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건지실 때 구원자를 특별히 예비하심이 없이도 얼마든지 구원하실 수 있을 텐데 왜 꼭 구원자를 예비하셔야만 했던가? 하나님이 친히 그의 능하신 팔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면 될 것인데 왜 굳이 모세라는 구원자를 오랜 세월 동안 준비하셔야만 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유는 이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모든 일은 사람이 그 도구가 되어서 하나님과 합력(동역)하여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의문은 남는다. 어차피 사람은 하나님의 일의 도구에 불과하고 일의 주체는 하나님 자신이라면 사람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얼마든지 놀라운 역량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은가?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자를 아무나 뽑아 보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실 수 있지 않은가? 아무나 바로에게 가서 몇 번 기적을 행하고 바로를 두렵게 하여 이스라엘을 놓아보내게 한 다음 데리고 나오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굳이 모세를 광야로 보내어 40년이나 훈련을 받게 하시면서 구원자를 준비시켰는가? 이것이 여전히 남는 문제이다.
둘째, 그 이유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단순히 사람을 어떤 장소나 어떤 환경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로 대표되는 어떤 새로운 인격 새로운 생명의 세계 안으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단순히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이끌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이는 것이 아니라 거기 있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리 곧 세상과 육체와 죄의 종이 되어 마귀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좋은 땅에 맞는 좋은 인격으로 이끄는데 초점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구원받는 사람의 환경의 변화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는 사람 자신의 변화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의 진정한 문제는 그들의 몸과 마음이 이미 애굽에 동화되어 있으며 애굽의 종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그 매인 자리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실한 자들로 만드시고자 했다. 이것이 하나님이 목표하시는 구원의 내용이다.
주님이 보여주신 구원도 마찬가지이다. 탕자(죄인)를 이끌어 아버지의 집(천국)으로 인도하는 주님의 구원은 단순히 가난 가운데서 고생하는 탕자를 불쌍히 여겨 아버지 집에서 편히 살게 해 준다는 것이 아니라 탕자를 그 죄악과 불순종의 자리에서 이끌어 내어 아버지의 참 아들이 되도록 위치를 옮기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구원의 목표점인 '아버지 집' 또는 '가나안' 또는 '천국'이라고 일컫는 처소는 다 구원받을 사람의 변화된 인격 및 그가 속하게 될 새로운 단체적 인격의 자리를 나타내는 말들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그 구원의 목표가 되는 한 인격이 먼저 예비 된 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모세는 단지 구원자가 아니라 구원의 목표인 것이다. 여기서 모세는 그때까지 계시된 최고의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이었다. 그는 당시로서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한 사람을 세우시고 백성들을 그 안으로 인도하시고자 했다. 하나님의 목표는 백성들을 단지 애굽의 고생에서 해방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로 세우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들로 구원코자(만드시고자) 하신 것이다. 그것을 위해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구원자로서 모세를 세우신 것이다.
그러니 모세가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고 또 한편으로 하나님은 모세가 백성들의 구원의 목표가 되는 인격으로 단련되기까지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구원의 궁극적인 자리는 그리스도이다. 노아 때는 노아가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모형이었다. 그러므로 그때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노아 안으로 구원하실 수밖에 없었다. 아브라함 때는 아브라함이 구원의 자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것은 단순히 삼촌을 떠난 것이 아니라 구원의 자리를 벗어난 것이 되었다. 다윗 때에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가장 밝고 확실한 모형이었다. 하나님의 목표는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다윗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때가 차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인류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수천 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죽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구원자가 예비 되기 전에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실 수 없다. 구원이 단지 장소의 문제라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아무 때나 구원하실 수 있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에는 반드시 모든 사람을 자기 안으로 이끌어 생명을 얻게 할 수 있는 구원자가 먼저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세 때는 모세가 구원자였다. 그는 비록 하나님 안으로 깊이 이끌림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소 흠이 있는 자였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구원자로 계신다. 우리는 다 그 분 안으로 인도 받은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완전한가! 우리가 모세 때나 다윗 때에 있어서 그 사람들 안으로 인도 받았다 할지라도 영광스럽고 좋을진대 이제 완전하신 구원자, 그의 그림자와 모형이었던 모든 앞선 종들이 지향하고 있던 '구원자의 실체'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되었으니 이것은 얼마나 더 진보되고 확실해진 구원인가!
주님 역시 이러한 구원자가 되기 위해 많은 고난을 겪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을 완전히 상실하기까지 복종하였다.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2:9,10)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5:8-10)
이것은 모두 구원이라는 것이 어떤 장소나 어떤 환경으로의 구원이 아니라 '어떤 사람', '어떤 인격' 안으로의 구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