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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라고 말함으로써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태도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만일 계속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율법을 붙잡고자 한다면 너희는 약속의 자녀가 아니고 따라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하고자 했다.
그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야기를 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은 아브라함의 정부인인 사라에게서 난 아들 이삭과 여종 하갈에게서 난 아들 이스마엘이다.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주인이요 자유인이요 정실부인이었고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은 종이요 첩이었다. 이 신분의 차이는 그들의 자식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이삭은 아브라함과 영원히 함께 있으며 그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지만 이스마엘은 자란 후에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운명이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은 그들의 됨됨이나 행위가 원인이 아니라 출신과 배경이 원인이었다.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가장 큰 배경은 어머니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느냐 아니면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았느냐 하는 차이였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은 자였고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조급한 육적 생각의 산물이었다.
하나님과 사람이 경쟁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이긴다. 아브라함은 본의 아니게 하나님과 경쟁을 했다. 사라의 몸에서 나올 자식을 계획하신 하나님과 그것은 희망이 없으니 젊은 여종에게서나 아들을 얻자고 생각한 아브라함 간에 싸움이 벌어졌고 처음에는 아브라함이 이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14살이나 되었을 때 이삭을 생산하시고야 말았다. 이래서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둘 다를 보존하고 싶었다. 둘 다 자기 자식이므로 아끼고 사랑하며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나 둘은 공존할 수 없었고 결국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아들만 곁에 두고 자기 생각과 혈기와 능력으로 말미암은 아들은 내쫓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 이상 그는 결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었다. 하나님이 만물의 설계자요 주관자이시다. 이것을 아는 사람, 이것을 아는 세계로 이끌림을 받은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 만물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되고야 만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뜻은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패배 당하고 말았다.
바울은 이 이야기가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과 이삭과 이스마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자아, 성령과 육신, 은혜와 율법, 믿음과 인간의 노력, 새 언약과 옛 언약,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과 사람의 계획과 야망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우선 바울은 사라와 하갈을 신약(새 언약)과 구약(옛 언약)으로 비유했다. 그러므로 사라가 신약(새 언약)이면 이삭은 새 언약 곧 성령의 인도 아래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되고 이는 곧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인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은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반면에 하갈이 구약이라면 거기서 난 아들 이스마엘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 곧 성령이 오셨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의 복음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를 신뢰하며 율법(자기 행위) 안에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오늘날의 종교적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사라와 이삭, 하갈과 이스마엘의 운명과 결과에 대해서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약속 안에 거하는 자들 곧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성령으로 인도되는 무리들과 자기를 신뢰하고 육체의 생각과 능력을 따라 사는 무리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우리는 헷갈릴 필요가 없다.
계속해서 바울은 하갈이 상징하고 있는 바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시내산}과 {예루살렘}이다. 시내산은 생명을 주지 못하는 {의문(儀文) 율법}을 상징하는 것이며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본산으로서 결국 {인간이 만들고 유지하는 종교}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라는 무엇을 상징하겠는가? 그것은 {갈보리산}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며 와 새 언약의 내용이신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며 땅의 예루살렘과 대조되는 하늘의 예루살렘 곧 '그리스도의 신부로 세워져 가는 새 예루살렘'으로서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는 범사에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의 운명과 교회요 신자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제는 자아와 육체와 세상밖에 없는 사람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사라와 하갈, 이삭과 이스마엘의 운명을 통해서 깊이 깨닫고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바울은 27절에서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는 말을 한다. 잉태치 못하는 자, 해산하지 못하는 자, 홀로 사는 자는 사라를 나타내는 것이다. 사라는 하갈이 잉태할 때 잉태하지 못했고 하갈이 구로(산통)할 때 구로하지 못했다. 그는 남편이 하갈과 함께 있을 때 홀로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겼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을 주셨고 그로 말미암아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누가 이기는가? 누가 마지막에 승리하고 영광을 얻는가? 큰 소리 치는 자도 아니요 힘 있는 자도 아니요 재간이 많고 꾀가 많은 자도 아니다. 오직 승리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의 것이다. 외형으로 볼 때 힘도 능력도 잘난 것도 지위도 가진 것도 없는 자들 곧 무력하고 무능하고 가난하여 그 마음이 갈급하고 가난하고 낮아진 자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히 여기심과 하나님의 능력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승리자가 될 것이다.
자기 생각과 야망과 정욕과 지혜를 부정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운명과 생각과 일과 능력을 받아(의지하며) 사는 자,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지 않고 믿음으로 약속을 붙들며 사는 자, 이런 자들은 언제나 소수이고 작고 힘이 없다. 이 새 언약의 백성들은 주님으로부터 '적은 무리'(little flock ; 눅12:32)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들이 언제나 승리하며 여기서 나오는 열매가 온 세상의 모든 열매를 이긴다. 주님이 세우시고 이끄시는 이 참 그리스도인들의 役事(열매)는 외형적으로 볼 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세상 또는 교회 안에 있는 다수의 거짓 신자들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게 될 것이다. 교회는 작은 것이지만 세상을 이기며, 그루터기와 씨는 작은 것이지만 모든 것이 불타고 초토화된 후에도 살아남아서 그 생명의 영광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신자의 위치는 무엇이며 신자의 뿌리는 무엇인가? 하갈이 아니라 사라이며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다. 그것은 교회가 사람으로 말미암아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그리스도)으로 말미암아 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그리스도인)는 결코 사람의 뜻과 사람의 능력으로 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모여서 세웠다 하더라도 성령이 그것을 인도하신 것이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능력 안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산물이며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
약속은 언제나 인내와 믿음을 동반한다. 약속으로 말미암고 또한 그 약속을 오래 참고 기다리는 가운데서 난 것이 교회이며, 사람의 모든 것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뜻과 능력에 따라 생산하신 것이 바로 (이삭으로 예표된) 교회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항상 인내하는 삶이며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며 오래 참고 기다리는 삶이다. 이것이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다.
교회의 일,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사업)은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성전으로, 성도로 빚어가시는 것을 오래 참으며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조급해서는 안된다. 조급하면 이스마엘이 나오고 만다. 육신의 생각과 육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고 지연시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약속을 받았고 기다리다가 지쳐서 86세에 계집종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고 마침내 100살에 이르러 부인으로부터 이삭을 낳았다. 아브라함 생각에는 약속 다음해(76세)에 바로 이삭이 나왔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76살에 놓지 않고 100살에 아들을 낳았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인생이 잘못되거나 손해볼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도 75년을 더 살아 175세에 죽었다. 오늘날은 175세까지 살지 못하고 잘 살면 그 반 정도 사니 요즘으로 따지면 아브라함은 37살에 약속을 받았고 50살에 약속대로 아들을 낳았고 86세에 죽은 셈이다. 그는 늦게 본 이삭으로부터 손자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는 것을 보았으며 그 손자들과 15년 정도를 같이 살았다. 그러므로 그의 인생에서 무언가 늦어져서 안된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육체로 행하게 되는 것은 조급하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과 계획이 있는데 그것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조급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이며 자기 마음대로 육체대로 행동해 버리는 것이다.

바울은 약속의 자녀가 종의 자식으로부터 핍박을 받는다고 말한다. 교회가 그 진리 안에 속한 실체를 정확하게 세상에 드러내면 세상은 이들로 말미암아 자신의 어두움이 드러나게 되거나 자신이 구축해놓은 것들이 무너지게 될까 싶어서 교회를 반대하며 핍박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오직 아들의 생명,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약속, 오직 성령을 붙잡는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반대자들 곧 인간 자신의 의를 나타내고 싶어서 율법을 계속 붙잡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반대와 핍박을 받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사람들을 내치시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고자 하는 사람들만 받으신다. 옛날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집에 있는 계집종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있어야 할 약속의 아들은 오직 이삭뿐이었기 때문이고 또한 이삭이 잘되려면 이스마엘이 그 옆에 함께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와 운명에 대해 말한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를 의지하는 자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 하늘로부터 온 영광을 자랑하지 않고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 영을 좇지 않고 육을 좇아 행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마지막날에 세상에서 다 제거하실 것이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유업(천국)을 얻지(상속받지) 못하며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다. 하나님은 오직 그 아들 그리스도만 받으시며 그와 함께 사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지 못할 것이다.

지금 마귀가 사람들을 어떻게 하든지 율법과 육체와 세상 아래 붙들어 두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되어야만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자기와 함께 지옥으로 데려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이것을 알기 때문에 사탄이 교회 안에까지 침투하여 신자들로 율법과 자아(육체)에 집착하도록 미혹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잘 알아야 한다. 속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 그러므로 자기로 육체로 자랑할 것도 없고 육체를 의지할 수도 없는 자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 자신이 죽음으로써 죄에 대해서 자유하게 되었고(롬6:10,11) 율법에 대해서 자유하게 되었다.(롬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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