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소아시아의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인데 대략 바울의 두 번째 전도 여행 기간 중인 주후 50년에서 53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갈라디아 지방의 북쪽에는 안키라, 벳시누스, 타비움 같은 도시들이 있고 남쪽에는 바울이 2차와 3차 전도여행 기간 동안 거쳐가면서 복음을 전한 비시디아의 안디옥, 이고니움, 두스드라, 더베 같은 도시(고을)들이 있다. 북부 지역의 도시들과 남부의 도시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바울이 이 두 지역 모두를 향해 편지를 쓴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북쪽이든 남쪽이든 어느 한 곳을 향해 편지를 쓴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거의 반반 정도로 의견이 나누어져 있다. 사도행전의 내용을 보건대 아마도 바울이 거쳐갔고 친히 복음을 전하여 세운 교회들인 남부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을 향해 이 편지가 쓰여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갈라디아서는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서신이다.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역사적으로 바울 이후로 가장 크게 주의를 환기시킨 사람은 종교개혁자 루터이다. 그는 갈라디아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갈라디아서는 곧 나 자신의 서신이다. 나는 이 서신과 마치 결혼을 한 듯한 기분이다. 이것은 나의 사랑 캐더린이다." 그는 갈라디아서를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의 책으로 꼽았다. 그래서 이 책은 '종교개혁의 구호' 또는 '종교적 자유의 대헌장', '기독교 독립선언서' 등으로 불리어 왔다. 그 까닭은 이 책이 "어떻게 하면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모든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평안과 안식과 자유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인류의 오랜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자유와 행복을 향한 수많은 인간적 노력이 있어왔지만 어느 것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뿌리가 깊어서 그 일관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모양을 바꾸어 계속 새롭게 등장하고 사람들을 끝없이 유혹해 왔다. 그것은 심지어 그리스도 안에서 길을 찾은 교회 신자들 안으로까지 침투해 들어와서 그들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인간적 노력을 함께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인류가 그들의 문제에서 탈출하기 위해 모색한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율법주의이고 하나는 그것과 반대의 모양을 띠고 있는 방종(放縱)주의이다. 율법주의는 사람이 그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힘써 행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통틀어서 칭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종교적 규범이나 그 사회의 법이나 도덕, 또는 자기 양심이 가르치는 바를 따라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모든 형태의 수고, 율법이 가르치는 의식을 준수함으로써 문제 해결을 얻으려고 하는 의식주의(儀式主義), 욕망을 철저하게 억압함으로써 문제의 해결을 얻으려고 하는 금욕주의(禁慾主義), 자연에 대한 숭배 내지 자연법칙에 대한 완전한 복종, 과학에 대한 확신, 자기 의지(自己 依支) 등이 다 포함된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종종 방종주의를 불러왔다. 자유와 해탈과 구원을 위한 인간의 노력은 때로 사람을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가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인류에게 있어서 법이란 그것이 사회 법이든 자연 법이든 모세의 법이든 양심의 법이든, 지키기도 힘들고 또 어느 정도 힘을 다하여 지켜도 기대했던 결과를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법에 대해 복종하지 말자.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모든 속박을 훌훌 털어 버리고 한 번 마음대로 살아보자" 하는 생각이 나온 것이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성적 쾌락을 즐기는 것과 도둑질과 폭력 등 각종 범죄와 저항과 무절제한 생활을 통해 개인의 자유(실은 육적 정욕의 자유)를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

그러나 방종주의 역시 해답을 주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방종의 결과로 육체와 정신, 육체와 영혼 모두의 파멸을 얻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든 방종주의든 자유와 구원을 위한 인류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갈라디아서는 이런 인류에게 참 자유와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은 계시와 체험에 근거한 확신을 가지고 자기 말로 하나님을 영접한 모든 사람에게 참 자유의 길을 보여준다.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참 자유의 길은 율법주의도 방종주의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육체 곧 자아는 그 욕구와 생각대로 맞추어주기도 어렵고 맞추어주어도 만족이 없는 것이다. 육체 안에는 선한 욕구가 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았기 때문에 생긴 욕구이다. 즉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본성이다. 사람들은 그것대로 즉 양심대로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육체 안에는 그것을 실행할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인류는 타락하여 하나님께 대해 죽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사람 안에는 동물적 본성 즉 육욕(肉慾)이 있다. 그러나 이 육체의 욕구는 (그것이 원하는 대로 다 맞추어 주기도 어렵지만) 다 맞추어주어도 만족이 없다. 하나를 만족시켜주면 또 다른 욕구가 솟아 나오고 그것을 만족시켜주면 순간적으로 허무해지면서 또 다른 무엇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그것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본질적 욕구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족이 안되면 다른 것들이 아무리 많이 채워지더라도 궁극적 만족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길은 오직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참 사람 곧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이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자기를 내려놓고 그를 의지하며 (다른 아무 인간적 노력이나 수고를 하지 않고 오직) 그 안에서 안식하면 인간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된다는 사실을 확신 있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있고 둘째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생명 및 그 생명의 능력이 있다. 첫째 요소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추구하는 내재적 본성을 만족시켜 준다. 인류가 행복하지 않았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음 받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과 함께 살게 만들어진 존재인 인류가 그 생명의 뿌리인 하나님에 대해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나가기만 하면 인간의 모든 문제는 (그것들이 낱낱이 다 해결되지 않아도) 사라져 버린다. 왜냐하면 인류의 모든 문제는 사실상 하나님이 없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바로 이 하나님이 있는 것이다. 이 영원하신 아들에게는 오직 아버지뿐이다. 바로 이 사실로 인해 사람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면 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 것이다.  

또 아들 안에는 아버지의 생명이 충만하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그동안 그토록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일들 곧 모든 선행과 거룩한 삶을 능히 행할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성령은 사람 안에서 능히 인간 본래의 거룩한 욕구대로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그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는 것과 자비와 선한 삶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나타나도록 만드신다.  

바울은 이 복음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전파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가로막거나 희석시키는 어떤 다른 사상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대처했다. 그는 한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울러 율법도 지키자"는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와 의식주의를 단호히 거부하는 한편 "은혜에 거하기 위해 죄에 거하자"(롬6:1)고 주장하는 방종주의자들도 단호히 거부했다. 갈라디아서는 바로 이러한 바울의 복음 변증의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낸 성경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된 동기와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초대교회 복음 증거의 거점 지역이었던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에 기쁜 소식이 전해졌는데 그것은 복음 전파를 위해 택함을 받아 보내졌던 바울과 바나바가 이룬 성과 때문이었다.(행13:1-3, 14:25-27)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그들은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며 행하셨던 일들과 하나님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는지를 보고했다. 안디옥교회는 당시 여러 교회들 가운데서도 유대주의적인 틀에서 벗어나 범세계적인 구원의 복음을 분명하게 체험하고 누리는 가장 확실한 교회였다. 그런 까닭에 그 교회는 이방인 선교의 요람이 되었고 제자들을 맨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따라서 안디옥교회는 만일 어떤 곳에서 이 범세계적인 기독교의 전파와 발전을 저해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 일에 가장 먼저 대처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마침 그러한 일이 생겼는데 그것은 바울과 그 일행이 안고 온 소식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자유를 얻었다는 소식은 안디옥에 전해진 후 얼마 되지 않아 예루살렘교회에도 전해졌는데 그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교회는 안디옥교회와 마찬가지로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모든 교회 안의 사람들이 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자들 가운데는 바리새파 출신의 명목상 신자들도 몇 명 있었다.(행15:5)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기는 믿었으나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유대적 율법주의가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구원을 얻는데는 단순히 예수를 믿는 것 이상의 다른 것들이 필요하고 생각했다. 즉 할례를 비롯한 유대적 의식을 지키고 옛 언약의 규례들을 준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과 상관없이 즉 할례를 받지 않고서도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이방인들의 회개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은 즉각 안디옥으로 몰려가서 바울 일행에게 따지며 그곳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15:1) 이 주장에 따르면 그곳의 대부분의 신자들은 지옥에 갈 판이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한 몇 명의 형제들을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사도들과 장로들)에게 파송하여 자문을 구하기로 하였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행 중에는 아버지나 어머니 쪽이 모두 이방인 출신인 디도도 있었다. 따라서 그는 하나의 시험적 사례가 될 입장이었다. 그가 할례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참 교회와 유대주의자들에게 모두 관심사였으며 만일 그가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유대주의자들에게 대한 공개적 도전이 될 것이었다. 바울은 물론 이 일에 이미 명백한 답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그가 예루살렘 공의회로 가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외부적 판단과 결정을 필요로 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갈1:1) 그러나 이런 문제로 인해 교회가 분열에 빠져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혀서 많은 교회들이 더 이상 혼란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것 때문에 공의회에 갔던 것이다.

그 공의회는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대로 먼저 지도자들 간의 개별적 의논을 거친 후 전체 회의에서 결과를 선포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2-10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로 거기서 '유명한 사람들' 즉 베드로와 같은 지도자들에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문제에 대해 '사사로이'(개인적으로) 먼저 의논을 했다. 그는 그것이 자기가 전파한 복음 진리가 그릇된 주장에 의해 허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십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갈2:1,2) 이를 통해 모든 문제는 미리 합의를 이루었다. 즉 디도는 할례를 받지 말아야 하며,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근본 진리가 전체 교회 앞에서 분명하게 천명할 것이며 거기에 더하여 야고보, 베드로, 요한 등의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사역지를 분할하여 사역하며, 가난한 자들을 반드시 기억하여 돕도록 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접견과 회합이 끝난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들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청하였다.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갈2:6-10)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유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고 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많은 변론의 시간을 허용한 후 베드로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음과 같은 말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완전히 동등함을 변증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15:7-11)
"하나님이 우리와 저희 사이를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는 이 말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어서 바울과 바나바가 발언 기회를 얻어 모인 무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부어 주신 여러 은혜의 현상들 곧 표적과 기사들에 대해 자세히 증언했다. 그러자 야고보가 일어나 자신의 결론을 제시했다. 그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명백히 구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암9:11,12)이며 따라서 이방인들 중에서 구원 받는 사람들에게 어떤 율법적 짐도 지우지 않는 것이 옳다고 했다. 다만 유대인들 안에 오래 지속되어 오던 관념을 감안하여 몇 가지 과도적인 조치 곧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조치를 포함시켰다. 그것은 급진적이지 않고 매우 현실적인 제안이었다.

사도들과 장로들을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는 이것을 받아들였고 이러한 결의 사항을 하나의 문서로 작성하여 바울과 바나바 및 예루살렘 교회 소속의 유다와 실라 편에 붙여 안디옥교회에 전달했다.(행15:22-31) 이러한 총회의 결의는 안디옥뿐 아니라 시리아, 길리기아 등지로 알려졌으며 남부 갈라디아의 여러 도시들에도 알려졌다.(행16:1-4)

그러나 유대주의자들은 그 싸움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좇아와서 활동을 방해하려고 했다. 안디옥에서 그들은 심지어 사도 베드로마저 그들의 유대적 습관에 잠시 빠져 외식하게 만들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온 갈라디아를 누비며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갈5:2,3, 6:12) 그러나 그들 자신도 모든 율법에 다 순종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분명히 이율 배반이었다.(갈5:3) 바울이 이러한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대해 지적하며 공격하자 그들 역시 바울을 공격했는데 그 내용은 주로 바울이 사도로서의 어떤 공식적, 가시적 자격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즉 스스로 사도라고 칭하고 다닌다는 것(갈1:1)과 그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들이 하기 싫어하는 어려운 일(예를 들면 할례 같은 것)을 면제해 주고 있으며(갈1:10), 만일 여건만 된다면 자기도 할례를 전한다고(갈5:11) 주장함으로써 그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려고 애썼다.

바울은 이 사람들이 명목만으로 신자일 뿐 실제로는 참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들은 진실치 않으며 자기도 질 수 없는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우는 거짓 선생이라는 점을 갈라디아서에서 지적했다.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갈6:13) 그들의 의도는 유대인로부터 비난과 핍박을 받지 않으려는 것과 자신들의 경건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려는 것이었다.(갈6:12,14) 그러나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 가만히 들어온 거짓 선생들의 말을 쉽게 받아들였다. 바울의 눈에 그들은 떡을 돌과, 생선을 뱀과 바꾸려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는 성령의 지시를 받아 갈라디아서를 쓴 것이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설명하며 그것과 도저히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율법주의의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이 서신은 당시의 갈라디아교회 뿐 아니라 갈라디아교회와 마찬가지의 위기에 처한 후대의 많은 교회들을 위해서도 쓰여진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서신은 여전히 유용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 역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지적하고 있는 말을 듣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들이 그때의 실패를 반복하고 있다.

또한 율법주의와 각종 거짓된 인간적 사상에 깊이 빠져 있지 않고 복음 진리 안에 어느 정도 서 있는 교회와 신자들도 이 책의 내용은 항상 되씹을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단순히 진리를 거짓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변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명확하게 설명하며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자신이 비록 현재 은혜 안에 있다 할지라도 항상 틈을 노리며 우리를 공격하려는 마귀 까닭에 이러한 진리의 말씀으로 계속 자신을 일깨우지 않으면 언제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서 넘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