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1:15-24)
오늘은 주님이 당신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그의 종으로 부르신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택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게 되었다고 간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참으로 바울은 그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에 의해 택정되었다. 어머니 태로부터 택정되었다는 것은 (잉태되기 전이나 출생 순간에 되어진 것이 아니라) 딱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에 택함을 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증거하기 위해 그를 미리 택하고 구별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 역시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신 것과 같은 특별한 부르심이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 안에서 이루어진 확실하고 의미 있는 부르심이다.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것만 의미 있고 특별한 것이고 우리를 부르신 것은 바울을 부르신 것과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바울이나 베드로가 특별하다는 관념은 성경적인 관념이 아니라 천주교 같은 데서 만들어낸 인간적 관념이다. 사도들은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며 먼저 앞서 나간 사람일 뿐 다른 사람이 도저히 이를 수 없거나 본 받을 수 없는 특별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자기와 같이 미리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3-6)
여기서 그는 우리가 어머니의 태에서 택정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창세 전에 택함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같은 말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미리 그의 소유로 찍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전에 자라면서 내가 1960년의 가난한 한국에서 가난하고 평범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려운 삶을 살아온 것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곤 했다. 왜 나는 이것도 할 수 없고 저것도 할 수 없는가, 내가 만일 미국이나 유럽의 부유하고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거나 한국에서라도 교수나 의사 같은 부모의 자녀로 태어나서 교양 있는 가정에서 여유 있게 생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나는 내가 처한 환경이 아쉬울 뿐 아니라 부끄러웠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에 내가 바로 그때 그 상황에서 태어나고 내게 주어진 각각의 (괴롭고 답답한) 과정들을 거친 것과 지금 이 상황 속에 내가 처해 있는 것이 얼마나 합당하고 감사하다고 느끼는지 모른다. 내가 나의 상황이 괴롭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어떤 우주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막연하고 근거 없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탄이 인류에게 심어준 거짓된 관념으로 인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내가 당신의 생명을 얻고 그것으로 당신의 목적에 기여하는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미 정해놓으시고 그것을 위해 일해오셨는데 나는 막연히 이런 삶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내게 주어진 삶을 아쉬워하고 부끄러워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영생을 기준으로 인생을 보지 못하니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충분한지 무엇이 아쉽고 무엇이 없어도 되는 것인지 판단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내 삶을 돌아보니 하나님이 내게 조성하신 환경은 (아담이 타락한 후 땅과 사람에게 일반적인 저주가 주어진 것을 감안하더라도) 어찌 합당하고 적절한 환경이었는지 아무 것도 불평할 것이 없고 오직 감사할 것밖에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하나님은 참으로 나를 어머니의 태 중에서부터 택하시고 은혜로 부르신 것이 확실하다.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이 너무도 좋고 완전하다고 느낀다. 그것은 내 육신의 안락과 욕망과 감각에 그렇게 좋고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그렇다는 것이고 내 영혼의 유익, 나의 진정한 생명을 살찌우는데 그렇다는 것이다.
인생의 가치는 그 생명과 인격에 있다. 짐승의 가치와 우리의 가치가 다른 것은 단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이라는 사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천지 만물보다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라도 그 생명과 인격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자녀(형상)로서의 본래 지위를 잃어버리고 그 생명과 인격이 개나 소 혹은 마귀처럼 된다면 그 가치는 상실되고 만다. 지금 인류는 바로 그런 타락과 무가치의 지경에 놓여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영원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회복하셨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당신의 영광스러운 생명을 불어넣으셨고 하나님의 아들의 존귀한 인격을 가지게 만드셨다.
이것은 사람에게서 시작된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서 시작된 일도 아니고 어떤 다른 사람이 내게 와서 이것을 이루어 준 것도 아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셔서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혹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시고 당신의 목적에 이르기까지 계속 성령으로 돌보신 결과이다.
구약의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그리고 오늘 여기 신약의 바울은 전혀 어떤 사람이 되려고 애쓰거나 힘쓰지도 않았고 어떤 계획이나 야망조차 가지지 않았지만 결국 하나님이 의도하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이 의도하는 일을 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먼저 뜻을 품으시고 그들 안에서 먼저 일하셨기 때문에 되어진 것이다.
나는 앞으로 내 인생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 내가 어떤 일을 하며 내 환경에 어떻게 될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내 인생이 전체적으로 볼 때 빛나고 영광스러우며 의미 있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은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계획을 하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것 이전에 하나님이 나를 아시며 나를 향해 어떤 뜻을 품으신 것이 먼저 있고 그것에 의해 내 궁극적 삶이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여러분의 인생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즉 우리를 부르신 분의 뜻을 알고 거기에 순종하는 한 확실히 영광스럽고 빛나는 인생이 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무릇 사람의 모든 일과 행위는 사람의 생명이 어떠한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사람의 생명과 인격이 선하면 선한 일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악하면 악한 삶을 사는 것이다. 빛은 결국 주위를 밝힐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둡고 침침한 사망의 자리에서 건지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비추는 빛나는 생명으로 회복시키시고 세상으로 보내셨는데 누가 계속 어둠 가운데서 묻혀 지낼 수 있겠는가?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 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눅8:16-18)
주인이 비싼 기름을 태워서 등불을 켜놓은 것은 주위를 밝히 비추라고 그런 것이지 마루 밑에 감추어두려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빛이 드러나지 못하고 묻힐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다만 빛이기만 하면 그의 미래는 확실하고 밝은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참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만 하다면, 다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 복음을 소유하고 있어서 사람들로 생명을 얻게 할 수 있는 자이기만 하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밝고 밝으며 마침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높이 들려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야 말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들으며 무엇을 받으며 무엇을 소유하느냐 하는 것이다. 인생을 사랑하심으로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그의 소유로 삼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의 택하심과 부르심에 호응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음으로써 그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럽고 고귀한 생명으로 채워지는 사람은 그 인생이 빛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의 인생이 될 것이고, 육신의 정욕을 발판으로 사람에게 속삭이는 마귀의 거짓말에만 귀를 기울임으로써 그 마음과 생각이 허무하고 허탄한 것으로 채워지는 사람은 그 인생이 캄캄하고 절망적인 것이 되게 될 것이다.
내가 재벌의 아들로 태어나면 나는 노력하지 않아도 부자가 되고 돈이 많으니 미국 가서 공부도 많이 해서 교양 있고 부티 나는 사람이 저절로 되는 것이고 술주정뱅이나 거지나 파탄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면 어지간히 애를 써도 그 비슷한 범주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다. 이처럼 태어남은 운명의 상당 부분을 결정짓는다. 하나님의 부르심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알고 보면 하나님의 택정과 부르심은 사람의 육신적 태생 환경보다 우선하는 것이며 더 사람의 미래를 강력하게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이 그를 은혜로 부르셨다고 말하고 있다. 은혜로 부르셨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사도가 된 것은 바울 자신 까닭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건전한 사람이었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율법의 행위로 흠이 없는 사람이었지만(빌3:6)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에 즉 그가 무슨 선을 행하고 열심을 가지기도 전에 하나님이 다만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의해 그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이다. 행위 이전에 선택된 것이므로 은혜라고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행위로 말해도 그는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이며 은혜로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는 표면적 율법에는 합치되었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핍박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거스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을만한 선행이 아니라 죄였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그의 부르심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스스로도 무슨 계산을 하거나 고민하지 않았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물어보며 의논하지도 않았다. 참으로 그는 자신의 새로운 삶과 사역에 대해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 심지어는 먼저 사도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다. 비록 친밀하고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혈육은 같은 부르심을 받은 사도가 아니므로 의논하지 않더라도 먼저 사도된 베드로나 요한 등과는 의논하는 것이 그의 사역에 도움이 되는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이 새로운 계시와 사역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전혀 사람의 생각과 전통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직후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는 고향으로나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 여기서 말하는 아라비아는 오늘날의 시리아와 사우디아라비아의 경계선이 있는 지역인데 거기는 유대교의 문화와 전통, 심지어는 유대적 분위기가 상당 부분 남아 있는 초대교회의 영향에서도 멀리 있는 곳이었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거기에는 바울을 아는 사람들이 없었고 그리스도인도 교회도 없었다는 것이다. 거기서 그는 꽤 긴 시간을 보내며 주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친히 배웠을 것이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복음에 관해 계시를 받았을 것이고 그것에 기초하여 성경(구약)을 다시 공부하는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이로써 그는 이전에 자신이 가말리엘에게서 배운 것과 주님의 말씀을 대조하면서 성경의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후에 그는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다. 삼 년 후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까지 그는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아라비아에서 여러 해를 보낸 후에도 다시 다메섹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어떤 사람과 만나거나 사역을 하는데 쓰지 않고 오직 주님과 교통하며 말씀을 공부하는데 시간을 보냈 것이다. 왜 그렇게 해야 했을까? 그것은 그가 받은 계시가 그만큼 인간적 관념과 전통에서 벗어나 있는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에 대해 사람과 의논하거나 공유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또 배우며 기도로 교통하며 하나님의 말씀(구약)으로 그의 체험과 계시를 점검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 다음에 비로소 그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때도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은 만나지 못했다. 이때 바울은 이미 누구의 도움을 받거나 영향을 받아서 그의 생각과 사역을 결정할 상황이 아니고 오직 그가 주님으로 받은 계시를 따라 자기 일을 확고히 수행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고 일하는 데 있어서 혈육과 의논하거나 그것을 공유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다른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와 그것을 공유하며 교통하는 것은 당연하다. 바울은 자신의 생명과 사역이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하게 되기까지는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마저도 만나지 않음으로써 자기 속에 오직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며 역사하시도록 환경을 조성했지만 그것이 분명해진 후에는 즉시 함께 부르심을 받은 형제들을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갔다. 만일 바울이 자기 속에 역사하시는 주님의 인도에 전력을 기울여 주의하지 않고 사람들과 그것을 공유하기를 먼저 서둘렀다면 그는 유대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범세계적인 교회를 건축할 수 있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온전히 사역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사실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그보다 먼저 부르심을 받은 주의 종들 곧 베드로나 요한 같은 사람들 보다 앞서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개척자였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 먼저 사도된 이들을 만나러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과 사역이 확정된 후에는 지체하지 않고 형제들을 만나러 갔다.
그리스도인은 그 삶과 사역에 있어서 주님의 뜻과 배치되는 인간적 생각이나 사람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되며 항상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 하에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지체들과 격리되어 혼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항상 주님 안에 거하기 위해 주의 몸인 교회 안에 한 지체로서 다른 지체들과 함께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과의 바른 교제는 우리의 삶과 사역을 인간적으로 만들거나 생명을 잃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로 주님께 깊이 붙어 있게 만들고 하나님의 생명을 더 풍성히 누리게 하며 하나님의 계시를 더 분명하게 깨닫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 등의 지역으로 갔다. 아마도 바울은 사역이나 더 깊은 주님과의 교제를 위해 그 지역으로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역들 역시 유대가 아닌 이방 지역들이었다. 이를 통해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 계시가 유대교나 유대에 있던 그리스도인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받은 계시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유대인들은 그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나중에 바울에 대해 유대인들 사이에서 나온 말은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즉 바울이 유대인들에게서 어떤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유대인들이 바울의 새로운 사역으로 인해 무엇인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사람과 전혀 의논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지도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거나 마음을 맞추려고 하지도 않았고 오직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주님의 기쁨을 구하는 삶을 살았던 것을 본받아야 하며 또한 그가 주님의 택하심과 부르심과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결국 그러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그런 삶을 살아내어서 빛나는 사도가 되었음을 보고 우리 안에서도 동일한 주님의 부르심이 있으니 동일한 미래가 있음을 알고 주님을 따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