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과 사역 (출4:1-8) / 2007. 4. 22

2010.05.03 15:14

이상봉 조회 수:3662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4:1-4)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시면서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권위를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몇 가지 표적을 행사할 수 있게 하셨다. 그 표적들은 모세가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자라는 증거가 될 표적이었다. 먼저 하나님은 모세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던져 뱀이 되게 하는 이적을 일으키셨다. 또한 그것을 본 모세가 놀라서 뱀을 피하려고 하자 하나님은 손을 내밀어 뱀의 꼬리를 잡게 하셨고 그때 뱀은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그 이적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굽 왕(바로) 앞에서 모세가 행할 표적이었다. 그들에게 이 이적은 하나님이 그를 보내셨다는 표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모세 자신에게 있어서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이 표적은 그것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지팡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의지하는 막대기이다. 두 발만으로 자연스럽게 보행하는 사람은 지팡이를 쓰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운 노인이나 장애인은 지팡이를 의지하여 일어서며 길을 간다. 하지만 반드시 보행이 불편한 노인이나 장애인만 지팡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목자로서 모세는 양을 치는데 그것이 필요했다. 즉 일을 하는 데도 지팡이가 필요한 것이다. 아담의 범죄(타락) 후 사람은 땅(환경)과 함께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그래서 살기 힘들어졌다. 그러므로 노인이나 장애인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그의 인생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힘이 들기 마련이고 따라서 각자 나름대로의 지팡이를 필요로 하고 있다. 막대기 지팡이만 지팡이가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의지하는 것이면 그것이 그의 지팡이이며 그것을 놓치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그의 지팡이다. 즉 의지하여 도움을 삼는 그것이 그의 지팡이인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러 온 그 순간에도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사역의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는 노인이었을 뿐 아니라 양을 치는 목자였으므로 그의 지팡이는 그에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도구였다. 이러한 모세에게 하나님이 지팡이를 표적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은 사람이 자기에게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며 쓰더라도 그것의 실체를 알고 쓰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우리 가운데 벌어졌을 때 제일 먼저 이 일 안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 하는 것을 읽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의 해결보다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부터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읽어야 한다. 일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일을 시키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하며 일을 하는 주체인 자신에 대해서도 돌아보아야 한다. 즉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보지말고 그 이면에 있는 영적 사실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팡이를 던질 때 뱀이 되고 뱀을 잡으니 도로 지팡이가 되었다는 것은 뱀과 지팡이가 하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모세에게 그가 지금까지 의지하던 그 도구가 뱀(사탄)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지팡이가 뱀이라는 것이다. 물론 지팡이 자체가 사탄이거나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 지팡이 안에 사탄이 숨어 있는 것도 아니며 지팡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적인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사탄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자기가 의지하는 것을 하나님처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려는 속성이 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돕게 하셔도 우리는 그를 하나님 대신 의지하려고 하며 그 사람을 하나님 대신 우리의 의지로 삼으려 한다. 하나님은 이것을 일깨우시려고 하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지팡이는 사람이 그것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긴다면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여기서 지팡이로 대표된 바 사람이 의지하며 붙잡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는 악도 아니고 사탄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쓰는 사람이 그것을 우상으로 삼고 의지할 때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우리가 의지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진 상태로 쓰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뱀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사역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하나님 대신 의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뱀(사탄)이다. 그때 우리는 그것으로 도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에게 물리게 될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며 의지하는 것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들이 사람을 찌르고 무는 뱀인지 알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의 그들의 육신적 재능과 건강과 돈과 권력을 의지하며 힘있고 지혜 있는 사람들을 의지한다. 그들은 그것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많은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일들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과 거리가 멀게 되며 많은 분쟁과 시험거리를 몰고 온다. 일의 결국이 생명과 평안이 아니라 고통과 사망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울과 압살롬, 솔로몬의 지팡이를 생각하라. 그들에게는 각기 출중한 육체적 능력들이 있었다. 사울과 압살롬에게는 크고 준수한 신체적 장점이 있었고 솔로몬에게는 뛰어난 지혜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들에게 있는 그 육체적 능력을 의지하였으므로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 솔로몬의 경우는 특히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그는 처음 출발 때 사울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다윗의 아들이었고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고 그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지혜와 많은 부와 젊고 유능한 참모들 그리고 그가 결혼과 무역을 통해 좋은 관계를 맺어놓았던 주변 여러 나라들은 그의 나라를 하나님 앞에서 영구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요컨대 그의 지팡이는 할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았을 때 그것은 도로 지팡이가 되었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의지하던 것의 실체가 뱀이요 그 배후에 사탄이 숨어 있다는 것을 바로 직시한다면 그는 더 이상 그것을 무조건 의지하지 않을 것이요 따라서 그것에 물리지도 않게 될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 사탄의 궤계를 간파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탄의 정체를 아는 이상 사람은 속지 않는다.

비록 뱀(사탄)이라 할지라도 그 정체를 아는 사람의 손에 잡히면 그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쓰이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도구를 쓰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구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마음이다. 모든 도구는 하나님께 맡겨져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때 비로소 도구도 살고 하나님도 살고 나도 살고 일도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처리 받지 못한 인격이나 도구는 다 하나님께 무용하다. 반대로 하나님에 의해 처리 받은 것, 하나님의 손에 맡겨진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목적에 기여할 수 있다.

왜 지팡이는 땅에 던졌을 때 비로소 뱀으로 드러났는가? 그것은 사탄이 자기 정체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창3장 이후 사탄은 뱀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자기를 감추어 버렸기 때문에 세상 안에서는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검은 색은 검은 바탕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것과 같다. 사탄은 추악하고 흉물스러운 자기의 모습을 세상에서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으로 위장하고 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기까지 철저히 본색을 감추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서 드러나게 되는가? 그리스도 앞에 오면 드러난다.
예컨대 주님 당시 사탄은 바리새인들 속에 들어가서 자기를 위장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의 자리가 너무나 고상하고 거룩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 안에 마귀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셨을 때 그들은 결국 본색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과 주님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1:24)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는 이 말이 바로 해답이다. 마귀는 오직 자기와 다른 자 앞에서만 정체를 폭로하게 되어 있다.

사탄은 더러운 시궁창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들이 좋게 여기고 자랑하는 것들 속에 숨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는 지팡이 뒤에 숨어 있는 사탄의 정체를 알 수 없다. 그의 정체는 오직 그와 다른 생명 앞에서만 드러난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4:17)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4:20)

이제 모세는 그 지팡이를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 지팡이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그것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표시로 삼게 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중요한 도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가장 중대한 목적을 이루심에 있어서 가장 연약한 도구들을 들어서 사용하기를 즐겨 하신다. 지팡이를 비롯하여 보리떡, 항아리, 목자의 물맷돌 등이 다 그렇게 하나님께 사용되었으며 그것들은 하나님의 손에 잡혔을 때 매우 유용한 도구들이 되었다. 사람은 생각하기를 훌륭한 목적을 이루는데는 훌륭한 도구들이 사용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뜨거운 태양은 물론 기어다니는 벌레도 사용하시며 심한 동풍과 박 넝쿨도 사용하신다.(요나서 4장)



다음으로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게 하시는 과정에서 그의 손에 문둥병이 발하게 하셨다가 없어지게 하는 이적을 일으키셨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 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 보니 손이 여상하더라"(4:6,7)

이 표적은 사람의 실체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모세가 손을 품에 넣었을 때 문둥병이 생겼다는 것은 그의 품에 문둥병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모세 안에 육체적 질병으로서의 문둥병은 없었다. 그러나 그 속의 생명과 본질이 문둥병에 걸린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서 이미 죽고 썩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여도 그 속에는 이미 죽은 것과 썩은 것을 품고 있다. 그것이 사람의 실상이다. 왜냐하면 첫 사람 아담이 사망 선고를 받은 후 그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류는 현재 죽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현재 인간에게 내려진 것이고 따라서 완전히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도 그는 이미 죽어가고 있으며 죽은 상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은 장차 임할 일이 아니라 이미 진행되고 일이다.

자연인 곧 육체대로 사는 모든 사람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하나님의 목적에 쓰지 못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의 품에 손을 넣어 보게 하신 것은 그가 새롭게 거듭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목적에 쓰일 수 없는 자 즉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라는 사실을 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 꺼내보니 이번에는 손이 깨끗하게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의 품이 깨끗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떻게 한 사람 속에 이러한 두 가지 상태가 동시에 있을 수 있는가?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실로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하냐 하는 것에 따라 그 속에 두 가지 상태를 가질 수 있다.

모세가 나타내 보인 두 번째 상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의 상태 즉 하늘에 속한 사람, 위로부터 난 자의 상태를 보여준다. 같은 모세지만 앞의 모세는 아담 안에 있는 자연인을 나타낸다면 뒤의 모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 타오르는 불꽃 가운데서 자기를 나타내신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아니한 모세는 이미 이전의 그 모세가 아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보면 즉시 사망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게 되어 하나님을 대면(교제)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새 사람이 된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2-49)

모세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처리되고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지위를 얻었다. 그는 이제 처음 사람이 아니라 둘째 사람이다. 그는 둘째 사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둘째 사람이 되었다.

둘째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그 안에 죽은 것이 없으며 썩어 가는 것이 없다. 그는 항상 새롭고 생명으로 충만하다. 그를 믿는 사람은 육체 가운데 있어서 이 생명 곧 영생을 누린다. 사람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생명대로 (죄인으로) 살 수도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 살 수도 있다. 믿음으로 살면 깨끗한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이요 육체대로 살면 문둥병에 걸린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둘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자유이나 결과는 전혀 다르다. 자기(육신)대로 살면 죽음이요 하나님의 손(성령)에 잡혀서 순종하면 생명이다.

모세는 자기가 문둥병(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상태)인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깨끗한 새 사람으로 나타내 보이셨다. 누구든지 자기가 품고 있는 그럴듯해 보이는 모든 것이 다 허망한 것이요 문둥병과 같은 죽은 것임을 분명하게 본다면,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더 이상 문둥이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이것이 곧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보이는 것을 믿고 붙잡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붙잡는 것이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영적 실상을 여러 번 말씀으로 깨우쳐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31-44)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까지 자기들의 영적 실상을 보지 못했다. 이런 자들은 영원히 문둥이(또는 소경과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들을 소경이요 죄인이요 문둥이라고 인정한 자들은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을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깨끗한 자들이 되었음을 본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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