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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지난 주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케 된 우리는 그 자유를 육체의 정욕을 위해 쓸 수 없고 그것을 오직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내기 위해서 써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자유는 허무하고 헛된 인생으로부터의 자유요 썩어질 육체의 정욕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데서의 자유이지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 곧 생명과 진리의 말씀으로부터의 자유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몸(인생)을 육체의 욕구 곧 육체의 자랑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써서는 안되고 오직 영의 욕구 곧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우리의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써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4에서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다'고 말한다. 율법은 여러 가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으나 그 핵심은 결국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라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그렇다. 생명의 길은 사람이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함께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는 한 말씀만 제대로 하면 다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이 말은 바울 개인의 견해(해석)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율법은 사람에게 그 생명과 반하는 어떤 '일'을 명하거나 '짐'을 부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에게 생명이 되는 길 곧 '생명의 길'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사람이 사랑 안에서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사랑 안에서만 온전히 서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사탄은 이 진리가 드러나지 못하도록 감추고 대신 네가 살려면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서야 한다고 속삭인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서로 물고 먹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것은 공연한 경고가 아니라 생명의 속성상 실제로 그렇게 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사랑은 생명과 하나이며 미움과 다툼은 죽음과 하나이다.

이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자기도 사람(형제)을 온전히 사랑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게 된다. 율법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낸 것이요 그것은 오직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의 온 힘을 다해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 우리의 능력, 우리의 지혜, 우리의 소유를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는데 쓰고 싶지 않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며 섬기는 도구로 삼아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 일의 성사가 우리의 (이렇게 좋은) 소원과 마음에만 달려 있으면 좋은데 그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우리(육체)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육신의 능력 곧 우리 육신이 과연 우리 영의 이러한 거룩한 욕망을 따라주며 바쳐줄 것인가 하는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를 제쳐놓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타락 후 육체(인간)는 그 속성상 육체 자신의 기쁨과 만족, 육체 자신의 영광과 자랑을 위해 움직이게 되어 있고 그것은 매우 강력하고 본능적인 것이어서 아무리 사람 안에 거룩한 영의 욕망이 있다 할지라도 이것을 이기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유를 얻는다 해도 이 자유는 거의 육체의 (만족과 자랑과 영광의) 기회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단지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해라는 권면만으로는 부족하고 근본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그래서 바울은 16절에서 그 방법을 말하게 된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매우 간단하다. 그 어떤 다른 수고와 노력도 하지 말고 오직 성령을 좇으라는 것이다. 어떻게 성령만 좇으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는가? 그것은 그 둘이 서로 대적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로마서 7:14-25에서 육신(인간)의 실상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한 바 있다. 여기서 바울은 말하기를 인간은 선한 욕망(영의 욕망)과 악하고 허무한 욕망(육체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그 결과는 육체의 승리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갈5:17 말씀은 바로 이 로마서 7:14-25을 바탕으로 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육신 안에는 절대로 답이 없다. 그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도 안되고 그 어떤 방법도 안된다. 그것은 생각과 의지(意志) 이전의 문제 곧 본성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간단하고도 근본적인 방법을 말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생명'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말은 "성령으로 살라"는 말이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사는 것이고 나는 죽는 것이다. 여기서 '나'라는 것은 육신의 생명으로 사는 자연인으로서의 우리 자신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이 말씀을 로마서 8:1-17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새로운 사람에 대해 말하는데 그 사람은 '육신을 좇지 않고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아담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범사에 실제로 그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육신을 좇는 사람 곧 육신의 생명대로 사는 사람, 자연인 그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율법은 오직 정죄밖에 가져다 줄 것이 없다. 율법의 모든 요구는 오직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사람'에게서만 이루어진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요 하나님의 뜻이다.  

바울이 말하는 바의 핵심은 누구든지 자신의 힘으로 죄와 싸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하여 아들의 생명으로 행하는 사람만이 모든 싸움에서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를 비롯한 그의 서신에서 바울은 서로 짝을 이루는 네 가지의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담과 그리스도, 그리고 육과 영이다. 아담 안에 있는 삶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 짝을 이루고 육을 따라 사는 삶과 영을 따라 사는 삶이 짝을 이룬다. 로마서 5-8장은 특히 이 부분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는데, 롬5:12-6:23은 [아담 안에서] 對 [그리스도 안에서]에 대해 말하고 있고 롬7:1-8:39은 [육 안에서] 對 [영 안에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담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의 위치를 설명하는 것이고 '육 안에서'와 '영 안에서'는 우리의 실제 삶에서의 행동 원리를 말한 것이다. '아담 안에서'는 우리의 출생으로 말미암아 얻은 우리의 과거 위치이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얻은 현재의 위치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의 중요성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영 안에서 행해야' 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승리의 삶을 살려면 반드시 성령으로 행하는 삶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언제든지 육으로 살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할 경우 그의 삶은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아담 안에 있는 사람)의 삶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실패의 삶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육으로 산다는 것은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일반적인 삶의 원리이다. 육으로 사는 자의 특징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육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무엇이든지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육신의 생명 곧 아담의 생명은 죄 짓는데(육신의 욕망을 달성하려는데) 매우 적합하며 민첩하다. 그 생명은 그 일을 하는데 매우 자연스럽다. 마찬가지로 새 생명 곧 그리스도의 생명도 그런 자연스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며 그 영광을 추구하는데 매우 민첩하고 자연스럽다. 생명 자체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섬길 만반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간단히 말하면 육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지금은 옛 사람의 자연적인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고 있다. 이 생명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구조 또는 원리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영(거듭난 생명)을 주장하시고 그 영은 우리 몸을 지배하여 하나님께 봉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사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사는 삶을 단지 객관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 깊이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상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지 성령으로 살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영적 사실들은 실제 생활에서 전혀 구현이 안되게 된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믿는 바를 실제로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으며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이제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내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일에 직면했을 때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친히 역사해 주십시오" 하고 정말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믿고 맡기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사는 것이다.

믿음이란 성령으로 행하는(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단지 안식이 아니라 한편으로 일이다. 다만 무언가를 하려고 애써서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즉 성령으로 사는 것은 문제를 만났을 때, 첫째, 염려하거나 요동하거나 발버둥을 치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며, 둘째, 그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의 여러 문제들 예컨대 급한 성질과 더러운 생각들, 경솔하고 날카로운 혀와 같은 것들로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처리하려고 육신의 힘으로 노력을 하는 것은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신이 하나님께 대해 죽은 자임을 고백함과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이미 죽었음을 믿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겸손과 온유함과 깨끗함을 나타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4:13)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다. 위기를 만났을 때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며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결코 손을 풀고 문제를 방치하는 것이 아니며 결코 노는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육신의 그 어떤 노력보다 실제적인 일이다.

성령으로 행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놀라운 승리를 체험할 수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들을 때로 한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은 기적도 아니고 특별한 일도 아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일상적인 일이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을 수행하실 때 우리는 아무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노력은 성령께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으로 족하다. 다만 그를 붙잡고 믿고 구하면 된다. 주님으로 말미암는 승리는 참으로 쉽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를 악물고 인내에 인내를 거듭하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서 승리의 체험이 드문 것은 우리가 그만큼 자신을 깊이 신뢰하고 있으며 자아가 살아 있으며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탄의 시험의 목표는 언제나 우리로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무엇을 하게 하는 것이다. 열심 있는 신자를 향한 사탄의 유혹은 언제나 더러운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일을 자신의 힘으로 하도록 부추기는 것으로 나타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리고 자기가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것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의 욕망을 누르고 당신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두 존재가 우리 안에서 서로 삶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두 쪽을 다 지지할 수는 없다. 그런데 어느 한 쪽을 택하면 그 한편의 능력이 자동적으로 상대편의 능력과 싸워 이기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전적으로 우리가 택한 그 능력만 역사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육체를 따라 행하기로 마음먹으면 우리는 가만 내버려두어도 몸이 성령을 거스리고 오직 육적 소욕을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기로 마음먹으면 우리는 스스로 육체의 욕구를 누르려고 애쓰지 않더라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육체의 욕구를 누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말의 의미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노력이 아니라 단지 행함이다. 내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애쓰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그의 인도에 조용히 따르는 것이다. 전에 우리가 열매를 맺지도 못하면서 육신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쓰던 모든 노력은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골1:29)를 믿는 믿음에게 자리를 내주고 조용히 안식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특히 주의해야 할 사실은 조용히 안식한다는 것은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안식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하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그의 때를 기다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의 생각이 즉각적으로 실현될 때만 안식할 수 있을 뿐 그것이 조금이라도 지연되거나 좌절되면 결코 안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다.

둘째, 그것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이 복종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복종과는 다른 것이다.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내려놓는 차원에서 복종하는 것이다. 육신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육신의 요구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성령의 요구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곧 성령의 부담을 따라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도 결국은 행함이지 노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생각과 내 의지와 내 감정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의 부담을 따라 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의 입장에서 볼 때 노는 것도 아니요 쉬는 것도 아니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이요 때로는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육신의 욕망을 따라 몸이 정욕을 좇아 이리 저리 움직이는 것보다 더 많이 몸을 써야 할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몸의 상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몸이 움직이느냐 안 움직이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성령의 요구에 반응하느냐 아니면 몸 자신(육신)의 요구에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다. 육신은 자기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할 때에 안 움직이면 그것도 죽음이 되고 또한 자기 뜻에 반해 움직여야 할 때도 죽음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의 종이 아니요 하나님의 종이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 어떤 경우에도 할 수 없는 한 가지 일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는 일이다. 주님을 떠나서 그 말을 듣지 않을 자리로 간다면 그는 벌써 그리스도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의무는 성령께 복종하는 것이며 언제든지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삶의 주도권을 성령께 맡기고 철저히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는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우리 대부분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삶이 승리의 삶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지라도 우리가 범사에 실제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믿음으로 내맡기지 않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는 주님의 인도를 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아가 강하게 살아 있어서 주님을 청종하지 않는다. 성령님이 속에서 말씀하셔도 육신이 강하게 살아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잘 듣기 어려우며 또한 말씀의 부담을 가져도 거기에 복종하지 않으니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 모두 범사에 실제로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을 좇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풍성을 실제로 누릴 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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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룸 (1) (갈4:19) / 2002. 9. 1 이상봉 2010.05.03 2984
21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갈4:10-20) / 2002. 8. 25 이상봉 2010.05.03 2670
20 하나님의 아신 바 됨 (갈4:7-9) / 2002. 8. 18 이상봉 2010.05.03 3174
19 아들의 영을 받음 (갈4:1-11) / 2002. 8. 11 이상봉 2010.05.03 3541
18 때가 차매 (갈4:1-5) / 2002. 8. 4 이상봉 2010.05.03 5145
17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됨 (갈3:23-29) / 2002. 7. 28 이상봉 2010.05.03 5266
16 아브라함의 복 (갈3:13-22) / 2002. 7. 21 이상봉 2010.05.03 4172
15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됨 (2) (갈3:10-14) / 2002. 7. 14 이상봉 2010.05.03 4667
14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됨 (1) (갈3:10-14) / 2002. 7 .7 이상봉 2010.05.03 3073
13 아브라함에게 전해진 복음 (갈3:5-9) / 2002. 6. 30 이상봉 2010.05.03 3648
12 성령의 길과 육체의 길 (갈3:1-5) / 2002. 6. 23 이상봉 2010.05.03 3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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