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15-18에서 사람은 다 타락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되었으므로 누구도 그 행위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누려야지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바울은, 이어지는 2:19,20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의 존재 또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삶)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서 먼저 바울은 자신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말한다. 율법을 향하여(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그와 함께 죽어 없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간단히 말하면 살았으나 죽은 사람이다. '옛 사람이 죽은'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율법에 대해서도 죽었다. 또 율법 뿐 아니라 육신에 작용하는 모든 것들 곧 죄와 세상과 욕망과 마귀에 대해서도 죽었다. 하나님은 율법의 요구에 도저히 부응할 수 없고 오직 율법의 정죄와 저주와 심판을 받아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죽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죽이신 우리는 살아 있는 자가 아니라 사실상 이미 죽은 자였다. 인류는 타락 후 하나님께 대해 죽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단지 죽었다고 선언하시고 매장하신 셈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여 폐기하신 것은 가정(假定)이나 형식이 아니라 실제이다.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분명히 실제로 죽은 자이다. '믿음 안에서' 우리는 분명히 죽고 없어졌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실행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다 할지라도 달리 선택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안 죽을 수 있는가? 만일 우리가 안 죽고 영원히 살아서 자기 (옛 사람의) 생명대로 모든 것을 행한다면 율법은 영원히 우리를 따라다니며 정죄와 송사와 저주와 심판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지 않으면 안된다. 죽어야 할 것은 죽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리의 죽음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은 '율법을 향하여(대하여)' 죽은 것이다.
다음으로 바울은 우리가 율법을 향해 죽은 것은 단지 율법의 정죄와 심판을 피하기 위한 소극적인 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한' 즉 하나님을 능히 섬기는 새로운 삶을 위한 적극적인 길이었음을 설명한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로마서 7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여기서 바울은 죽음만이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율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으며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처리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그런 자유를 주셨음을 말하고 있다. 죽음은 율법의 정죄와 심판에서 우리를 자유케 할 뿐 아니라 또한 율법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던 무능과 죽음(無力)에서 자유케 했다. 즉 죽음은 무능을 벗고 하나님을 능히 섬길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로마서 7:4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을 향해 다시 삶으로써 타락하고 무능한 옛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옛 사람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 말한 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했다. 이것은 19절에서 말한 내용을 표현을 달리하여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며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갈2:20의 이 말씀은 너무도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장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히 갈2:20은 신약의 기본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복음 진리를 단순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암송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누리는 사람은 매우 적은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다. 그 오해의 주된 내용은 이것이니, 사람들은 성경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예수를 믿은 후에는 소위 말하는 自我(옛 사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완전히 없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내 안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는다는 말을, 나(인간 자신)는 완전히 사라지고 자신이 그리스도로 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자기의 생명이 본질적으로 바뀌어서 자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와서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변화가 아니라 교체이며 대체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속에 근본적으로 육신에 속한 성분이 제거되었으므로 자기의 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거룩하며 완전하다고 착각한다.
둘째 부류의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2:20의 의미를 그 정도는 아니라도 적어도 육신의 혈기와 욕구는 다 사라진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여전히 (죄성을 지닌, 죽을 운명의) 인간이지만 그 생명과 정신과 마음이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한 품성으로 변했기 때문에 범죄할 수 없으며 실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셋째 부류의 사람들은 이 말이 첫째나 둘째 부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자기 안에 거하는 영의 능력이 자기 육신의 소욕을 당연히 이기며 항상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자기 안에 육신적 성질과 생명은 여전히 남아 있을지라도 자기 속에는 그것을 이기는 생명이 있어서 적어도 자기가 살아서 나서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를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육신(자아)을 부인하거나 그것에 대해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다 갈라디아서 2:20이 말하는 바가 아니며 그것을 오해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에서 말한 것은 단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이다. 전에는 그리스도가 없었는데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면서 말씀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아니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 딱 그것이다.
(믿음 안에서가 아니라) 물리적, 현상적으로만 말한다면 소위 '나'는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고 그대로 존재한다.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날마다 느끼고 있는 바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우리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두고 말한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역할(활동)이 제한되고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아니 제한이나 축소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죽은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어디까지 제한되고 축소되었는가? 바로 예수를 믿는 일, 예수를 담고 예수를 찬송하며 붙드는 일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리까지 제한되고 축소되었다. 즉 나는 여전히 살아 있으나 그 '나'(自我)의 역할과 활동은 오직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 한 일에만 제한되고 나머지는 죽은 상태나 다름없이 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요 실제인 것이다.
우리의 삶은 더 이상 내가 활동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시도록 그를 믿으며 순종하는 삶이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우리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그리스도의 몸 곧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나는 죽고 하나님의 아들(하나님 자신)이 내 안에 사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누가 생명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나의 육신적 생명이 활동하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 활동한다면 그것이 바로 내 안에서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자리이며 복음 진리의 기본이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나를 대신하여 산다는 말의 의미가 앞에서 언급한 오해의 사례에서처럼 해석될 수 있다면 바울은 20절 후반에서 "...내가 사는 것은" 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죽은 것이 아니고 내가 산다는 것이다. 바울은 분명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말한 후에도 다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분명히 내가 여전히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바뀌어지거나 대체된 것이 아니라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며 그리스도와 내가 공존하는 것이다. 문제는 '나만 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도 함께 있느냐'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누가 생명이 되며 누가 활동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도권 문제이다. 주도권을 잡는 자가 '산'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실제로는 '죽은'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리 안에 '옛 사람'과 '새 사람' 곧 '옛 나'와 '새 나'가 공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옛 사람은 악하고 새 사람은 선한가? 그런 점도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이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이다. '옛 나'는 악하건 선하건 하나님을 모르는 자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 없으며 그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무관하다. 그러나 '새 나'는 하나님의 빛을 본 자이며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성질로 채워진 자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나'인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사람이 거듭났다고 하면 그가 완전히 죽거나 사라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단지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더해진 것이며 그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물리적으로 말한다면 육적인 사람이 따로 있고 영적인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 안에는 옛 사람(생명)만 있고 어떤 사람 안에는 새 사람(생명)만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 즉 '나'라고 일컬어지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이다. 생명도 하나뿐이다. 다만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아는 사람이며 그 생명을 따라 사는 사람이냐 아니면 사탄의 거짓말과 타락한 본성(육적, 동물적 본성)을 따라 사는 자연인이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람은 언제나 그 두 길 중에서 한 길로 행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는 사람도 그 두 길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 즉 복음 진리를 아예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아예 받지 못한 사람은 물론 오직 육적인 사람(옛 사람)으로만 산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고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므로 두 존재가 함께 있는 것과 같이 된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즉 그는 여전히 육신의 요구를 따라 육신대로 살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육적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생명을 따라 삶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비록 예수를 믿고 그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실제로 영을 좇아 행하며 자기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을 따라 살지 않고 육신대로 산다면 그는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것이며 범사에 실패하며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고 새 사람일지라도 실제적으로는 전혀 새 사람이 아닌 것이다. 오직 매일 그리스도를 실제로 믿는 사람 곧 매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만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 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육신의 모든 활동 곧 모든 육신의 생각과 육신의 야망과 육신의 의지와 육신의 노력을 내려놓는 사람이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영의 요구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만이 육신을 가졌어도 육신을 이기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하나님의 인격을 나타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