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에 살핀 바와 같이 애굽 왕가에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는데 그때 새로 등장한 애굽 왕은 요셉의 공로를 알지 못했고 히브리 민족에 대해 이전 왕들이 취해온 것과 같은 우호적인 정책을 쓰지 않고 강압적인 정책을 쓰기로 생각을 바꿨다. 그는 히브리 사람들을 애굽 국민과 같이 대하지 않고 노예의 위치에 두어서 괴롭히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우선 숫자가 많고 강해진 이 백성을 약화시키고 와해시켜서 다루기 쉬운 상태로 만들고자 했다.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1:9-11)
실제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 사람들보다 숫자가 많고 강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애굽에서 소수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가 두려워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성한 생명력 곧 번식력이었다. 그래서 바로는 이스라엘을 고된 노역을 통해 약화시키고자 했다. 고된 노동을 시키면 남자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지쳐서 부인과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없으니 아무래도 아이를 낳는 것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런 정책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1:12上) 이스라엘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 많은 자녀들을 낳았다. 그러자 바로는 더 엄격하고 강도 높은 고역으로 이스라엘을 압박했다.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 하여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1:12-14)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1:20下)
이러한 사실은 사탄의 방해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을 약화시킬 수 없음을 보여준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친히 생명을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자를 죽일 수 있는 자는 없으며 하나님이 복 주셔서 강화시키고 형통케 하시는 자를 약화시키고 주저앉힐 수 있는 길은 없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구속되어 재판을 받기 위해 배를 타고 로마로 향하는 길에 올랐는데 그 배가 유라굴로라고 하는 무서운 태풍을 만났다. 그때 태풍이 너무나 심해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살 소망을 다 포기하기에 이르렀다.(행27:14-20) 그때 바울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1-25)
이 사람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자이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은 죽거나 다치고 싶어도 하나님의 일이 너무나 급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놓인 자리이다.
주님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게 될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막16:17,18)
전도자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야생으로 나갈 때 그는 독뱀에게 물릴 수도 있고 독풀이나 상한 음식을 먹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은 그가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환경에 놓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그의 종들을 안전하게 지켜 보호하신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육신적으로 편안하고 형통한 상태에 있을 것을 약속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5,16) 바울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매우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운명이었다.
그러므로 육신이 해를 받느냐 해를 받지 않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이라도 세상에서 종종 해를 받는다. 그러나 다만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셔서 그로 무너지지 않게 하시며 기어이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지켜 보호하신다는 점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문제지 다른 것은 다 문제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다면 우리 인생은 언제나 안전하고 형통할 것이며 우리의 길은 영원히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고생을 전혀 안 한다는 것이 아니라 고생을 하더라도 주 안에서(주님의 안식과 축복 안에서) 고생함으로써 어쨌든 평안하고 형통한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복음이란 하나님이 그의 긍휼과 사랑과 목적을 가지고 사람에게 다가오셔서 사람을 살리고 평안케 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살고 싶어서 몸부림치고 안전과 형통을 위해 조심하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필요를 위해 우리를 택하사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시며 형통케 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길은, 내가 내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세우고 그것의 달성을 위해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방향과 목적을 정하시고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를 부르신 자 안에서 소망과 계획을 가진다. 우리의 일은 앉아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의 역사를 지켜보며 누리며 찬송하는 것이다.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야곱에게 나로 아이를 낳게 하라고 다그쳤을 때 야곱은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고 말했다.(창30:1,2)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만 분명하게 안다면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본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소유로, 그의 영광을 나타낼 아들로 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고 우리 생명을 풍성케 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여기가 우리의 출발점이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1-39)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자기 뜻이 무산되는 것을 지켜본 애굽 왕은 화가 나서 더 적극적인 방법을 써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번성을 확실하게 막기로 작정했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1:15,16)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1:2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1:12上)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1:20下)
이 말씀들은 사탄의 방해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을 약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세상에서 가장 힘이 있는 자가 박해를 하는데 어떻게 힘이 약화되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생명을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바로는 간접적인 방법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뜻대로 약화되지 않자 직접 살인과 같은 방법을 통해 이스라엘을 확실하게 약화시키려고 시도했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1:15,16)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1:22)
이와 같이 사탄은 살인과 폭력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려 시도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남자들을 죽임으로써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려 했으며 그 가운데서 태어나게 될 구원자를 미리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이 하나님의 계획을 중단시키지 못하도록 성령을 통해 더 치밀하게 역사하심으로 사탄의 모든 시도를 무산시키셨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사망 권세로 막으려는 사탄의 시도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아벨의 경우에 그랬고 요셉의 경우에도 그랬으며 유다와 요아스 왕, 주 예수님의 경우에도 사탄은 살인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으려고 시도했다.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4:8,10)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사탄은 가인을 통해 아벨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씨를 없애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셋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의 계통을 이어가셨다.
"유다가 가로되 무슨 약조물을 네게 주랴 그가 가로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더라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면박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약조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창38:18-20,28)
사탄은 이스라엘의 장자 지파의 조상이 될 유다의 씨를 끊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다말로 하여금 유다 자신을 통해 쌍둥이를 낳게 하심으로써 그의 씨를 잇게 하셨다.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 왕의 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게 한 고로 아달랴가 저를 죽이지 못하였더라 여호사브앗은 여호람 왕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더라"(대하22:10,11)
아달랴가 유다 왕가의 씨를 없애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여호사브앗을 통해 요아스를 건져내어 왕가를 잇게 하셨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마2:16)
주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마귀는 헤롯의 손을 빌어 죽이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장성했을 때 유대인들의 손을 빌어 결국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하지만 마귀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 부모와 함께 애굽으로 피난케 함으로써 목숨을 보존하셨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사탄의 모든 시도는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1:17)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왕에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감히 왕명을 어기고 히브리인의 남자 아기를 살렸다. 이것은 목숨을 건 도박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런 산파들의 선택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이스라엘을 약속대로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에서 난 것으로, 마치 라합이 죽은 우상을 섬기는 자기 민족을 버리고 생명과 권능의 하나님을 택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1:20上,21)
왜 진실하신 하나님은 여기서 산파들이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들의 순종에 대해 칭찬하시며 은혜를 베푸셨는가? 그것은 진실이 생명과 관련된 것이지 단지 도덕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실과 거짓은 전체 줄기를 보고 판단해야지 지엽적인 것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행동을 표면적인 도덕률을 적용하여 판단한다면 그것은 형식 논리에 빠진 것이다. 형식적으로 보면 산파나 라합의 행위 혹은 다말의 행위는 불순종이나 불충성, 부도덕의 행위로 판단되겠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거스려 거짓된 삶을 요구하는 바로(사탄)의 요구 자체가 거짓이요 불의요 악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동조하여 순종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불의에 동참하는 것이요 거짓을 수용하는 것이 된다.
세상 법에도 이런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상급자로부터 인륜에서 악한 명령을 받은 하급자가 그 명령에 기계적으로 복종하여 악을 행했을 때는 처벌을 받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양민 학살이나 적극적인 부역 행위 등은 강제로 이루어진 경우에도 그 책임이 면해지지 않는다. (독일이 통일 된 후 서독으로 탈출하는 병사들을 사살한 동독 병사들은 큰 처벌을 받았다.) 왜냐하면 인간은 기계가 아니고 스스로 행위의 수용 여부를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