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로마서 8장에 이르렀다. 우리가 다루는 롬5:12-8:39의 주제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롬5:12-6:23 [아담 안에서] 對 [그리스도 안에서]
롬7: 1-8:39 [육 안에서] 對 [영 안에서]
이 네 사실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앞의 두 사실은 우리의 위치를 설명하는 것이고 뒤의 두 사실은 우리의 실제 삶에 있어서 행함의 원리를 말한 것이다. 또 앞에서 말한 것 중 첫째는 우리의 출생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우리의 과거 위치이고, 둘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얻은 현재의 위치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의 중요성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또한 [영 안에서](롬8:9) 행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로마서 8:1-16은 전적으로 성령을 좇아 사는 삶에 대한 말씀이다. 우리가 실제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부분을 알아야 한다.
육과 성령님
육은 아담과 연결되어 있고 성령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아담 안에 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하는 문제는 이제 해결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우리가 육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육으로 산다는 것은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삶의 원리이다. 육으로 사는 자는 무엇이든지 자기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한다. 옛 생명 곧 아담의 생명은 죄 짓는데 매우 적합하며 육적 욕망을 달성하는데 매우 민첩하다. 그 생명은 그런 일을 하는데 매우 자연스럽다. 마찬가지로 새 생명 곧 그리스도의 생명도 그런 자연스런 성질을 가지고 있다.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자동적인 원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 생명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섬길 만반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면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모두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지금은 옛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고 있다. 이 생명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구조 또는 원리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영(거듭난 생명)을 주장하시고 그 영은 우리 몸을 지배하여(주장하여)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성령으로 살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과 모순을 일으킬 것이다. 그런 사람의 경우 객관적인 사실과 실제가 서로 다른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즉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 실제 능력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열매를 거의 맺지 못하고 육의 무능함을 여전히 나타내는 결과를 빚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서 실제로 그를 주장할(役事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사실을 단순히 객관적으로 붙들고 있을 뿐 실제로는 성령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그 영적 사실이 그에게 실제 삶에서 구현이 안된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믿는 바를 실행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일에 직면했을 때 실제로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친히 역사해 주십시오" 하고 믿고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것이다. 다만 무엇을 친히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사는 것은 문제를 만났을 때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우리의 여러 문제들 예컨대 급한 성질과 더러운 생각들, 경솔하고 날카로운 혀와 같은 것들로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그것을 처리하려고 스스로 무슨 노력을 하는 것은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임을 믿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겸손과 온유함과 깨끗함을 나타내 달라고 구하는 것이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다.
출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우리가 성령으로 행한다면 우리 자신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놀라운 승리의 경험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들을 종종 한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그런 경험을 해야 정상인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적도 아니고 [별 일]도 아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모든 일을 수행하실 때 우리는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를 붙잡고 믿고 구하기만 하면 된다. 주님으로 말미암는 승리는 참으로 쉽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를 악물고 인내에 인내를 거듭하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의 경험이 드문 것은 그만큼 우리가 자기를 깊이 신뢰하고 있으며 반대로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탄의 유혹의 목표는 언제나 우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무슨 일을 하지 않고 스스로 무엇을 하게끔 하는 것이다. 열심 있는 신자를 향한 사탄의 유혹은 많은 경우에 그들로 하여금 어떤 더러운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식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어떤 일을 그들 자신의 힘으로 하도록 부추기는 식으로 나타난다.
중일전쟁 초기에 중국은 일본에게 크게 패하여 많은 전차(탱크)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일본군의 탱크와 맞설 수가 없게 되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중국의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탱크가 지나갈 때 복병이 탱크를 향해 총을 한 발 쏘고 얼마 지나 다시 한 발을 쏜다. 그리고 또 얼마가 지난 후 다시 한 발을 쏜다. 드디어 탱크병이 사격한 곳을 찾아내기 위해 탱크 밖으로 그의 머리를 내미는 순간 조심스럽게 겨누고 있던 다음 총알이 그의 머리를 날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탄도 우리를 어떤 답답하고 급한 궁지로 몰든지 아니면 의욕을 북돋우어 내가 스스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들게 하든지 어쨌든 우리로 성령 안에 머물지 못하도록 자꾸 유혹하며 불러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탄의 부추김을 받아 그리스도의 날개 아래서 나와 머리를 내민다면 사탄은 승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5:17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리고 자기가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것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의 욕망을 누르고 당신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두 존재가 우리 안에서 서로 삶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두 쪽을 다 지지할 수는 없다. 그런데 어느 한 쪽을 택하면 그 한편의 능력이 자동적으로 상대편의 능력과 싸워 이기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전적으로 우리가 택한 그 능력만 역사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육체를 따라 행하기로 마음먹으면 우리는 가만 내버려두어도 몸이 성령을 거스리고 오직 육적 소욕을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기로 마음먹으면 우리는 스스로 육체의 욕구를 누르려고 애쓰지 않더라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육체의 욕구를 누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권한다.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어진 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한 것이지만 성령님이 주어진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구원을 나타내고 누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의 기초라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신 그리스도는 그 구원의 능력이다.
우리의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는 바울의 환호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갈라디아서 2:20의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산다. 삶의 주체가 바뀐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우리는 우리 인격과 생활에서 변화를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변화]가 아니라 [교체] 혹은 [대체]된 것이다. 우리가 변화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전히 죄인 그대로이며 죄의 몸, 사망의 몸을 입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신 것은 우리를 빼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를 넣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가 아니라 교체인 것이다. 믿는 자 안에서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생명을 나타내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확장이요 충만이다. 그리스도의 再現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재현되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심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중생과는 다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님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심으신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심어진 생명이 우리 안에서 점점 자라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갈라디아 교회 형제들을 위하여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 있는 어떤 문제로 인해 하나님께 해결을 구하며 기도한다. 그때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우리가 자주 화를 내고 혈기를 부리는 사람이라고 하면 우리는 인내를 달라거나 혹은 어떻게든 성질을 죽일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도의 응답을 받아본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가 구해도 하나님께서 묵묵부답인 것은 그 기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을 혈기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달라고 구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을 구한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은 그 자체가 혈기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의 성질로만 말할 것 같으면 죽지 않는 한 혈기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교만과 정욕과 미움을 없애고 겸손과 거룩과 사랑을 심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몸(생명)의 성질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그렇게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넣으시고 그로 우리 생명을 대신하여 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바로 이것을 구하여야 하는 것이다. 혈기를 죽여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아들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온유함을 나타내게 되도록 해달라고 구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겸손이나 인내심이나 거룩이나 사람을 따로 따로 선물처럼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시는 분이 아니다. 그렇게 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든 면에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바꾸거나 수선하거나 채워서 온전하게 하려 하시지 않는다. 오직 폐기하실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이루시기 위해 오직 유일한 선물 곧 그리스도 예수를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는 우리 대신 겸손과 사랑과 인내와 능력과 기타 우리의 모든 필요가 되시는 것이다.
골2:2,3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요일5:11,12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아들 안에서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膳物(德-열매)과 그리스도 자신은 별개의 것이다. 즉 [온유]가 곧 [그리스도]인 것도 아니고 [사랑]이 곧 [그리스도]인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는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 등을 갈망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 하나 별도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1:30)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조금 좋아지면 거룩이 이루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룩이 아니다. 단지 거룩의 열매일 따름이다. 참 거룩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가 바로 거룩이다. 그러므로 거룩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성령의 열매도 마찬가지다. 사랑 따로, 화평 따로, 우리 필요한대로 하나님께 얻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고 그 성령이 우리에게서 어떨 때는 사랑의 영으로 어떨 때는 화평케 하는 영으로 이렇게 저렇게 역사하실 따름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열매를 원하되 그리스도 자신은 별로 원치 않는다면 그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되려고 애 쓸 필요도 없고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애 쓸 필요도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것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애 써서 하나님의 뜻에 따른 그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다가 안되면 심지어 불법을 쓰기도 한다. 웃사는 하나님의 궤가 수레에서 미끌어져 떨어지려고 할 때 그것을 손으로 잡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죽고 말았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쓴다. 누가 우리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했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을 듣는 것이다. 그 안에 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다 하신다. 그러나 인생에게는 이것이 어려운 일이다. 사람이 죽은 시체가 아닌 이상 자기를 이렇게까지 낮추고 오직 믿음으로만 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든 어렵든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만이 우리의 낮고 천한 몸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장은 성령 안에서의 생활의 적극적인 면을 설명하는 장이다.
바울은 빌4:13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롬8:8의 말씀과 꼭 같은 말이다.
롬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이미 살펴온 바와 같이 우리가 육신에 대해 죽은 자가 되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도 해방된다. 이때 우리 안에는 우리를 지배하던 죄와 사망의 법 대신 새로운 법이 등장하여 우리를 주장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여기서 죄와 죄의 법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야 한다. 죄는 하나의 현상이다. 그러면 죄의 법이란 무엇인가? 現象(事實)과 法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현상(사실)이란 어떤 일이 단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법이란 그런 일이 (거의) 예외 없이 계속해서 일어난다고 할 때 그 속에 작용하고 있는 어떤 원리 혹은 힘을 가리킨다. 가장 간단히 말하면 [사실의 연속]이 [법]이다. 인력(중력)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땅 속에서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무엇을 놓으면 밑으로 떨어진다는 법이다. 이것이 법인 이유는 언제나 그렇기 때문이다. 공기보다 무거운 것을 놓으면 땅에 떨어진다는 현상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법인 것이다.
죄의 법도 그와 같은 것이다. 내가 죄를 짓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변함없는 나의 성질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그런 원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의 법이라는 한 법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 법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짓고 싶을 때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원치 않아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 사망의 법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법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대해 무능하며 약하다. 그것은 사망의 능력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법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죄로부터의 해방이나 사망으로부터의 해방 뿐 아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어떻게 이 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 그것은 그 법보다 우선하는 다른 법 또는 그 법보다 강한 다른 법의 지배를 받게 될 때 가능하다. 예를 들어 인력 현상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만유 인력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면 인력을 피할 수 있다. 비행기는 나는 동안에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나는 힘이 인력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이때 인력이 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힘이 당기는 힘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인력의 법에서 해방받는 것이다. 또 우리는 땅에 묻은 씨가 어느 때 단단한 흙을 뚫고 위로 치솟아 올라오는 것을 본다. 이것은 분명히 인력의 법을 이기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가?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작용 때문이다. 그 생명의 법은 언제나 나무로 하여금 인력의 법을 이기고 (아래로가 아니라) 위로 올라가게 만든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것은 우리 안에 한 다른 법을 개입시킴으로써이다. 죄와 사망의 법은 사람이 존재하는 한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개입시키시고 그것이 우리에게 작용하도록 만드심으로써 우리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실질적으로 해방받을 수 있게 하셨다. 만일 우리가 성령께 복종하며 생명을 좇아 행한다면 우리는 아무리 죄와 사망의 법이 강하다 할지라도 거기에 지배를 받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생명의 법 또는 성령의 법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 그것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생명 안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매우 자연스럽게 우리의 행할 바를 결정하고 시행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자연스러운가? 그것이 율법이나 기타의 법처럼 밖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명에서 작용하는 생명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본능 또는 반사신경과도 같이 자연스럽다. 그것은 가르치거나 묻거나 도와주어야 할 필요가 없이 역사한다. 우리는 눈을 정기적으로 깜박거린다. 그것은 항상 눈을 촉촉히 적시거나 눈의 먼지를 제거하기 위해 그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것은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적당히 깜박거려지게 되는 것이다. 생명의 법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하도록 믿는(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되든지 안되든지 그-주님의 생명-가 알아서 할 일이다. 생명의 역사에 있어서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없을 뿐 아니라 해서도 안된다. 만일 누구든지 의지를 발휘해서 하나님을 돕겠다고 나서거나 성령의 역사에 이렇게 저렇게 간섭하려 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고 두려운 일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믿지 못하고 억지로 잘해 보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다 생명의 작용을 막아 아무런 성령의 열매도 맺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성령님은 병든 어린 아이가 아니다. 우리가 그의 일을 불안하게 생각한다면 이는 얼마나 어리석고 불신앙적인 태도인지 알 수 없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성령께 모든 것을 맡기고 안식하는 것이며, 성령께서 우리 몸을 주장하시며 명하시는 바에 대해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 외에는 다 그에게 맡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새들에게 날 수 있는 생명을 주셨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엄청난 일이며 매우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새들은 잘 날아다니고 있다. 새들에게도 인력의 법칙이 적용되는데도 말이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법은 그 앞에 작용하고 있는 모든 다른 법을 이기고 무색하게 만든다. 날아 다니는 생명을 받으면 날아다닐 것이고 헤엄치는 생명을 받으면 헤엄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생명을 받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왜 그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는가? 우리의 육신의 생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또한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음도 믿어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를 잘 믿기 위해서는 많은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도 있다. 만일 그 교육이나 훈련이 성령 안에서 행하는 훈련, 믿음으로 행하는 훈련이라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럴 때는 이렇게 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하라는 식으로 율법적인 생활의 원칙들을 배워서 그대로 써먹으려 하는 훈련이라면 그런 학습과 훈련은 쓸데없는 일이며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믿음의 길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성령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가 우리를 인도하고 지도하는 대로 따르며 산다는 것이다. 생명의 법은 우리가 나갈 자리와 물러갈 자리를 정확하게 지시하며 말할 때와 그칠 때를 정확하게 지시하신다. 우리가 성령 안에 있는 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아무 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마10:20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머리 속에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억지로 거룩하고 품위 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애쓴다. 그것은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사람이 성령 안에서 행할 때 뿐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생명이 실력을 발휘할 때만 기뻐하신다. 사람이 그 육신의 생명으로 (선한 일이든 위대한 일이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은 모욕을 받으신다. 왜냐하면 그 일의 배후에 사탄이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어 일하라고 부추기기까지 한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성령의 지혜와 능력 대신 사람의 지혜와 능력을 내세워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아들의 생명이 자연스럽게 역사하여 (무슨 열매든지) 열매를 맺을 때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진실해야 하며 어떤 인위적인 것이나 위선적인 假裝이나 演劇이 있어서는 안된다.
第四 단계 : 성령을 좇아 행하라
롬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사실이 제시되어 있다. 하나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실' 사실이다. 육신은 약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는 육신을 좇아 행하는 사람 안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을 쓰셨다. 첫 번째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시고 그 "육신에 죄를 정하신" 것이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담에 속한 모든 옛 창조를 처치하신 것이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한 육신으로 말미암아 가지고 있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셨다. 그러나 율법의 요구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조치가 필요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두 번째 방법은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나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기만 하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 말이다. 첫째, 그것은 노력이 아니라 단지 행함이다.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전에 우리가 열매를 맺지도 못하면서 육신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쓰던 모든 노력은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골1:29)를 믿는 믿음에게 자리를 주고 안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5:19-22에서 우리 육신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해 놓고 있는데 만일 우리가 우리의 노력을 버리고 성령을 좇아 행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육신의 일이 성령의 열매로 대치될 것이다.
갈5:19-22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둘째, " 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육신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육신의 명령에 자기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롬8:5-8은 육신을 좇아 행할 때 사람이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가르쳐 준다. 육신을 좇아 행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과 싸우고 원수되는 길로 갈 뿐이라는 것이다.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성령께 복종하는 것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 할 수 없는 한 가지 일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는 일이다. 주님을 떠나서 그 말을 듣지 않을 자리로 간다면 그는 벌써 그리스도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의무는 성령께 복종하는 것이며 언제든지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서는 것이다. 삶의 주도권을 성령께 맡기고 철저히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는 성령 안에서 행하는 자가 아니다.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우리는 고후13:13에 있는 축도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모든 부요(富饒)가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 근원이다. 주 예수님의 은혜는 우리가 그 신령한 부요를 우리 것으로 얻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성령님의 교통하심은 우리를 위한 그 부요가 우리 안에서 실제로 누려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계획된 모든 것이 아들을 통해 실행되고 완성되었으며 성령님을 통해 전달되고 누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철저히 성령께 복종하고 그의 役事에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것 중에서 아무 것도 실제로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이 우리의 삶에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문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없는 것도 아니고 또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에게 생명이 있다 해도 실제로 자기를 부인하고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믿음으로 내맡기지 않는다는데 있다. 또 성령을 모시고 있으나 실제로 성령이 우리를 주장하고 인도하시도록 맡기지도 않고 그 음성에 복종하지도 않는다는데 있다. 우리 모두가 실제로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그리스도의 풍성을 실제로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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