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하나님의 인도 아래 있었으며 장차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실제로 그들은 그런 위치에 서 있지 못했고 그런 삶을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종과 같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그들이 그런 상태에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없었던 것은 (인류가 타락하여 그 영이 하나님께 대해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떠나게 된 후) 아직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다시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다.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유업을 이를 자란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 곧 구약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다. 유업을 이을 아들은 분명히 모든 것의 주인이다. 그러나 어릴 때는 능력이 없어서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어서 종과 마찬가지로 (자율적인 삶이 아니라) 규칙과 규제 속에서 타율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직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성령이 오시기 전,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없고 하나님의 마음이 없던 때에는 자유와 자율이 없었고 오직 율법에 의한 강제만 있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들은 전혀 하나님의 백성 흉내도 낼 수 없었을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틀 안에 머물러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는 이 어리석고 우매한 백성들을 하나님 안에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 안에 머물게 하고 은혜의 시대까지 끌고 가기 위해 보내어진 틀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틀 안에서 조금이나마 보존될 수 있었다. 이 틀(system)은 성전과 제사와 제사장과 각종 절기와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율법으로 그 백성들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그것은 알고 보면 세상 도덕과 윤리 또는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 또는 이미 세상에서 흔히 행해지고 있던 종교적 양식을 사용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이렇게 하지 않고는 우매한 그 백성들에게 당신의 뜻을 전달할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도 어릴 때는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게 되는 것이다.
When we were children, We were in bondage under the elements of the world. (We were in slavery under the basic principles of the world.)
여기서 "이 세상 초등학문"이란 앞에서 말한 종교, 도덕, 윤리, 법, 전통 등과 같은 '세상을 구성하며 유지하고 있는 여러 시스템들' 곧 '세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여러 가르침과 원리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것의 반대는 무엇인가? 바로 '하늘의 지식', '생명의 지식'이다. 이것은 아들(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는 완전한 지식이다. 즉 세상의 초보 가르침에 상응하는 우리의 원리는 성령의 가르침 곧 우리 생명 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이 있는 사람은 사람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고 세상의 초보적 틀에 매일 필요가 없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전혀 다른 사람의 가르침이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다만 사람을 통해서든 어떤 방법으로든 성령께서 사람 안에서 친히 진리를 일깨우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역사를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가르쳐도 안된다. 그러나 이것이 있으면 사람으로 말미암는 가르침이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진리를 깨칠 수가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능히 헤아리고 좇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릇 법은 아들에게 적용되는(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종에게 적용되는(해당되는) 것이다.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는 규제나 명령이 필요 없다. 언제나 법과 규제는 그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령의 인도 아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의 규제와 인도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 아래 있다. 그러므로 다시 종의 굴레, 어린 아이의 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들과 관련된 것은 자유와 자율이며 종과 관련된 것은 규칙(율법)과 강제이다. 아들과 관련된 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며 종과 관련된 것은 율법이다. 이것은 어른과 아이의 차이와도 같다. 어른은 이를 닦아라 밥을 먹어라 세수를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그럴 필요를 가지고 있는 한 스스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는 생명의 필요가 있어도 타율이 없으면 그것을 하지 않는다.
아들을 다루는 방법과 종을 다루는 방법도 다르다. 아들을 다루는 방법은 생명의 빛, 진리의 빛으로 그 마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이 그 안에서 실제가 되도록 하기 위해 때로 고난을 통해 징계와 단련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을 다루는 방법은 규칙(율법)을 정해 놓고 그것에 따라 공과를 따져 상과 벌을 주는 것이다. 아들에게 임하는 것은 훈련이고 교육이지만 종에게 임하는 것은 처벌이다. 비유를 달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어른에게는 책망이 주어지지만 아이에게는 채찍이 주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른은 지각이 있기 때문이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12:5-7)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참 아들은 그 영혼의 유익을 위해 육체의 고난을 통한 징계(훈련)를 받는다. 종은 징계가 아니라 벌을 받는다. 종이 받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잘잘못에 따른 상벌이다. 그것은 행위대로 갚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받는 것은 행위에 따른 대가가 아니라 아버지의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이 되도록 즉 잘되도록 교육과 훈련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종이 아니라 아들이요 아기가 아니라 성숙한 어른이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8:14)
하나님의 아들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영 곧 하나님의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신적 능력과 실력(인격과 덕망)을 근거로 하여 아들이냐 종이냐 하는 것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명을 따라 그렇게 판단하고 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들의 생명, 아들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아들이다. 그러므로 아들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8:19,21)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5)
이 말씀들은 우리에게 성도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이루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이런 아들들을 원하신다. 그리고 모든 천하 피조물도 이런 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은 이런 아들들을 세상에 세우심으로써 세상을 당신께로 돌리실 것이며 세상을 다스리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냐 종이냐 하는 것은 생명으로 결정되는 것이고 이 생명의 표현은 반드시 그 사람의 삶에서 진리가 나타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8:31,32,36)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고전7:21,22)
이 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은 형식상으로나 내용상으로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인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먼저는 그 영혼이 자유하는 자요 전능자의 아들로서 주인다운 품위와 권세를 가져야 하고 다음으로는 형식(세상에서의 삶의 위치) 상으로도 남에게 매여 있는 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만일 외형적으로 그런 상황에 있지 못하고 남의 종으로 있어서 남을 섬겨야 할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개의할 필요는 없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고전7:23)
사람들의 종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 사람들에게 매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남의 밑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직무상의 구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사람들에게 매여서 종이 되는 것 또는 삶 전체가 그렇게 매이게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돈이나 명예, 출세, 혹은 애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남에게 매여 종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생활의 필요를 위해 직무상으로 남에게 매여 어떤 일을 하게 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남의 종이 될 필요가 없으며 종이 되어서도 안된다. 그것은 사람의 종이 되면 하나님의 종이 되기 어렵고, 세상의 종이 되면 천국 일군이 되기 어려우며 한 일에 종이 되면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본질적인 다른 한 일(성령의 일)에 종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그 나라와 그 진리의 전파를 제외하고는 남의 종이 되어서 자기 마음과 행동의 자유를 잃으면서까지 기어이 얻어야 할 것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전능하신 우주의 주권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과 그 이름 위에 얹혀 있는 영광스런 직무보다 더 영광스러운 이름과 일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놓치면서까지 더 얻어야 할 그 무엇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전8: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19)
진정한 자유의 삶은 하나님의 생명대로 사는 것이다. 양심대로 살고, 지식대로 살고,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는 것이 참 자유이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무슨 소망과 생각이 있는가? 하나님이 심어놓은 생각과 원함이 있다. 이것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유이다. 육체의 종, 정욕의 종, 죄의 종은 죄를 원치 않고 선을 추구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고 오직 육체의 소욕을 좇아 자기가 원치 않는 행동들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종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속에서 강력하게 역사함으로써 육체를 이기는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결국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이 자유는 삶을 육체의 정욕에 굴복하는 삶으로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는 삶으로 만들어낸다. 이 자유를 가진 자는 심지어 자기의 자유와 권리가 약한 자들을 넘어지게 만드는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는 일을 막기 위해 자기의 자유와 권리를 스스로 제한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