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 말씀에서 바울은 우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한다. 우리의 구원은 자유를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어떤 속박에서 우리를 풀어서 자유롭게 만들려고 작정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이렇게 작정하셨으니 우리는 결국 자유인이 되고 말 것이다. 현재 우리 현실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는 이미 자유롭게 된 부분도 있고 아직 매여 있으나 풀려나고 있는 부분도 있다. 문제는 어떤 자유냐 하는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자유를 얻었지만 이 자유는 육체의 정과 욕심을 만족시켜주는 자유가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자유 곧 사람을 마음껏 섬기는 자유라고 한다. 이 자유는 결국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자유이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사는 자유이며 하나님의 마음과 뜻(말씀)을 따라 서로 사랑하며 섬기며 살 수 있는 자유인 것이다. 이것은 결국 생명의 자유이며 인간다운 삶의 자유이다. 육신의 자유가 아니라 영의 자유이며 다른 말로 하면 육신의 욕망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영의 욕망대로 살 수 있는 자유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자유는 분명하게 생명 안의 자유요 진리 안의 자유이다.
숲 속에 살아야 하는 원숭이가 사람의 돈벌이 수단이 되기 위해 잡혀 와서 도로 한복판에서 쇠줄에 묶인 채 재롱을 부리고 있으면 그는 자유의 상태가 아니라 속박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 원숭이를 자유롭게 만들었다면 원숭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의 진정한 자유 상태란 어떤 것인가?
만일 약장사에게 묶여 있던 그 원숭이가 말하기를 '이제부터 나는 주인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 도시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직접 상대해 재롱을 부리고 공연해서 돈을 벌어야겠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먹을 것도 사 먹고 사람들에게 인기도 얻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한다면 그 원숭이는 참 자유를 누리는 것인가? 그 원숭이가 도시를 돌아다니며 돈을 벌고 인기를 얻더라도 그것은 원숭이의 진정한 삶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원숭이의 지음 받은 생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야생 동물들을 집에서 애완용으로 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뱀이나 도마뱀도 집에서 기른다. 그러나 아무리 최선을 다해 돌봐주더라도 그들에게 그 환경이 참 자유와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원숭이나 그런 야생 동물들은 본래 그런 환경이 아닌 (그것은 사람의 환경일뿐이다) 자연의 숲이나 들에서 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숭이나 너구리나 도마뱀은 자기 마음대로(사탄에게 속은 망상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 다른 짐승들과 풀과 나무와 벌레들이 들끓는 숲이나 들로 가서 살아야 자유의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같은 예를 다시 더 들어보자. 가출하여 직업 소개소를 전전하다가 혹은 인신매매로 잡혀 와서 집에 가두어진 채 사람들에게 술을 팔거나 몸을 팔며 혹사를 당하고 있는 어린 소녀가 있다. 그런데 누가 신고를 해 주어서 경찰이 오고 풀려나게 되었다. 그는 이제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떤 상태가 자유의 상태인가?
만일 그 소녀가 '이제까지는 내가 죽도록 일을 해도 돈을 주인에게 부당하게 뜯겼으므로 내 먹고 싶은 것 하나 마음대로 사 먹을 수 없고 내 사고 옷 하나 마음대로 사 입을 수 없었고 또한 시중을 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남자 친구가 아니라 주인에 의해 강요된 사람에게 시중을 들었으니 이제부터는 술을 팔든지 몸을 팔아서 돈을 벌면 내가 제대로 챙겨서 내가 원하는 사람과 내 마음대로 즐겁게 돈을 써야지' 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한다면 그는 과연 자유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겠는가?
누구라도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이전에 있던 속박과 노예의 상태를 모양만 바꾸어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임을 알 것이다. 그 소녀가 근본적으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집으로 돌아가 부모의 사랑과 관심 아래서 크는 것이다. 잔소리를 듣더라도 집에 있어야 하고 회초리를 맞더라도 학교에서 선생님 밑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17,8세 소녀의 자유는 이렇듯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의 정함없는 생각대로 일이 되는 것이 자유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도 정해져 있다. 내 마음대로 그것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으심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나의 삶의 자리는 정해져 있는 것이며 그 지으심과 부르심의 자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 자유란 무엇인가? 이것은 상당히 상대적인 것이다. 한편으로 자유인 것이 다른 한편으로 구속(매임)이다. 내가 죄와 불의, 거짓으로부터의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의, 진리를 향한 구속이며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의 자유는 마귀의 거짓말로의 구속이다. 절대적인 자유란 없다. 어떤 상태의 변화가 있을 따름이며 선 자리, 속해 있는 위치의 변화가 있을 따름이지 절대적인 변화는 없다. 내가 장성하여 결혼을 하면 부모를 떠나 부모로부터 자유하게 되지만 그것은 곧 아내나 남편 또는 자녀에게 매이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지긋지긋한 학교와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떠나 자유하게 되면 그것은 곧 직장과 직장 상사에게 매이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부하기 싫어서 혹은 선생님이 싫어서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중퇴하는 학생은 어떤 자유를 얻는가? 대낮에 어슬렁거리며 불량배들과 어울리는 자유를 얻을 따름이다. 당연히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구속일 뿐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도 없고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구속이란 것도 없다. 누구에게서 자유하며 누구에게 매이느냐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와 율법(자아)와 육신의 정욕과 세상과 마귀로부터의 자유이다. 이것은 곧 의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몸을 바치는 삶과 천국과 진리에로의 구속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유를 오해하여 방종하면 안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육체의 욕망대로 살도록 풀어주신 것이 아니다. 오직 마귀로 말미암은 허무한(타락한) 생각과 일들에서 벗어나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인간 본연의 길로 가도록 하기 위해 모든 속박에서 풀어 자유를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도로 위의 원숭이는 제 맘대로 도시를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숲으로 돌아가서 나무 사이를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것처럼 죄와 허무한 일에 매여 종노릇하던 인생은 그 얻은 자유를 정함이 없는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켜주는데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써야 한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6:15-22)
우리 몸, 우리 육체에는 자기 마음대로 즉 자기의 동물적 욕구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율법을 지키라는 거짓 선생들의 충동을 받은 갈라디아교회의 일부 신자들이 아무리 온 율법을 다 지키려고 나선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공할 수 없으며 역설적이지만 율법은 오직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된 사람들만이 온전히 지킬 수 있다. 사람이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그에게 그것을 아는 지식과 그것을 원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가 죄와 육신의 정욕과 자아와 세상과 마귀와 그 거짓말 등 여러 속박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려고 애써도 갈등만 느낄 뿐 결국은 자기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가 생명이고 능력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순종할) 수 있는 능력은 생명 아닌 모든 속박으로부터 풀려나 생명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에게만 있다.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자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자유이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생명을 얻음으로써 얻은 것이다. 이 자유는 얼마나 완전하고 놀라운 자유인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는 자유, 바로 이것이 우리의 자유이다.
생각해 보면 모든 율법은 오직 자유인만이 완전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지킬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종업원에게 일을 제대로 시키려면 열 가지 백 가지 규정과 의무와 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주인에게는 아무 법도 규례도 필요 없다. 누가 와서 그가 일하는 것을 뜯어말리거나 방해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것은 주인에게 있어서 그 일은 자기 일이고 자기 돈벌이요 자기 행복이기 때문이다. 주인과 종업원, 자유자와 매인자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이것이니, 주인에게는 일에 대한 사랑이 있고 종업원에게는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사랑'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만 있으면 아무 율법도 필요 없다. 참으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자기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사람, 바로 이것이 자유인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고 싶은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이 일을 단지 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할 수 있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이 자유인이다. 우리는 죄를 짓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죄를 짓지 않아도 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자유인이라는 것이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롬6:14)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오해하며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된다. 육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절제와 순종을 (외식이라고 생각하여) 거부하고 그 감정과 감각대로 행동하는 것을 자유와 진실한 행동으로 생각하고 육체대로 행한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며 사탄에게 깊이 속은 것이다. 진리에서 벗어나 육체대로 행하는 것은 사탄과 그 거짓말의 종이 되는 것이요 육체의 정욕의 종이 되는 것이지 참 자유가 아니다. 오직 진리대로, 생명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이다.
무언가 생명 아닌 것, 영이 원치 않는 것은 하지 않고 오직 생명대로 행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참 자유이다. 영이 원치 않는데도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면 이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자유 없는 종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견고한 것이다. 그것은 이 자유에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의 확고한 뒷받침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그리스도의 영 또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람에게 영과 생명이 되어서 사람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제 것으로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사람을 능히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만드는 역사를 하신다는 것이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든 요구(율법)가 이루어지게 만드는 성령의 역사가 있으므로 우리의 자유는 견고한 것이다. (롬8:3-8)
둘째, 성령이 육체에 생명을 공급하셔서 죄의 몸 및 죽을 환경 속에서도 능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 영이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에 빚진 자처럼 육신에게 져서 살 필요가 없고 이 몸을 가지고도 능히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롬8:11-14)
셋째, 하나님이 우리 삶의 환경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자로 자라도록 모든 환경을 조성하시고 간섭하시며 돌보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롬8:28-39)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는 가공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이상(理想)과 소망이 아니라 언제나 실제로 누릴 수 있는 참되고 확고한 자유이다. 사탄이 우리의 자유를 방해하고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이 자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영으로 행하지 않고 육(자아)으로 행할 때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영을 좇아 행하는 한 우리는 모든 일에 우리의 원대로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할 수 있는 참 자유인이 되며 아무도 이러한 우리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