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이 단순히 하나님을 알거나 예수를 알거나 복음을 알게 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오직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참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서 범사에 아버지(하나님)를 실제로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는 사람들 안에서 이처럼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되기까지는 사역을 중단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이며 그 사람의 인격과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부르심 받은 모든 사람의 목표요 목적지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이런 자리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셨고 또한 교회를 세우사 우리로 그 안에 있게 하셨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1-15)
그러므로 교회는 천당을 가기 위해 다니거나 그냥 다니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조성해 놓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생활을 통해서 반드시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며 그리스도를 깊이 누려서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한다.
이것이 안되면 다른 것은 사실상 다 소용없는 일이다. 내게도 소용없고 하나님께도 소용없는 것이다. 그보다 못한 단계까지 가는 것은 하나님께 기쁨이 안되고 내게도 영광이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다가 알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거기서 그치면 그는 결국 유대인과 같이 되고 말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며 자신 또한 유익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에 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리까지는 나아갔으나 거기서 그친다면 그는 하나님과 예수를 함께 신으로 섬기는 종교인(천주교인이나 그리스 정교회 신자)과 같이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복음을 아는 자리까지 나아간다면 그것은 정말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친다면 그 사람은 진리는 알지만 실제로는 기쁨과 안식과 자유가 없는 오늘날의 개신교인들과 같이 될 뿐 참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나아가야 하는가? 어디까지 진보해야 실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 참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오직 범사에 실제로 성령의 인도를 받고, 범사에 실제로 아들의 생명을 누리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자기 안에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
특별한 사람만이 이렇게 될 수 있는가? 이것은 매우 어렵고 도달하기 힘든 높은 경지의 신앙 생활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 부르신 모든 사람들을 다 이런 자리로 부르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다 이런 사람이어야 하며 또한 이렇게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부르신 모든 사람들을 다 이렇게 만드시기로 작정하고 계시며 또한 그것을 위해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내가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일하시며 애쓰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루 하루 겪는 모든 일상사를 총동원해서 우리로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자가 되도록 역사하고 계신다. 그는 결코 부르신 자들을 그냥 죄인의 상태로 내버려두시지 않고 실제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정상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로 세움을 입은 자들은 어떤 체험과 단련을 거쳐서라도 결국 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참 하나님의 아들로 서게 될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세워지고 하나님의 아들로 조성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지 못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모습(형상)을 하고 있는 것을 참아 볼 수 없었다. 어떤 이유로든지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자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욱 하나님의 문제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자들로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아들의 나라이며 아들의 정신과 인격을 가진 자들로만 형성되는 나라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아들(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서지 못한다. 마귀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허용하되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으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앞에서 본 로마서 8:28-30 말씀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그를 닮은 많은 아들들을 얻고자 하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독자로 있지 않고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 중의 맏아들이 되게 하시겠다는 뜻을 세우셨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하나님은 오직 한 아들만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많은 아들들을 원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불충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너무 귀하고 너무 완전하게 아버지를 만족시키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그리스도를 더 얻으시며 확대하고 충만케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홀로 있게 하지 않고 그 아들로부터 나온, 그 아들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고 그 아들을 닮은 많은 아들들과 함께 있게 하시려고 하신다.
바로 이런 뜻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만들어진 것이고 또한 (타락 후에는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구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1,2)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사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았기 또한 그리스도를 담고 그리스도를 나타내어야 하며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바쳐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없는 사람은 존재 의미가 없는 사람이며 생명 없는 시체요 괴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지막날 그런 사람들을 다 멸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사람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6-28)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어졌다는 것은 사람이 단순히 흙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이다. 사람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지어졌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마음과 영광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형상인 것처럼 사람도 또한 그러하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1:15)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이 말씀들은 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라(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 역시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11:7)
여기서 남자는 사람의 대표이므로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인 것이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11:3)
이 말씀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한 생명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여자가 남자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 같은 사람이요 하나라는 사실을 안다면 남자(사람) 또한 그리스도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라는 사실과 또한 아들인 고로 또한 아버지(하나님)와 하나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그 머리로 삼고 있는 (즉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사람은 단순한 흙이 아니요 하나님의 숨결을 그 속에 담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과 인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신(대표)하여 이 땅에서 만물을 다스리는 자이다.
이러한 사람의 지위는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즉 사람의 근본(원형)이신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사람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려면 참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형상이시니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말하며 그에 대해 아는 것 같지만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그의 삶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는 이 질문의 답은 곧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살지 못하는가 하는 것에 대답이 될 것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주님의 마지막 큰 기도'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그가 어떤 분이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그의 삶이 어떤 삶이었기에 참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살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주님의 특징 또는 주님의 삶의 특징을 간단히 요약하면, 첫째,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으로 안 것과 달리)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았고 자기를 그의 아들로 알았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자기 인생이 오직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은 자로서 그에게 전적으로 드려져야 할 인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 속에 '아버지의 뜻' 외의 '자기 뜻'이라는 것이 달리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아무 거리낌 없이 순종하실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요17:4-6)
자기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갈등이나 충돌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 내 뜻을 이룰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인지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육신의 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역의 완급을 조절하신 적은 있어도 그 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한 번도 고민하신 적이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오" 라고 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으로 인한 고통을 표현한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최종적으로 타진하는 기도였지 결코 자기 뜻을 내세워 하나님의 뜻을 꺾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주 예수님이 한 번도 자기 뜻을 내세우거나 추구하지 않았고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이름과 영광을 나타내지도 않고 오직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그 이름을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라는) 자기의 지음 받은 자리 곧 자기의 보냄 받은 자리를 아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17:4-6)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는 이 말씀은 그가 어떻게 사셨는가 하는 것을 한 마디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다르게 행동하는 이유는 자기는 사람이고 하나님은 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을 자기와 다른 존재로 알지 않고 한 생명을 가진 아버지로 알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이 곧 내 일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곧 내 영광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했다.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2,34)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6:38,39)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사11:1,2)
주님 안에는 다른 기쁨 곧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 일 외에 특별히 '자기 일, '자기 기쁨'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는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며 그의 일을 이루는 것으로 자기 양식과 기쁨을 삼았다. 이것이 바로 참 사람의 모습이다.
아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길 자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며 가까이할 자로 안다는 것이다. 그 뜻을 내가 이루어주면 그가 또한 내 뜻을 이루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뜻이 내 뜻이므로 오직 그것만 추구한다는 것이 아들의 특징이다.
주님으로부터 떡을 얻어먹은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썩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양식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되물었다. 사람들의 관념은 늘 이와 같다. 내게 어떤 뜻이 있는데 즉 내가 무엇을 얻고 싶은데 그것이 내 힘으로는 안되고 하나님께 부탁을 드려서 얻을 수밖에 없고 그러자니 내가 (별로 원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 이루어드려야겠다 하는 식이다.
무릇 자기 뜻이 있는 사람은 '아버지'는 될 수 있어도 '아들'은 될 수 없다. 아버지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지만 아들은 순종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아들이 되려면 자기 뜻이 없어야 한다. 아들의 특징은 오직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뿐 다른 어떤 자기 뜻이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과 별도로 자기 뜻이라는 것이 있는 사람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라도) 결국 그것을 추구하게 되지 아버지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내게 하나님을 위할 소망이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어떤 뜻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내 안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있고 오직 하나님의 마음(생명)만 있다면 나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되지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도 있고 내 생각도 있으면 갈등이 있게 되고 온전히 순종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두 개의 생각이 있고 두 개의 뜻이 있는 사람에게는 영광도 두 가지이다. 내 뜻을 세우면 내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 (내 영광은 안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뜻이 있는 사람은 영광도 내 영광(육신의 자랑, 세상 영광)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좇게 되고 그러다가 인생을 허무하게 마치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이 아담을 속인 내용과 과정을 잘 보아야 한다.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영광)만 있었는데 사탄은 마치 그것과 별도의 내 뜻(사람의 뜻), 내 생각, 내 영광이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사람을 속였다. 사람이 마귀의 꾀임을 따라 선악과를 먹게 되자 눈이 밝아지게 되었다. 이때 사람의 눈에는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가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눈이 좋아졌다는 것이 아니라 눈이 혼란스럽게 되었고 눈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눈을 만드실 때 한 군데만 보도록 또는 앞만 보도록 만드셨는데 선악과를 먹은 후 사람은 여러 군데를 동시에 볼 수 있게 되었고 앞도 보고 옆도 보고 뒤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만 보도록 만들어진 눈이 이제는 온갖 것을 다 보게 되었고, 진리만 보도록 만들어진 눈은 마귀의 거짓말도 같이 보게 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원한 영광만 보도록 만들어진 눈은 잠시 있다가 없어질 세상 영광을 함께 보게끔 타락해버렸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것이요 혼란에 빠진 것이다. 사람이 그 지음 받은 대로 생각하지 않고 그 지음 받은대로 보고 듣고 말하지 않고 허무하고 무의미한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많은 것을 바라보고 많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영광과 발전과 진보로 가는 것이 아니라 허무와 퇴보와 멸망에 빠진 것이다.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를 닮고 그의 생명을 누린다. 그러나 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를 그릇되게 알면 그를 닮을 수 없고 그의 생명을 누릴 수 없다.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닮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잘못 알고 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닮고자 할 때 먼저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는 착하고 선한 사람이니 나도 착하고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를 잘못 안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는 착하고 선한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지만 그 보다 더 근본적인 주님의 모습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문제는 사람이 왜 착하고 선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범죄하며 못됐고 악한 인생을 사느냐 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세상 어느 사람도 고의적으로 악을 추구하며 죄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결국은 자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죄를 짓고 만다. 그렇게 되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람 안에 하나님의 뜻과 다른 [자기 뜻]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 뜻과 자기 영광이라는 것이 사람 안에 있는 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은 추구되지 못한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그 마음의 생각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사탄은 사람 안에 생각이 생기도록 만들고자 했다. 이로 인해 사탄은 사람을 속여 선악과를 먹게 했다. 선악과를 먹으면 선악을 아는 지식이 생기고 이것은 곧 사람이 자기 뜻을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자기 생각과 판단에 따라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되는 길을 열기 때문이다.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려면(회복되려면) '생각'(자기 뜻)을 버리고 '생명'을 받아들여야 하며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 생각을 따라 사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떠나 사탄의 사주대로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생명과를 먹는 것에 해당하는데) 사람이 사탄에 의해 사주되고 허무하게 된 자기 생각과 계획을 따라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생명(뜻)을 따라 사는 삶의 구조(생각의 system)를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