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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달려감

갈라디아서 4:10-20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으니,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니,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내게 해를 입힌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감격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할 수만 있었다면, 여러분의 눈이라도 빼어서 내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에게 진리를 전하였으므로, 여러분의 원수가 되었습니까? 위에서 내가 말한 자들이 여러분에게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게서 떼어놓아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들을 열심히 따르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좋은 뜻으로 여러분에게 열심을 낸다면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좋은 일입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이제라도 내가 여러분을 만나 어조를 바꾸어서 이야기를 나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황하고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바울은 여기서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에게 호소를 하고 있다. '제발 거짓 선생들이 퍼뜨린 교묘한 거짓말에서 벗어나서 진리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 호소는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이 전에 바울에게 베푼 사랑과 호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과연 그들은 전에 바울을 사랑했고 그를 깊이 받아들였다. 바울이 건강상의 문제로 인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그들은 바울이 그런 문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문제로 여기지 않았으며 아무도 그를 꺼려하거나 비방하지 않고 도리어 그가 자기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했다는 그 한 이유만으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고 순종했다.
바울은 여기서 그것을 회상하며 그것을 근거로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의 복음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사랑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을 주지시킴으로써 그들의 지금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고 자기답지 못한 행동인지를 인지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단지 갈라디아인들의 '사랑'에만 호소한 것은 아니다. 사실 그는 그 이상으로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의 '영'에 곧 그들의 '거듭난 생명' 또는 그들의 '처음 믿음'에 호소하고 있다. 지금 그들이 (비록 부분적이고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바울을 이전처럼 대하지 않고 의심하며 배척하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바울의 복음을 듣고 거듭난 사람들인 것이다. 비록 그들 안에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허무한 생각과 교만이 자리잡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보기에 그들의 본질은 여전히 하나님의 아신 바 된 자들 곧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다. 그들은 지금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망상에 빠져 헤매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인 것이다. 즉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인 것이다.
어리석고 약해서 길을 가는 중에 이러 저리 헤매는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은 (어떤 과정을 거치더라도) 결국 아들의 길로 가게 되고 그 형상을 본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이 지금 잠시 자기를 배척하고 마귀의 거짓말에 속아서 헤매고 있더라도 결코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사람으로 간주하며 대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들은 적어도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자들인 것이다.(히6:4,5)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은 거꾸로 돌아갈 수 없다. 본 것이 있는 자가 본 것이 없는 사람처럼 될 수 없고, 생명이 있는 자가 죽은 자처럼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
이 말씀은 유의해서 상고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한 번 거듭난 사람은 타락하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몇 가지 의문(질문)을 가지게 된다. {첫째}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 도로 타락하여 생명 없는 멸망의 자식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그런 사람(타락한 신자)은 다시 돌이킬 수 없고 영원히 그 타락의 자리에 있다가 멸망을 받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셋째}는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들에서 흔히 있는 일처럼, 신자가 타락하여 세상에 빠지고 범죄하게 되면 그는 결코 다시 건짐을 받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 세 번째 문제는 매우 실질적인 문제이며 누구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많은 신자들이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이런 저런 모양으로 타락하며 범죄하기 때문이다.
우선 첫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은 이것이니,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이다. 즉 거듭난 사람은 타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들의 생명은 그것을 마음대로 취할 수도 없는 것이고 또한 그것을 얻은 사람은 그것을 마음대로 버리고 다른 생명을 가질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버리고 개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은 타락해도 사람이지 개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타락해도 어디까지나 '타락한 하나님의 자녀'이지 세상 죄인 곧 하나님과 상관없는 멸망의 자식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확실히 거듭난 사람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이지만) 신자의 타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자녀'가 정신을 못 차리고 헤매는 것이지 멸망의 자식의 자리로 도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첫째 질문의 답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근본적으로 타락하여 멸망의 자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서 둘째 질문의 답은 저절로 나온다. 그런(타락하는) 일이 불가능하므로 다시 돌이키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두 번 거듭날 수 있다면 (즉 거듭난 자가 도로 타락하여 멸망의 자식이 되고 또 거기서 도로 거듭나는 일을 반복할 수 있다면) 결국 주님은 그 일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두 번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안될 일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타락할 수 없으니 타락하지(헤매지) 말라는 것이다. 타락할 수(뒤로 돌아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중간에 멈추어 서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거듭난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의 형상을 자기 안에 이루기까지 오직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히6:1-3) 이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의 길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생명을 누리게 되기까지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 질문의 답은 어떻게 되는가?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현실적으로 타락하여 헤매고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행위는 무엇이며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시각은 이것이니 그들은 결코 타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외형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는 그들이 타락했다고 할 수 있을지라도 근본적이고 영구하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아들의 생명을 받아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잠시 속을 수는 있고 잠시 타락하여 헤맬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떠나고 진리를 떠나서 완전히 타락할 수 없다. 본 사람이 보지 않은 사람처럼 '완전히' 헤매고 '길게' 헤매고 '근본적으로' 헤맬 수는 없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맛보았다는 것은 곧 사람이 성령의 빛 가운데서 '자기(인간)의 본질과 한계'를 보았다는 것이며 '인간의 죄성과 무능'을 보았다는 것이며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그 아들의 생명만이 우리를 온전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사람은 잠시 자기를 신뢰하며 망상에 빠져 율법과 육신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할 수는 있으나 길게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권면하며 호소하는 것이다. 만일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이 자신들의 이러한 실상을 하나님의 시각대로 바로 보기만 한다면 그들은 즉시 자기 길을 찾을 것이며 제 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사탄은 사람을 속일 수 있을 뿐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생명을 없는 것처럼 무위로 돌이키거나 빼앗아가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정신만 차린다면 사탄은 사람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진리 위에 서 있는 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승리를 누릴 수 있다. 사탄의 무기는 오직 거짓말뿐이다.
지금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영을 일깨우고 있다. 그들의 생명의 본질을 흔들어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사실 처음 복음을 받아들일 때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은 정말로 기뻐했으며 감격했으며 그로 인해 바울을 지극히 사랑하며 따랐다. 그것은 인사치레나 대접으로나 혹은 위선과 교양으로 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돌변하여 이제는 냉랭하고 무심하고 배척하고 대적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사람은 참으로 약한 존재이다. 마귀에게 쉽게 속고 그래서 쉽게 마음이 변하고 쉽게 생각이 바뀌며 그로 인해 행동과 태도가 쉽게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교회 사람들은 바울이 육신적으로 영광스러운 자였기 때문에 그를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복음이 그들의 육신을 영광스럽게 나타내주고 그럴듯하게 띄워주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으로서 사람을 죽이고 오직 사람 안에서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도록 하는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의 육체적 약함과 기타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따르고 사랑했다.
그때 그들은 어째서 자기를 죽이는 십자가의 복음을 그렇게 기꺼이 받아들였는가? 그들은 왜 못난 사람을 달게 받아들였던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그들이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그리스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는 바울이 육신적으로 어떤 사람이냐 그가 잘났느냐 못났느냐 하는 것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또한 그가 제시하는 복음이 자기들의 육신적 형편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냐 아니면 죽이는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직 그가 전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평안과 안식만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영혼의 안식과 평안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다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말이다.
죄와 죄책으로 인해, 또는 육신의 고통이나 생활의 어려움 때문으로 인해, 또는 다른 이유로 인해 그들은 자유와 해방과 구원을 필요로 했다. 그런 가운데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들이 어떤 사람이냐(얼마나 잘나고 못났는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무능한지) 하는 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 자체가 필요했고 그것만이 중요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들의 형편이 좋아지자 그들의 마음에 교만이 생겼고 이를 틈타서 마귀가 거짓 선생들을 통해 그들의 마음에 율법과 육신의 자랑을 심게 됨으로써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때에 우리는 우리에게는 마음을 계속 겸손하고 가난한 상태로 붙들어 맬 수 있는 하나님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음을 낮은 자리로 붙들어 매려면 삶의 환경 곧 육신의 형편이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환난 가운데 두시는 것이다.
사람이 배가 불러지면 볼 것을 보지 않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된다. 사람이 자기 영광(육신의 자랑과 영광)을 돌아보게 되는 자리로까지 배가 불러지면 그는 위험에 처한 것이다. 그때 우리는 자기를 자랑하며 남을 판단하며 하나님께 따지며 사람이나 환경이나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으니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바울은 자기의 의 곧 자기의 모든 세상적 영광과 자랑과 기득권을 다 포기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이 자기(사람)를 위해 예비하신 진정한 의(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얻는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 유대인으로서의 특권과 로마시민으로서의 특권, 선하고 성실하며 교양과 지성을 갖춘 일등 인생으로서의 자부심을 다 내려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렇게 한 것처럼 갈라디아교회 형제들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가 형제들에게 바라는 바를 다른 말로 옮기자면 이런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써, 즉 자기의 선하고 성실한 마음과 의지, 지성, 열심을 믿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생각과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인정)을 받으려는 생각을 버려라. 그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한 때 당당한 유대인이었던 나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흠도 없고 언제나 나 자신의 의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노력했지만 어느 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은 다 헛일이며 네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네가 하는 그 모든 일들은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를 대적하고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유대인으로서의 자랑과 특권을 다 버리고 너희와 같은 이방 죄인의 자리로 내려갔다. 그러므로 너희들도 일치감치 율법으로(자기의 선하고 성실한 행위로) 의에 이르겠다는 망상을 버리고 나와 같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도록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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