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이 사람이 오직 하나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받아들임으로써) 의롭게 된다(하나님의 자녀로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울러 여러 가지 율법의 계명과 의식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되고자 하는 태도를 동시에 취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본의든 아니든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려' 하고 있다고 책망했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몇 가지 용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의롭게 되는 것 - 구원, 죄와 정욕을 이기고 승리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삶 ....
율법 - 사람이 노력하고 수고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거나 선을 행하려고 함
은혜 - 하나님이 사람을 대신하여 모든 일을 하심,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과 운명이 되어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심
믿음 - 그러한 은혜를 받아들임 (그리스도의 길과 운명, 사역을 내 것으로 받아들임)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2:8) 그러므로 은혜를 폐한다는 것은 은혜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길에서 떠난다는 것이다. 은혜와 믿음은 같이 가기 때문에 단지 은혜에서만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은혜를 떠나면 은혜와 믿음의 길에서 동시에 떠나는 것이다.
믿음과 안식은 은혜와 관련된 것이며 수고와 노력은 율법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붙잡으면 사람의 수고와 노력에서는 떠나게 되고 율법을 붙잡으면 믿음과 안식에서는 떠나게 된다.
그리스도는 사람을 도우려고 오신 분이 아니고 사람을 대신하려고 오신 분이다. 그는 사람의 수고와 노력에 어떤 보탬을 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끝장내고 편히 쉬도록 만들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동시에 율법을 지키고 스스로 선을 행하려고 애를 쓰는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이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는 자기 일을 내려놓고 안식하는 것이고 그 어떤 율법적 인간적 계획과 수고도 하지 않아야 하고 반대로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한다면 그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일생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도우심)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은혜에서 떠나 율법으로 자꾸 나가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고 둘째,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이고, 셋째, 은혜가 무엇이며 율법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첫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율법적이다. 은혜에 대해서는 약간의 지식이 있기는 하지만 마음 중심에 항상 자리잡고 있는 것은 선악적인 정신과 율법적인 정신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바른 마음이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온 왜곡된 마음이다. 그것은 생명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선악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도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내가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싫어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정이야 어떻든) 내가 좋은 사람이면 하나님도 나를 좋아하시고 내가 보잘것없는 사람이면 하나님도 나를 싫어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단지 사람을 사랑하시며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의 마음은 판단과 따지는 것과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랑과 은혜로 충만하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이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무엇을 해서 기쁘게 할까 생각하며 여러 가지 일을 해서 잘 보이려고 애쓸지라도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그 자녀의 존재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만 그 안에 거하기를 원하시며 거기서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받기를 원하신다.
둘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람이 은혜에서 떠나 율법으로 향하는 것은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율법은 사실 그런 인간의 무지를 깨뜨려 자신을 깨닫게 할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 중 하나는 사람의 죄인됨과 무능함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19,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5:20)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3:19)
타락한 인류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마음은 있을지라도 몸이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롬7:14-24)
사람이 죄인이요 범법하는 자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율법을 주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가만히 놔두어도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는데 무엇 때문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을 가르치며 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율법은 사람에게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죄인됨과 무능을 드러내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물론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것이지 어기라고 준 것은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과 인격을 표현한 것이므로 그 자녀가 마땅히 그것을 존중하며 그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마음과 인격이 깊이 반영되어 있고 그 정신과 능력이 살아 있다면 그것(율법)을 주지 않아도 그대로 살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사람이다. 사람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도무지 기쁘게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선한 것만 찾는다고 될 일이겠으며 열심과 정성과 노력을 기울인다고 될 일이겠는가?
셋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것은 둘째 문제 즉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는(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자라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율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마음과 정신,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곧 하나님이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며 기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마땅히 할 바이며 영원한 소망이지만 실제 능력은 그렇지 못하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탄식한 바와 같이 현재의 인간은 도저히 스스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된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율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과소평가하며 자기 마음대로 규정한다. '이것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율법의 내용을 왜곡시키고 간소화하는 것이다. 실제 생활은 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정욕대로 살면서도 몇 가지 의식과 규례만 지키면 능히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율법을 가까이하며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자기를 모르고 율법을 모르면 은혜도 모를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에 대해 정말 너무나 무지하다. 신자들이 가장 즐겨쓰고 가장 많이 입에 올리는 말이 은혜이지만 가장 오해되고 있는 것도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은혜와 관련하여 반드시 알지 않으면 안되는 몇 가지 사실을 함께 살펴보자.
첫째, 은혜는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롬4:4) 이 말씀은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를 받는 것이 바로 은혜라는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은혜를 받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고 삯이고 댓가이다. 은혜는 그 속에 어떤 대가성도 없기 때문에 은혜인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자격 없는 사람을 구원해 주는 것이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롬3:24) 여기서 "값 없이(dorean ; freely)"란 요한복음 15:25에 나오는 "연고 없이" 즉 "까닭 없이"라는 말과 같은 단어로 되어 있다. 사람들이 연고 없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처럼 하나님은 연고 없이 사람들을 사랑하며 은혜를 베푸셨다. 그러므로 은혜는 사람의 자격이나 가치, 행위, 업적과 상관없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은혜는 위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같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랑은 동등하게 대접하는 것이고 존경은 아래에서 위로 경의를 표하는 것이지만 은혜는 위에서 아래로 베풀어지는 무한한 긍휼이라고 했다. 그렇다. 은혜는 오직 하나님이 사람에게 값없이 그리고 한없이 베푸시는 긍휼이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것이고 측은히 여기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의 필요성을 느끼고 때로 은혜를 사모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다지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은혜가 그들에게 겸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은혜는 긍휼이며 사람의 자기 부인과 겸손을 요구한다. 이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은혜는 우리에게 자신을 가장 비천하고 악하고 보잘것없는 자라고 여기는 데 동의하라고 요구한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은혜는 인간의 무자격을 문제삼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죄가 많고 실수가 많고 근래 형편없는 생활을 해 온 사람들은 자신이 은혜를 받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서기를 주저한다. 그러나 은혜는 공로와 무관하며 수고와 무관하며 죄와 무관하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은혜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훌륭할 때는 은혜를 좀 더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그렇지도 않다.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그를 깊이 의지하는 자가 은헤를 깊이 누리는 것이지 그의 행위나 자격과는 무관한 것이다.
둘째, 은혜는 사람의 어떤 부족함과 약함을 메우고 돕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2:9) 이 말씀은 신자가 구원 받은 후에도 선한 행실(하나님의 자녀다운 거룩한 삶)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구원을 받을 때는 그것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면 그는 분명히 무엇인가 자랑할 것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도 마찬가지이다. 90퍼센트는 은혜로 구원 받고 10퍼센트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면 사람은 그 10퍼센트를 가지고 자랑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놓치게 된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갈3:2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롬11:32) 이 말씀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일률적으로 죄인의 지위에 두셨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다. 사람들 간의 차별도 없을 뿐 아니라 한 개인 내부에 있어서도 차별이 없다. 즉 선한 부분 따로 악한 부분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인이면 죄인, 의인이면 의인인 것이지 부분적으로는 의인이고 부분적으로는 악인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사람을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폐기하시고 새 사람으로 창조하시는 방법을 쓰시지 사람을 그대로 둔 채 부족한 부분만 보충하는 식으로 하시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들이 죄와 정욕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를 쓴다면 즉 선을 행하고 율법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한다면 하나님도 그들을 은혜로 도우시려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10가지 중에서 7가지는 내가 할 수 있다면 나머지 3가지 안되는 것만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일하시지 않는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주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했다. 그때 주님은 그 사람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청년은 자신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게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 청년은 이 말을 듣자 근심하며 떠나고 말았다. (마19:16-22)
이와 같이 사람이 만일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이르고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그는 모든 계명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켜야 한다. 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그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이웃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이것을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의 힘으로 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안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자 한다면 그는 전적으로 은혜만을 의지하고 자기를 포기해야 한다. 왜 하나님은 꼭 양단 간에 하나를 택하도록 요구하실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운명과 모든 행위 곧 선한 것과 악한 것과 할 줄 아는 능력과 무능한 것을 다 포함하여 사람의 모든 것을 이미 십자가에 못박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가 처리되었을 뿐 아니라 사람의 모든 것이 다 처리되고 사라졌다. 따라서 이 은혜 곧 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려면 자기를 완전히 포기해야 하고 아니면 은혜를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셋째, 은혜는 사람을 채무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즉 그것은 나중에 갚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넷째, 은혜는 공짜가 아니다. 그것은 큰 댓가를 지불한 것이다. 은혜는 죄인의 죄를 그냥 용서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셋째와 넷째 사실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