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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몸과 그리스도

고린도전서 6:12-20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몸과 주님과의 관계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니라"(고전6:12)
이 말씀은 육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이기 때문에 육신에 대해서도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육신의 주인은 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육신이 영의 요구와 무관하게 본능적 욕구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도록 몸을 통제하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육신의 욕구가 나빠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아니다. 본래 하나님이 내신 모든 것은 아름답고 좋은 것이다.(딤전4:4) 먹고 마시고자 하는 욕구나 性的 욕구 등은 다 자연적이고 정당한 욕구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당하고 추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람에게 유익하다는 것은 아니다. 합당한 육체의 욕구라도 그것이 사람을 종으로 옭아매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도 사람이요 동물이므로 그 입장에서는 육신적인 필요에 따라 무엇이든지 자유로이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아들이라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그 어떤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필요하다면 하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유인이므로 무엇이든 영이 원치 않는 일은 비록 그것이 육신의 합당한 요구라 할지라도 들어주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자유를 누리는 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능히 먹고 마시며 즐길 수 있을 때도 다른 필요를 위해 얼마든지 그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해서 안될 일을 안하는 것은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을 안하는 것은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다. 바울은 몸이 자기에게 정당하게 요구하는 것조차 자기를 얽어매지 못하게 했다. 그는 오직 주님만이 자기 몸을 주장하시도록 했다. 그는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식물(음식)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한다는 것은 육신적 삶의 원리를 말한 것이다. 육신은 먹고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부득불 먹고 마시는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반드시 먹고 마시는 것에 온 힘을 쏟아야만 사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음식은 육신을 위하고 육신은 또 음식을 위하는 이 틀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영구한 틀이 아니다. 이것은 첫째, 오직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 한정된 방식이요, 둘째는 지금 땅에 사는 동안에라도 성령의 능력 안에서는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는 틀이다.

첫째, 하나님은 때가 이르면 음식과 육신을 다 폐하실 것이다. 우리가 지금 땅에서 입고 있는 이 몸은 영원한 몸이 아니다. 이것은 타락으로 인해 저주받은 몸이며 이 몸이 의지하고 있는 환경 즉 땅 또한 저주받은 땅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마에 땀이 흐르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에서 힘들게 살고 있다. 그러나 이 몸은 장차 썩어지고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장차 부활을 통해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몸을 입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걸맞은 온전한 몸을 입게 될 것이다.

둘째, 지금 땅에 있는 동안에도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이 죽을 몸, 약한 몸에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는다. 그래서 본래 육신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보다 훨씬 강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 죽을 몸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믿음으로' 즉 '성령의 능력을 의지함으로써' 이 약하고 썩어질 몸을 그야말로 썩어질 몸처럼 허무하게 쓰지 않고 마치 부활을 거친 영광스런 몸처럼 주님을 위해 영광스럽게 쓸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음행에 빠진 고린도교회의 타락한 신자들뿐 아니라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다 육신의 즐거움을 알고 있다. 우리도 다 먹고 마시는 것과 섹스와 기타 쾌락의 즐거움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이런 육신의 충동을 이기고 능히 하나님께 자기 몸을 바칠 수 있다. 이것이 능력이고 자유이다.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한다' 왜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항상 음란을 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바울은 먼저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먹고 마시는 일에서부터 '몸은 주를 위한다'는 사실을 나타내어야 한다.
첫 사람 아담의 실패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바로 먹는 문제에서였다. 그는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내는 생명과를 제쳐놓고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선악과에 미혹되었다. 그러한 인류의 실패를 회복하기 위해 오신 주님의 사역은 무엇으로부터 출발했는가? 당연히 광야에서 먹는 문제로 시험받는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주님 역시 바로 먹는 문제로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던 것이다. 주님은 그때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위한다'는 사실을 나타내셨으며 식물은 결코 자신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셨다.

그러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일을 도무지 벗어나지 못한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기어이 먹어야 하고 그것이 안될 때는 불안하고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게 되며 다른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처해 있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금식을 하며 먹고 마시는 일을 아주 멀리한다. 그들은 금식을 함으로써 자기 몸을 주님이 쓰실 수 있는 상태로 만들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면 쾌락을 추구하든지 금욕하든지 육체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수밖에 없다. 많은 경우에 금욕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영의 인도가 아니라 육체의 소욕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 몸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이 자기 용도로 쓰시기 위해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몸을 쾌락을 위해 쓰지 말아야 한다. 음식은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게 할 정도로만 추구하고 그 이상이 안되도록 해야 한다. 먹고 마시는 일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을 방해할 정도로 많은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잡아먹어서 우리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도록 해서는 안된다.

먹는 문제에 이어서 바울은 음란에 대해서 말했다. 음란은 몸을 더럽히는 죄이다. 몸을 더럽힌다는 것은 주님의 용도로 쓰여야 할 몸이 그 외의 다른 용도로 쓰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음란이란 결혼 밖의 방종한 성 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한 부부 간의 지나친 성적 관계도 포함하는 것이다. 몸은 주님을 위한 것이며 주님께 바쳐진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에서라 할지라도 지나친 성적 탐닉은 합당치 않다. 여기에는 무슨 세상적, 절대적, 객관적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가 탐닉이고 음행이며 어느 정도가 합당한 정도인지는 오직 자기 삶, 자기 몸에 주님이 얼마나 깊이 자리잡으시고 자기를 주장하시는지를 보면 된다. 먹는 것과 입는 것과 쾌락을 즐기는 것이 양적으로 그리 많지 않더라도 그런 일로 인해 주님이 자기 삶의 주변으로 밀려나 있고 관심 밖에 놓여 있다면 그의 삶은 주님으로부터 음란하고 방종한 삶으로 평가받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무엇이나 과도한 육신의 요소가 있는 것은 철저히 배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몸은 오직 주님 혼자만이 주장하실 수 있다. 왕궁에 사는 여러 여자들, 곧 왕비와 후궁들과 궁녀들은 다 오직 왕 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리 심심하더라도 다른 남자들을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단 하루 왕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라도 일생을 왕 외의 남자들을 가까이하지 않고 몸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 그들의 당연한 삶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미 내가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던 그 옛날의 사람이 아니다. 그러한 우리는 죽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거듭 태어났다. 그러므로 몸의 어느 부분이든지 나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서 그것을 사용할 수는 없다. 우리의 몸은 의의 도구로만 쓰여야 한다.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우리 신분에 맞지 않다. 몸과 영혼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따로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혼의 보전은 육신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누구든지 육신에 속한 모든 감각이나 행동, 음식과 언어에서 주님을 위한 성별을 이루지 못하고서는 완전히 주님을 섬길 수 없으며 온전한 거룩에 이를 수 없다.

"몸은 주를 위한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몸을 주님을 위해 올바르게 간수하고 관리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몸이 주님께 속해 있다고 해서 주님이 강제로 우리 몸을 빼앗아 쓰실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또는 우리를 통해서 온전히 일하실 수 있도록 스스로 몸을 주께 드리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병이나 신체의 허약, 또는 고난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자기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칠 것을 권유하신다. 이런 고난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채찍이며 징계이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 주님께 완전히 헌신하면 이런 사람들의 질병이나 고난은 중지되고 허약함도 보완된다. 하나님은 이런 징계를 통해서 육신은 주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징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주는 몸을 위한다'는 정말 놀라운 말씀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우리의 영과 혼을 위하시지 몸을 위하시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육신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아니며 아무런 영적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분명히 "주는 몸을 위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육신 문제를 주님과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는가? 그것은 주님의 구원이 죄에서의 구원이지 육신의 연약함이나 질병으로부터의 구원까지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적 질병만 주님으로부터 치유 받고자 하지 육신의 질병에 대해서는 주님께 치유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몸의 문제를 오직 인간적 방법을 따라서만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땅에 계실 때 많은 육신의 질병을 고치셨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주는 몸을 위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물론 주님의 목적이 오직 사람의 육신적 질병을 고치는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이 다 육신의 치료를 받았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주님의 육신적 치유 역사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육신도 분명히 주님의 구원 대상에 포함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구원의 일차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을 따름이다.

주님께서 육신적 치유 역사를 베푸신 궁극적인 목적은 물론 영혼을 건지는데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보다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그런 可視的 구원 역사를 통해서 사람들의 영혼을 건지시고자 했다. 그러나 영혼이 잘 되면 몸도 잘 되는 것이 순서이다. 몸도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구속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몸도 위하시는 분이다.  

"주는 몸을 위한다"는 말씀은 그 앞의 "몸은 주를 위한다"는 말씀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다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를 위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또한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사랑은 상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널리 계시지만 세상에서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자신(몸)을 드리는 사람에게서만 경험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합당한 인격 속에서만 경험될 수 있다. 이는 마치 비가 산이나 골짜기에 똑같이 내리지만 패인 곳에만 물이 고이는 것과 같고, 햇빛이 모든 곳에 다 비취지만 그것을 받아서 광합성 작용을 하는 구조를 가진 植物만이 그것으로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건강함을 누리기 원하시지만 오직 그를 사랑하며 헌신하는 사람들만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이와 같이 그런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생명(사랑)에 반응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미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해 바치셨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기 원한다면 자신의 몸을 온전히 주님을 위해 써야 한다. "주는 몸을 위한다"는 말은 우리의 헌신을 기초로 주님께서 우리 육신에 그의 생명과 능력을 부어 주신다는 뜻이다. 주님은 당신께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육신을 돌보심으로써 그들이 마음껏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보호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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