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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주에 하나님이 왜 메마르고 초라한 떨기나무 가운데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셨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러한 모세와 그러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며 그들 안에 거하시는 분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가난하고 곤고한 인생 가운데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그들과 함께 하실 뿐 아니라 자신을 그런 소자들 속에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즐겨하신다.

그러므로 낮은 자리는 저주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 가까운 자리요 하나님께 가까운 자리이다. 그 자리는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시는 복된 자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낮은 자리에 있을 때 감사하고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써야 하며 낮은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멸시하지 말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종종 그런 사람들 안에서 자기를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난과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높고 영광스러운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한다. 육신적으로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보이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많은 경우에 가난하고 곤고한 인생의 자리에서 곧 저주와 일그러짐, 실패와 무능으로 한없이 낮아져 있는 사람들 안에서 발견되신다. 믿음으로 우리는 가시덤불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을 보고 영접할 줄 알아야 한다. 주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낮고 가난한 인생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그들의 눈물 안에서 자기를 나타내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놓쳤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19세기 말 미국의 한 가난하고 멸시받던 흑인 소년이 자기도 다른 백인들처럼 교회에 나가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어느 주일날에 마을 교회당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그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의 계단에 앉아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그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소년은 그에게 "아저씨는 누구신데 여기 있어요? 왜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세요?"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나는 예수인데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안으로 들여 보내주지 않아서 못 들어가고 여기 있단다" 라고 말한 후 가버렸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4세기 프랑스의 군인이었던 마틴은 어느 추운 겨울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 거지를 발견했다. 그는 내려서 그의 외투를 반으로 찢어서 그 거지에게 주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빵을 반으로 나누어주었다. 그날 밤 꿈에 예수님이 마틴에게 나타나서 반쪽 외투를 입은 모습을 보이면서 '내 종 마틴이 내게 준 것이야' 하면서 자랑하시는 것을 보았다. 다음 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로 영접하였고 평생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이야기를 하는 김에 이 사람에게 얽힌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이 사람(마틴)은 나중에 교회(뚜르 지역)의 감독이 되었고 로마카톨릭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이 성인의 축제일이 11월 11일이었는데 그 전날인 1483년 11월 10일에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한스 루터는 당시 관습에 따라 출생 다음날인 11월 11일에 아이를 교회로 데리고 가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주던 신부가 아이의 이름을 물었을 때 아버지가 아직 이름이 없다고 하니 신부가 '오늘이 성 마틴의 날이니 마틴이라고 하면 좋겠소' 라고 해서 이름을 마틴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가 바로 중세의 타락한 기독교를 개혁한 개혁의 선구자 마틴 루터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려운 일들로 인해 슬퍼하며 울게 되는 것도 싫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울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모습만 보고 그런 소리만 듣고 싶지만 세상의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시덤불과 같은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죄인들과 그들의 짜증나는 삶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산 위에 홀로 앉아 세상의 망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말고는 세상에서는 아무 할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산 위에서 초막을 짓고 하나님과만 살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가서 죄인들을 건지게 하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며 그들과 함께 영광의 세계를 누리도록 보내신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3:4,5)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3:6下)

하나님을 만났을 때 모세는 신발은 벗어야 했다. 그리고 얼굴을 가려야 했다. 왜 그래야만 되었을까? 그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신을 신는 것은 발이 땅보다 깨끗하기 때문이다. 땅은 더러운데 발은 깨끗하므로 발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선 그 땅은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곳이므로 신을 신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굳이 신을 신는다면 더러운 발로부터 그 거룩한 땅을 보호하기 위해 신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신을 벗은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을 우주의 중심의 위치에 놓고 가장 선하고 가장 완전하고 가장 거룩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인해 죽은 죄인일 뿐이며 형제(사람)들 가운데서도 하나의 작은 자일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선하고 의롭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혹시 괴로움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만 두려워하며 자신은 깨끗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바깥 환경으로부터 오염을 당하거나 더럽혀질 것만 염려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환경을 더럽히고 파괴하는 오염원이며 다른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든지 우리에게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정말로 더러운 것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생명을 받을 때 우리는 깨끗한 자가 될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얼굴을 가린 것은 그의 머리를 가린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1장의 원리를 따른다면 자기를 부인(否認)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자기 자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육신에 속한 자아는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가리움을 받아야 한다. 누구든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자는 육체의 자랑을 완전히 내려놓아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가려야 한다. 초기 교회에서 여자들이 예언을 하거나 형제들에게 중요한 말을 할 때는 그들의 머리를 천으로 가렸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것임을 표현한 것이다. 즉 그들은 머리가 아니며 자기가 스스로 일어나서 (머리가 되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일을 한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憂苦)를 알고"(3:7)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보시고 건져내셨다고 할 때 그 고통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얼른 생각하면 그 고통은 당연히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바로의 압제로 말미암아 당하는 육체적 고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모든 육체적 고통을 다 돌아보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단지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의 고통' 만을 돌아보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에서 겪는 고통'에 주목하고 계실 따름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에서 겪는 고통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거기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노예로 육체적 곤란을 겪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고통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세상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진정한 고통의 실제이다. 다른 모든 고통은 거기서 파생된 것이며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의 고통은 돈이 없고 몸이 아프고 일이 뜻대로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있어서 참 고통은 그리스도가 없는 것이며 자기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의 뜻대로 살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에게 하나님이 없고 진리와 자유가 있어야 할 자에게 그것이 없고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가 마귀를 섬기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돌아보시며 건져내셔야 할 그 고통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자기 백성들을 그리스도 없는 세계에서 건져내어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거기서 하나님과 연합하여 함께 살게 하는 것이다.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3:8)

가나안은 물론 환경적으로 좋은 땅이지만 애굽에 비하면 그렇게 아름답고 광대한 땅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할 만한 땅은 아니었다. 애굽의 기름진 땅에 비하면 그것은 오히려 작고 초라한 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곳을 좋은 땅이라고 하신 것은 그 곳에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그곳은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곳이요 하나님의 손길이 모든 사람 위에 항상 미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복지(福地)인 것이다. 사실상 복지(천국)는 어느 곳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곳이 곧 복지이다.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11:11,12)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세계를 가리킨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말은 좋은 땅을 표현하는 하나의 관용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만유(모든 것)이시고 만유를 포함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좋은 땅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생명 안에서 하나로 연합한 세계이다. 하나님이 사람과 항상 함께 계시며 사람의 만족이 되시는 세계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안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 만일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이 세계(그리스도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는 아무리 물질적으로 좋은 땅이라고 하는 어떤 땅에 들어가도 아무 유익이 없다.

이 좋은 땅과 거기서 나는 풍성한 소산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항상 부족함을 가지고 허덕이며 살 수 밖에 없다. 몸 건강해지면 돈 벌어야 하고 돈 벌면 명예와 권력을 얻어야 하고 해서 끝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은 아는데 좋은 땅이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이신 그리스도는 모르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 무언가를 달라고 조르고 그래서 많은 것을 얻어도 늘 어딘가 부족하여 만족을 모르고 사는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충분히 먹으면 다른 모든 생각이 달아나서 어느 것에도 헐떡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을 먹으면 나머지 것들에 대한 식욕은 자연히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것저것이 없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없는 것이다. 그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가난이며 가장 큰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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