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4:14-16)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케 하고자 하셨을 때 모세는 말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을 핑계로 하나님의 보내심에 응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의 형 아론을 그의 대변인으로 붙여 주시겠다고 하셨다. 모세가 어떤 핑계를 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기어이 그를 이집트로 보내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안 할 수는 없고 어떤 방법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 따름이다.
모세가 말을 잘 못한다고 하자 하나님은 그에게 입을 지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모세의 입에 직접 역사하여 그로 말을 잘할 수 있게 만드시면 될 터인데 왜 그의 눌변은 그대로 두시고 그의 형 아론을 그에게 붙여 주셨는가? 생각은 내가 하고 말은 다른 사람이 한다는 것은 결코 편한 일이 아닌데 말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아론을 붙여주사 둘이 함께 협력하여 사역하도록 하신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생각된다.
첫째, 몸의 원리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개인적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큰 몸을 이루도록 다른 형제들과 함께 부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이러한 큰 몸으로서의 교회가 형제들의 합력으로 하는 것이지 한 지체가 혼자서 다 하는 것이 아니다. 형제들이 각기 받은 은사를 사용하여 힘을 합쳐서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일은 온전하게 성취된다. 모세에게는 계시가 있었고 아론에게는 말하는 능력이 있었다. 이것이 합쳐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 없이 증거하게 된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아론을 모세에게 붙이신 것은 모세로 하여금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도록 단련시키기 위한 것이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다. 형이 머리가 되고 동생이 비서(秘書), 대변자)가 되면 순리적이다. 그러나 모세의 경우는 거꾸로였다. 이런 위치는 모세에게 있어서 매우 부담스럽고 곤란한 위치였을 것이다. 여기서 모세가 자기 직무를 온전하게 감당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권위가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진짜 권위인지 가짜 권위인지는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단지 직책만으로 권위를 나타내고 인격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권위는 가짜 권위이고 직책과 함께 인격으로 권위를 나타낼 수 있는 권위는 진짜 권위이다. 형을 수행 비서처럼 데리고 다녀야 했던 모세는 실제로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사실 모세의 형 아론과 누나 미리암은 아무런 계시가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모세 때문에 이스라엘 가운데 권위자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심 동생인 모세의 밑에서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표출되기도 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민12:1,2)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모세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사실 모세는 하나님께 대변인을 함께 보내 주시면 가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다만 자기의 혀가 둔하다는 핑계를 대며 가기를 주저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줄 아시면서도 일부러 그런 환경을 조성하신 것이다. 그런 환경 가운데서 모세를 낮추시고 단련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중에 모세는 실제로 매우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4:21-23)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 마는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7:3,4)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역하는 애굽(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선언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 열 번째 재앙 곧 장자가 죽는 재앙을 애굽에 내리실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왜 하나님은 바로를 설득하거나 이적을 통해 위협을 하기도 전에 그렇게 비관적인 전망을 하고 계시는가? 또한 설득을 해도 안 되고 이적을 행해도 안 된다면 무엇 때문에 모세로 하여금 바로 앞에서 그런 표적들을 행하게 하셨는가? 그것은 표적의 우선적인 의미가 사탄을 설득하거나 돌이키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하나님의 백성들에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는데 있기 때문이다.
세상(사탄)은 절대로 하나님께 협조하지 않는다. 사탄은 아무리 가르치고 설득하고 위협해도 自意로는 절대로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으며 그가 잡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내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탄에게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져내는 방법은 오직 힘으로 뺏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이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사탄과 타협하려 하시거나 사탄을 설득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그에게는 오직 징계와 심판밖에는 돌아갈 것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세로 하여금 바로에 대해 장자의 재앙을 예고하게 하신 것이다.
장자의 재앙이 임했을 때에 바로는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들을 내보내기는 했지만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압박 때문에 마지못해서 그렇게 했지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감동을 받거나 회개를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나중에 다시 홍해까지 이스라엘을 뒤쫓아와서 잡아가려고 했다. 이처럼 세상(사탄)은 집요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잡고 늘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에 대응할 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꾸짖고 저주하며 대적해야 한다. 그에게 설득하거나 사정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를 죽이셨으며 그의 모든 것이 끝났음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물러가라고 명령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사 그로 돌이키지 못하게 하셨다는 표현이다. 마치 바로는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믿고 굴복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억지로 악하고 완고하게 만드신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는 것은 그의 본래 부드러운 마음을 하나님께서 억지로 악하고 완고한 마음으로 변화시키셨다 뜻이 아니다. 사탄 자신과 사탄에게 사로잡힌 인간의 마음은 본래 하나님께 대하여 극도로 거역적이고 강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일부러 어떤 사람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거나 강퍅하게 하실 필요는 전혀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오직 당신의 목적과 필요를 따라 세상의 많은 죄인들의 마음을 돌이켜 부드럽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강퍅케 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마음이 강퍅한 자와 부드러운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대해 무디고 거역적이며 고집스러운 한 종류의 인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손길이 미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존재할 따름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과 섭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채 내버려진 사람들은 바로와 같이 끝까지 어리석고 강퍅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고 은혜를 받은 사람은 채찍을 얻어맞고서라도 돌이키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바로(애굽 왕) 자신은 그렇게까지 하나님과 대립하며 고생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탄이 그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그는 마음을 자기 뜻대로 조성할 수 없었을 것이며 행동을 마음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부득이 자기를 사주하는 자의 종이 되어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타락한 인류의 가장 큰 불행이다. 사탄을 자기 속으로 받아들여서 자기 생명으로 삼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이 바로 심령이 강퍅한 자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강퍅케 하셨다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강퍅한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셨다는 말이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9:17-24)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일이다. 바로의 마음을 끝까지 강퍅한 채로 내버려두시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이요 그 사람이나 별로 다를 것 없는 죄인인 우리를 건지사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런데 바울의 이 진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더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로를 강퍅하게 하신 것은 그를 진노의 그릇으로 쓰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지만 그와 같은 진노의 자식(이방인)이었던 우리를 건지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신 것은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쓰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은 같은 죄인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시기 위해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기도 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우리가 조그마한 징계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잘 돌아서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