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결혼과 독신
바울은 고린도전서 6:15-20에서 그리스도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에게 그 몸을 바친 상태요 그와 한 몸으로 연합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의 몸을 다른 데다 바치거나 음행으로 그 몸을 더러운 데다 섞어서는(연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했다.
그보다 앞에서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라는 6:12 말씀을 통해, 자기 삶은 그리스도 외의 그 어떤 것에도 매여있지 않으며 따라서 그 어떤 것도 그의 몸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 진리 외의 그 어떤 것에도 자유하는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음행에 빠지게 하는 사탄의 시험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고 또한 사람(몸)이 그런 유혹으로 말미암아 음행에 빠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환경의 어려움과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환경과 인간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보다 더 큰 것 곧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기 때문에 육정(肉情)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유를 말하기 전에 6:11에서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그 죄에서 벗어나 거룩한 자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비로소 그는 죄로부터의 자유, 정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할 수 있었으며 또한 자기의 자유를 소개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마땅히 자유하는 삶을 살도록 권하고 명하게 된 것이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 곧 자유하는 생명, 거룩한 생명으로 인해 죄와 정욕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하고 또 그렇게 해야 함을 말했다.
그런데 7장에 들어오면서 바울은 이전에 고린도교회 형제들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던진 질문, 곧 '남자에게 있는 강한 정욕으로 인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에 두고서는 도무지 경건한 생활을 하기 힘드니 아예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자신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사실을 먼저 피력한다.
그러나 그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 너희 몸은 어떤 인간적 욕구에도 부응하지 말고 금욕적인 상태에서 하나님만 섬기라'고 말하지 않고 도리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말한다. 이것은 남자가 아예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만 연합하고 오직 하나님만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육신의 성질상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제도를 활용함으로써 하나님과 육신의 요구를 동시에 수용하는 편을 택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며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목적과 목표는 그리스도이다. 시편 기자가 노래했듯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우리의 복이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시73:23-28)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 외에 다른 것들을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 혹 여자나 친구나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를 가까이하다가 음녀처럼 주를 떠난 자가 될까 두렵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과연 남자가 여자를 멀리 한다고 해서 음행을 피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여자를 피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되며 음녀같이 주를 떠나는 삶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이미 드러났다. 육신의 욕망은 종종 연약한 자들을 극단적인 금욕 가운데서 더 큰 사탄의 시험을 불러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극적으로 여자를 피하는 태도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우리 육신의 욕망에 대해 대처할 필요가 있다.
적극적인 방법이란 곧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연약함을 감안하사 우리를 위하여 내신 길들을 취하는 것이다. 이성에 대한 끌림은 동물로서의 사람에게 있어서 일반적으로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내셔서 남녀가 그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으로 (육신적) 사랑을 나누게 하셨다. 이것을 취할 때 사람은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고서도 육신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합리적이며 무리하지 않고 순리적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 지으신 분이 아니라 우리 육체도 지으신 분이시며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우리 육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의 성정(性情)과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신다. 그러므로 하기 어려운 일을 억지로 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길을 내시고는 걸어가라고 말씀하신다. 결혼은 세상에 살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감안하사 허락하신 하나의 길이다. 이 길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는 몸의 약함을 딛고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세상에서만 존재하는 제도이다. 천국에서는 결혼이 필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변화된 몸, 완전한 몸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결혼하지 않고서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고 사랑하며 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육신이 연약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든지 정욕의 제한을 받지 않고 모든 형제들과 연합하며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육신의 제한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 남녀가 그 육신적 욕구를 어느 정도 만족시키면서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과 연합을 누리는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은 결혼이 무슨 지상(至上)의 가치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말과는 다른 말이다. 바울은 여기서 결혼이 무슨 심오하고 궁극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꼭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이 마치 정욕이라는 육신의 급한 불을 끄는 수단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는 7:8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이 말은 만일 정욕이 불같이 타지 않는 사람이거나 불같이 타오르더라도 그로 인해 오는 사탄의 시험들 곧 음행이나 방탕, 방종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굳이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다름없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한 것은 그 자신이 실제로 결혼이라는 문제, 곧 이성 문제에도 완전히 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결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결혼을 하면 안되거나 결혼을 하면 주님을 따르는 데 실패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곁에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주님을 따를 사람이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7:22) 그는 궁극적으로 주님의 종이요 한편으로 사람들에 대해서는 완전한 자유자였다.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결혼이 꼭 필요치는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이미 주님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완전한 연합이 있는 자리에서 임시적이고 불완전한 육체적 연합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할 만하면 독신으로 살면서 주님을 자유롭게 섬기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결혼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범죄하는 것, 즉 정욕을 이기지 못해 범죄함으로써 아주 하나님과 멀어지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깨버리는 것보다는 결혼을 통해 합법적으로 육신의 정욕의 불을 끄고 비록 임시방편적인 연합의 틀이기는 하지만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통을 증진시키기를 도모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음으로써가 아니라 결혼함으로써 하나님과 더 잘 사귀고 사랑 안에서 연합을 더 잘 누린다. 이것은 결혼을 잘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강한 사람들에게는 결혼하지 말라고 권하고 약한 사람들에게는 결혼을 심각하게 고려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결혼을 한 사람들은 결혼의 긍정적인 용도와 목적이 어디 있는지 잘 헤아려서 별거하거나 별거나 다름없는 가정에의 소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말한다.
만일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되어 서로 아무 위로도 아무 섬김도 베풀지 못한다면 그들은 결혼을 했지만 육신의 정욕과 관련된 유혹과 시험을 받게 될 것이며 범죄에 빠지게 수도 있다. 문제는 어디든지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탄이 없다면, 시험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결혼을 하든지 안하든지 여자가 옆에 있든지 없든지 문제가 안될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가 결혼을 하면 한 대로, 혼자 있으면 혼자 있는 대로 우리의 틈을 엿보며 우리를 시험하고 죄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상황에서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특별히 음행을 피하는 데 있어서 결혼은 하나의 좋은 길이다. 사람의 첫 욕구는 식욕과 성욕 같은 매우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것이다. 이런 욕구를 강하게 받으면 정신력만으로 그것을 버티기는 어렵다. 그런 욕구가 강하게 작용할 때 우리는 음식을 먹거나 혹은 결혼하여 부부 생활을 하지 않고서는 달리 만족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결혼만이 길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욕구는 처음에는 먹고 마시며 섹스하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신체적인 면에서도) 얼마 가지 않아서 그런 것으로 완전한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데도 품위가 요구되고 이성 간에도 동물적 애정 이상의 고상한 사랑의 교통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배가 몹시 고픈 상태에서는 어떤 음식이 그렇게도 좋고 사람을 만족시켜주는 것처럼 느끼지만 막상 배불리 먹고 나면 그 음식이 보기 싫어지며 어떤 사람들은 그 음식을 그렇게 탐식한 것에 대해 약간의 짜증과 허무를 느낀다고 한다. 매우 사랑하고 연모하던 사람과 육체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들 한다. 다윗의 아들 암논이 그의 이복 누이 다말을 크게 연모하다가 마침내 겁탈한 후에는 가장 미워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삼하13장) 그것은 왜 그런가? 사람이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을 때 동물 이상의 것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혼자 살 수 없고 누군가와 즉 이성이나 친구간의 연합을 끊임없이 추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그가 본래 하나님을 지향하고 하나님과 연합하고자 하는 성질의 생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첫 욕구는 동물적 연합이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첫 단추를 꿰는 것이고 얼마 가지 않아 더 깊고 완전한 연합과 교제를 원하는 것이다.
이를 깨달은 어떤 철학자들은 사랑하는 남녀가 육체적 관계를 가져버리면 고상한 정신적 교통과 연합이 제한 받거나 깨어지기 때문에 그런 관계를 가지지 않고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사실 이점을 중시한다면 만일 우리가 정욕적인 충동만 이길 수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결혼을 하지 않고도 어떤 사람들과 진정하고 깊이 있는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이며 명목상의 배필은 없더라도 실질적인 배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부부의 육체적 연합 없이도 서로 사랑하며 도움으로써 육신의 연약함을 보조하며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조금 전에 결혼만이 길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무엇이 결혼 말고 사랑과 연합을 누릴 수 있는 다른 길인가?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결혼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생명을 누리기 위해 사람의 위로와 사람의 사랑, 사람과의 연합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이다. 교회 형제들이 함께 모여 살며 격려함으로써 혹은 늘 모여 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서로 사랑으로 돌아보는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결혼이 의도하고 있는 효과를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결혼도 임시적인 것이며 불완전한 것이다. 어느 것도 주님과 우리의 생명 안에서의 연합처럼 완전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실행적인 데 있다. 즉 교회가 육신적 연약함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세상에서 주님을 따르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문제가 아니다. 교회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위해서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혼자 부르시지 않고 교회로 부르셨다. 문제는 교회가 정상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뿐이다. 교회가 만일 정상적이라면 사람들은 거기서 결혼한 부부와 마찬가지로 형제간에 사랑으로 격려하고 도움으로써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는 일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