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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가나 혼인 잔치

이상봉 2010.05.04 14:29 조회 수 : 3486

제9과 가나 혼인 잔치


요한복음 2장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2:1-11) 


13.물로 포도주를 만드심

 

요한에 의하면 주님께서 세상에서 공적 활동을 시작하신 후 처음으로 행하신 표적(表蹟, 기적)은 갈릴리 가나에서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다. 주님은 왜 첫 이적으로 그 일을 하셨을까? 물론 그럴만한 상황이 닥쳤으므로 그런 일을 하신 것이겠지만 그 이면에는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다. 주님은 그 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당신이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간접적으로 말씀하셨다.  


율법 세계 안에서 술(포도주)이란 참으로 곤란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시험거리요 부정(不淨)한 먹거리이기 때문이다.(잠23:29-35, 사5:11) 주님 앞에 사역했던 세례 요한만 하더라도 그런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눅1:15) 그뿐 아니라 이전의 많은 선지자들과 경건한 사람들도 술을 마시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거룩을 유지하였다. 그런데도 주님은 술을 마셨을 뿐 아니라 세상 죄인들과 어울려서 마시기도 했다.(눅7:34) 그리고 여기 혼인 잔치에서는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기까지 하셨다. 그렇다면 주님은 술을 무엇으로 생각하신 것인가?  


술은 본래 과일이나 곡식이 오래 발효되면서 생겨난 자연적 먹거리지 마귀가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 낸 악한 물건은 아니다. 그러므로 술 자체로만 말하면 술은 사람의 흥을 돋구고 기쁨을 더하는데 쓰이는 먹거리일 뿐 그 자체로서 무슨 악이나 선은 아니다. 

 

그러나 인류의 삶에서 술은 실제로는 매우 위험하고 다루기 곤란한 물질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술은 사람을 취하게 만듦으로써 즉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절제와 통제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문제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사로잡히든지(성령에 충만하든지) 마귀에게 사로잡히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술은 실질적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떠나 마귀에게 사로잡히도록 만드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이 술을 그 뜻대로 다스릴 수 없다면 술은 사람에게 해로운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 술을 그 뜻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결국 술은 위험한 것이다.  

 

인류는 타락 이후 항상 육체의 욕망의 노예가 되어 무엇이든지 그 좋아하는 것을 절제하지 못하고 좇아가는 상황에 있기 때문에 술은 위험한 것이다. 이것을 알고 마귀는 항상 인류에게 술을 권해왔다. 그는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며 죄를 짓게 만들었다. 경건한 사람들에게 술이 사실상 마귀나 다를 바 없는 악한 것으로 인식되어 온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술의 이러한 위험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계셨을까? 그렇지 않다. 주님이 오신 것은 사람의 권세를 회복하며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 받은 사람의 진정한 권세와 지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만물을 아버지의 뜻 안에서 완전히 다스리고 지배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새로이 일깨워 주셨다.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람이 본래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자이지 다른 것에 지배를 받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인류를 지배하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사람과 관련된 것(권력, 여자-異性)을 제외하고는 술이 대표적이다. 술은 육체의 快樂(즐거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대표적 물질이다. 맛있는 음식을 추구하는 것(食道樂)은 성욕과 아울러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을 발판으로 마귀가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도구가 바로 술이다.  


주님은 이러한 술을 지배하심으로써 사람이 마귀나 육체(정욕)의 사주를 받지 않고 만물을 다스릴 수 있음을 보여주셨다. 주님은 술이나 여자나 모든 (다루기 힘든) 것을 사용하심에 있어서 사람이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아들로서 마음대로 그것들을 다스리며 지배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술은 썼다 하면 그것의 지배를 받는 것이 지금까지의 모습이었지만 주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주님은 술을 사용했을 뿐 아니라 (결혼식에서 잔치의 흥을 돋구는데 쓰도록) 술을 만들어 주기까지 하셨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술보다 훨씬 강력한 어떤 ‘매력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술의 노예가 되지 않고서 술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 취해 있는 것이다.(엡5:18)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만이 술을 마실 수 있으며 술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충분히 즐겁고 유쾌하기 때문에 술을 굳이 마실 일도 없다.  


누구든지 즐거움을 위해 술을 마시고 싶으면 마실 수 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마셔야 한다. 술보다 주님께 더 강하게 취해 있는 사람, 술맛에 매력을 느끼기보다는 주님의 생명의 가치를 체험함으로써 주님과의 교통에 훨씬 더 매력을 느끼는 사람만이 술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다. 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임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만이 술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렇지 못하다면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육체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세상을 이길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전적으로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은 결국 그 부분만큼은 육체로 사는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술을 지배할 수 없다. 술을 넉넉히 극복할 만큼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은 드물다. 그러므로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 그것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아니다. 주님께서 잔치에 참석하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표적을 행하신 것에는 더 큰 메시지가 있다. 그 일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 목적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 표적을 통해 나타난 주님의 목적은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로 그의 신부를 삼아 혼인 잔치를 하는 것이다. 즉 주님의 목적은 일군의 사람들을 불러 그의 생명을 가지게 하며 그리하여 그들과 주님이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최고 목적은 불순종하는 인간들을 심판하고 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인생들을 당신 안으로 불러 당신의 신부로 삼으시는 것이다. 사람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양육하여 성숙한 여인(하나님의 아들)으로 단장시킨 후 마지막 날에 결혼하여 천국에서 함께 살게 하시는 것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주님이 처음 오셨을 때(初臨)의 목적은 신부를 부르시는 것이요 다시 오실 때(再臨)의 목적은 아름답고 성숙한 여인으로 단장된 당신의 신부(교회)를 공중으로 이끄셔서 혼인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다만 거기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 곧 처음부터 배제되었든지 아니면 불러도 오지 않았든 간에 최후의 순간까지 주님과 연합하지 못하는 자들은 결과적으로 그 저주의 자리에서 자연히 정죄되고 심판 받아 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 주님이 오신 목적에 있어서 부수적인 것이다. 


주님이 첫 이적을 행하시는 자리로서 결혼식을 선택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는 결혼하실 뿐 아니라 기쁨으로 흥에 겨워 노래하며 마시며 취하는 자가 되실 것이다. 이 결혼은 우주적인 결혼으로서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이 다 같이 기뻐할 그런 결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물은 이러한 사람의 회복을 고대하고 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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