.
고후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
여러분은 사실과 믿음과 경험에 대해 이런 예화가 있다. [사실]과 [믿음]과 [경험]이 어느날 담벼락 위로 걷고 있었다. 이때 [사실]은 좌우로 몸을 돌리지도 않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앞으로만 걸어갔다. [믿음]은 [사실]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처음에 [믿음]은 그의 눈을 다른데로 돌리지 않고 오직 [사실]에만 집중했고 그러는 동안에는 모두 무사하였다. 그런데 한참 가다가 [믿음]이 자기 뒤에 따라 오는 경험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는 경험이 자기를 잘 따라오는지 어떤지를 보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믿음]은 즉시 균형을 잃고 담벽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그를 따라 오던 늙고 가련한 [경험]도 그를 뒤이어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모든 유혹은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쳐다보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 보거나 눈에 보이는 현실만 들여다보는데서 온다. 믿음의 主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데(히12:2) 주님으로부터 눈을 돌려 마귀가 제시하는 바깥의 모습을 들여다 보는 순간 실패하는 것이다.
히12:2상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만일 우리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하여 감각에 호소한다면 사탄은 우리의 감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 거짓 작용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배치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히 배격하며 쳐다보지도 믿지도 말고 오직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간다면 마귀가 우리의 환경이나 경험에 그 어떤 기만 술책을 편다 해도 그것은 다 무용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굳게 믿으면 우리의 실제적인 경험도 점차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세계는 일순간에 우리에게 완전히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점진적으로 실제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가 믿는 바를 실제 경험 안에서는 조금밖에 체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이 자랄수록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많이 주관적이고 현실적인 경험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형제들이 그런 경험을 충만하게 하기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그리스도 안에 거함
성경은 우리를 [죽은 자]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죽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자기 속에서 죽음을 찾는 것은 헛 일이다. 우리 안에는 죽음이 없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요15:4의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라고 권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 안에 거하라(머물라)는 말씀이다. 성경에는 사람에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을 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 왜냐하면 사람을 그리스도 안으로 넣으시는 것은 하나님 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만 하나님이 넣으신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되는 것이다.
요일2:27,28상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모든 것은 우리 안에서 직접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구원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의 포괄적인 죽음과 포괄적인 부활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우리 개개인에게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시행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런 영적 경험도 체험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함께 살리심을 받았고, 함께 일으킴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심을 받고, 또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다고 말하고 있다.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
엡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골2: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우리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경험과 별도로 신자 개개인에게 그런 경험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된 모든 역사에 우리를 참여(포함)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다루실 때에 그리스도인을 함께 다루신다는 것이다. 머리를 다룰 때 하나님은 모든 지체를 함께 다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 스스로 영적 생명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신자가 누리는 참된 영적 경험은 그리스도와 별도로 무슨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역사와 그의 경험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그리스도와 그의 이루신 일을 보게 하실 때만 우리는 참된 영적 경험을 하게 된다. 모든 진정한 영적 경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떤 사실을 발견하고 그 사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특별한 경험을 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로부터 나지 않은 경험들은 결국 사라져 버릴 헛된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경험만이 의미가 있다. 믿음으로 그 안에 참여하는 것만이 참된 경험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나는 지난 1월 1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나는 지난 밤에 깊은 체험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다시 살리시는 것을 경험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이런 것이 주관적인 체험 가운데서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경험은 귀한 경험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경험에서 경험 자체를 중시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자기의 죽음을 발견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어떤 종류의 경험을 통해서] 그런 경험을 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지나치게 생각하면 위험한 것이다. 시간과 방법은 절대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경험하는 경험이 진정한 경험이라면 그 모든 경험은 그리스도가 2000년 전에 이루신 영원한 경험에 토대를 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경험은 그 영원한 경험을 어떤 식으로든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형제들이 경험하는 많은 경험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은혜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또 우리는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그들이 정말로 그리스도의 경험에 참여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떤 경험이든 그리스도의 경험을 넘어서거나 배치되는 경험은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진정한 경험도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것이 십자가의 경험이든 어떤 특별한 은혜와 능력이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개개인에게 직접 주시는 법이 없다. 하나님이 歷史(時間 세계) 안에서 하시는 모든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영원한 사실들을 실현하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歷史는 우리의 역사이며 그리스도의 경험은 바로 우리의 유일한 경험이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리는 것이다. 영생조차 그렇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요일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아들 안에만 넣어놓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귀가 와서 "너는 아무런 경험도 느낌도 가지지 못했는데 그리스도가 네게 무슨 소용이냐?"고 속삭일 때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스도 안에 넣으셨으므로 그리스도가 경험한 모든 사실이 다 내게도 사실이다. 나는 그 안에 계속 거하겠다." 이런 믿음의 태도는 그 어떤 신비적 경험을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사탄은 언제나 우리를 그리스도 밖으로 내 보내려고 하며 또 우리에게 있는 유혹과 실수와 어려운 환경을 들먹이며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속인다. 이런 사탄의 거짓말을 귀담아 들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심에 빠지고 만다. "만일 내가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런 상태에 놓여 있겠는가? 과연 나는 그리스도 밖에 있구나"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죄를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사는데 필수적인 요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만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 안으로 들어오셔서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능력, 부활의 능력(롬6:4,9,10)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의 사실들이 점진적으로 우리의 매일 경험 가운데서 사실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게"(롬6:6) 되며 죄와 사망으로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는 마귀(롬5:21)는 우리 안에서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롬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사실이 된 경험의 토대 위에 건실하게 서 있을 때는 그리스도께 사실이 된 모든 것이 우리 안에서도 사실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경험과 느낌의 토대 위에 서 있다면 우리는 옛 성품의 모든 현상이 여전히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볼 때 발견하는 것은 죄에 대하여 생생하게 살아 있고 절망적인 육적 자아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세계를 바라보게 되면 (비록 우리 안에 죄와 사망이 역사하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것으로 누리도록 역사하실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는 말씀에는 약속과 명령이 함께 들어 있다. "내 안에 거하라"는 것이 이루어지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는 것도 이루어진다. 문제는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인가? 않을 것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느냐? 않느냐?] 하는데 있다. 우리가 범사에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그 안에서 행하기를 힘쓴다면 그리스도는 자동적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는 순서대로이다. 바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만이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는 스스로 열매를 맺거나 그리스도의 열매를 우리에게로 접붙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뿐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우리 안에 이루시기를 시작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문제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거기 머물러 있는 것이다. 뒷걸음질쳐서 자기 옛 생명으로 살고자 하지만 않으면 되며 자기를 쳐다보지 않으면 된다. 마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것처럼 자신을 쳐다보지 말라.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자신을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아들 안에 넣으셨다는 사실 안에서 안식하고 또한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그 일을 우리 안에서도 이루시리라는 소망 가운데서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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