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과 성전과 그리스도
요한복음 2장
16.주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심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12-22)
주님은 그의 3년 사역 기간 동안 몇 번 예루살렘을 방문하셨는데 그때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사람들의 죄악으로 인해 더럽혀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셨다. 주님은 그것을 묵과하지 않으셨다. 그는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죄악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며 정결케 하셨다.
당시 성전에는 짐승을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환전상들이 있었다. 성전에 짐승을 파는 사람들과 돈을 바꾸는 장사꾼들이 있었던 것은 형식적으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즉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짐승은 흠 없는 질 높은 것이어야 하는데 혹시 집에서 가져온 짐승이 흠 있는 것이어서 불합격이 될 경우 공인된 합격품을 사서 바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제물용 짐승을 파는 장사꾼들이 성전 안에 있었던 것이다.
또 성전 안에 돈 바꾸는 자들이 있었던 것은 유대인 성인 남자들이 일 년에 한 번씩 바쳐야 하는 성전세(聖殿稅, 반 세겔) 때문이었다. 이 성전세는 오직 유대 화폐로만 바쳐져야 했다. 그러나 당시는 로마제국 치하(治下)였으므로 유대 화폐는 거의 쓰이지 않았고 로마 화폐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성전세를 굳이 유대 화폐로 내게 한 것은 로마 화폐에는 로마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으므로(눅20:24) 하나님께 바치기 적합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 표면적인 이유이고 실제로는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과 장사꾼들이 결탁하여 백성들로부터 부당한 이익을 취하기 위해 이러한 일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이 직접 짐승을 준비해 가면 제사장들이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흠을 잡아서 불합격시킬 것이므로 백성들은 부득이 안에서 파는 비싼 짐승들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로마 화폐에 로마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으니 그것을 바치지 말고 유대 화폐로 바꾸어 내라고 한 것도 다 백성들로부터 돈을 빼앗기 위해 갖다 붙인 터무니없는 이유였다.
주님이 성전을 정화하신 일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생활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흔히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무심코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소위 ‘영적인 일들’의 실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성전이 더러워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성전은 왜 더러워지는지에 대해 그리고 더러워진 성전은 누가 발견할 수 있으며 누가 정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주님은 온유하시고 인내가 많으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는데 있었으므로 사람들의 죄를 일일이 지적하거나 책망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의 수많은 모순과 죄악들을 알고 있었지만 대체로 참고 용납하셨다. 그에게는 더 시급한 다른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전이 더럽혀지는 것을 보셨을 때 주님은 그것을 참지 않으셨다. 주님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넘기지 않았다.
그는 크게 분노했으며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 안에서 매매되던 양과 소를 성전 밖으로 다 쫓아내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고 그들의 돈을 쏟아버렸다. 그리고는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시면서 엄히 책망하셨다. 또 주님이 세상을 떠나시던 마지막 해에도 여전히 성전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라고 하시면서 강하게 책망하셨다.
왜 주님은 성전에서의 부정에 대해 그렇게 분노하셨으며 적극적으로 반응하셨는가? 일차적으로 그것은 주님이 성전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요 백성들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도록 약속된 장소였다. 거기에 문제가 있으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성전의 죄에 대해 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인 더 근본적인 이유는 주님 자신이 바로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바깥에 있는 성전(예루살렘 성전)을 그렇게 사랑하시고 그것을 정결케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성전이 바로 주님 안에 있는 참 성전의 외적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성전이 무엇인가? 성전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 교제하는 장소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 안에 거하시는 이른바 ‘신성한 연합’의 외적 표현이다. 하나님이 사람 안에 하나로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이 신성한 연합의 최종 실체는 그리스도(와 교회)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람 안에 거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한 몸, 한 인격, 한 생명)가 된 실체이다.
그러므로 성전과 그리스도는 하나요 성전의 문제는 곧 주님 자신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성전의 문제가 오직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만의 문제였다면 주님은 그것에 대해 객관적인 태도를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수많은 다른 죄들에 대해 주님이 여유로운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주님 바깥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주님 안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처럼 성전의 거룩은 하나님과 사람(이스라엘)의 교제(관계)의 거룩과 결부된 것이며 주님의 몸의 거룩과 결부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이 더러워졌을 때 주님은 마치 자기 몸에 더러운 것이 묻거나 몸 안에 더러운 것(질병이나 암 같은 것)이 들어온 것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주님은 무슨 권세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낼 수 있었는가? 일반적으로 어떤 일을 하려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권세(자격, 위임)가 있어야 하지만 특히 성전에서 주님이 하신 것과 같은 일을 하려면 더욱 그러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성전을 관리할 수 있는 권세는 제사장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제사장이 아니었으며 레위인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런 일을 했으며 더욱이 아무도 주님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했으며 주님을 잡아 가두거나 죽이지도 못했다.
이것은 주님에게 어떤 종류의 권세든 권세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아무런 공식적 직함이나 위임장도 없는 주님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가? 또 주님에게 그런 권세가 있었다면 유대인들은 어째서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반대로 주님이 권세도 없이 마음대로 그런 일을 했다면 유대인들은 왜 그런 주님을 제재하지 못했을까? 물론 유대인들은 주님에게 종종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이의를 제기하기는 했다.(눅20:2) 그러나 그 뿐이었다. 그들은 주님을 막을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님에게는 성전을 관리할 확실한 권세가 있었다. 그 권세는 모든 사람이 금방 알아볼 수 있는 표면적이고 공식적인 권세는 아니었지만 영적 눈이 있는 사람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제적이고 위력적인 권세였다. 주님의 권세는 사람이 부여하는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여하신 ‘생명의 권세’ 곧 위로부터 온 권세였다. 세상을 다스리고 만물을 새롭게 하는 주님의 권세는 그가 소유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제사장이나 레위인들과 같이 공식적인 직함이 있는 사람이 성전을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성전을 사랑하는 자 곧 성전과 자신이 하나인 사람만 성전을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 만일 공식적인 직함을 가진 자(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성전을 관리할 수 있다면 그들은 그렇게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이 더러워져도 그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것은 형식적인 권세나 자격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무엇이 성전을 관리할 수 있는 실제적인 권세와 자격인가? 첫째, 성전의 문제를 인식할 수 있는 눈 곧 성전과 이스라엘의 영적 실상을 인식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지는 것이다. 성전에 죄악과 부정이 가득한데도 아무 문제도 못 느끼는 사람이 어떻게 성전을 정결케 할 수 있겠는가? 주 예수님이 어떤 공식적인 권세나 책임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전 문제에 개입하여 바로잡으신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눈에 그런 문제가 심각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주님은 성전 안에 더러운 장사꾼들과 강도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을 보셨을 뿐 아니라 그것이 곧 이스라엘의 영적 실상을 반영한 모습이라는 것을 아셨다.
성전에는 제사장이 항상 있으며 레위인들과 여러 종교 지도자들이 왕래하지만 그들이 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성전의 문제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성전이 이방인(로마인)에게 더럽혀지는 것과 백성들이 게으르거나 인색하여 성전에 제사 드리러 자주 오지 않든지 제물을 많이 바치지 않는 것이 문제로 보였을 뿐 성전에서 그러한 더러운 범죄가 저질러지는 것은 문제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 눈에는 제사장들과 장사꾼들과 백성들이 하나님보다는 돈과 예물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그것을 탐하여 더러운 죄를 짓는 것을 그다지 문제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에서 수 백년 동안 아무 탈 없이 그런 부정한 일이 자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전이 더러워진 것은 바로 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 자신이 더러운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이 성전을 정결케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성전을 정결케 하기는커녕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성전 안에서 강도 짓을 했다. 그러니 공식적이고 표면적인 권세는 소용없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성전을 청결케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인 사람밖에 없다. 주님이 바로 그러한 분이었다. 주님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밖에 없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아버지의 사랑과 영광을 추구하는 한 마음밖에 없었다. 그는 하나님과 동시에 세상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과 동시에 재물과 세상 영광을 추구하지 않았다.
성전과 자신이 하나가 아닌 사람은 성전이 더러워진 것을 보더라도 단지 ‘안타깝게 여길’ 뿐 그 이상 무엇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더러워진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지 자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나라가 곧 내 나라요 아버지의 영광이 곧 내 영광이고 아버지의 생명이 곧 내 생명인 사람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주님에게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가 하고 물었을 때 주님은 당신들이 이 성전을 헐면 내가 사흘 동안 다시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곧 자신이 새로운 성전, 참된 성전이라는 사실을 암시하신 것이다.
또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주님이 어느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인이 주님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서는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해야 옳습니까?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해야 옳습니까?”하고 물은 것이 나온다. 그때 주님은 “여자여 나를 믿으라.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말고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려면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셨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것은 육신(모형과 그림자)적으로가 아니라 ‘영’으로 그리고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말한 모든 예배(섬김, 제사)의 실제가 바로 주님 자신이기 때문에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씀은 곧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려면 참 성전인 나를 섬기면(따르면) 된다’는 말씀이다. 이처럼 주님은 자기 속에 하나님이 가득한 분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주저 없이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었고 바로 이러한 주님의 영적 상태가 성전을 청결케 할 수 있는 권세가 되었던 것이다.
주님 당시에도 어떤 사람들은 성전에서 더러운 이익을 추구하는 장사를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처럼 직접 나서서 성전을 정결케 하지 못한 것은 그들 자신이 거룩한 성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식이 있어서 사물을 선악간에 분별할 수 있다는 것과 그 사람 자신이 거룩한 성전이라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사람이 틀렸으면 대개는 문제 자체도 보이지 않겠지만 혹 눈이 밝아 문제를 보더라도 나서서 행동으로 문제를 시정하려고 하지 못한다. 자기가 성전이어야 성전의 문제가 뼈아프게 느껴지지 그렇지 않다면 (그저 약간 답답할 뿐) 자기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인격)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또는 하나님의 일에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깨닫기 위해서는 그리고 나서서 그 더러움을 제거하고 거룩을 회복할 수 있으려면 단지 거룩과 부정을 지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정도로는 안되고 반드시 그 사람 자신이 거룩한 사람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성전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권세는 바로 자기 자신이 거룩한 성전인 사람에게 있다. 성전의 문제가 눈에 보이는 사람, 성전의 문제를 제것으로 느끼는 사람, 성전(하나님의 일)이 조금이라도 온전치 못하면 견딜 수 없는 사람만이 성전을 정결케 할 수 있다.
주님 안에는 이런 권세가 있었다. 그래서 성전에서 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을 무시하고 감히 판을 뒤집어엎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식이 강도에 의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부모는 목숨을 걸고 강도에게 덤벼들 것이다. 아이가 죽게 될 때 그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는 맨손으로라도 강도에게 덤벼들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이와 자신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이와 부모가 한 몸이기 때문에 아이에게 생긴 문제는 곧 자기 문제인 것이다. 주님이 성전에서 판을 뒤집을 때의 상황이 바로 이러했다. 그가 그 일을 했을 때 사람들은 감히 주님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권세이다. 주님의 권세는 무궁한 생명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요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그의 마음에서 나온 권세였다.
주 예수님과 유대교 지도자들의 차이가 바로 여기 있다. 성전이 더러워진 것은 단지 몇몇 장사꾼들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집(성전)으로 세워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타락하여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도구요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집인 이스라엘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담는 성전이 아니라) 우상과 탐욕을 담는 사탄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있는 성전이 더럽게 된 것이다.
오늘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전은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그러므로 교회는 더럽혀져서 안 된다.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시지 않는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7)
교회가 거룩을 유지하려면 교회를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 곧 교회가 자기 생명인 사람이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진리를 외치고 교회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나 이런 사람들을 일으키셨고 그들로 그 시대에 하나님의 성전을 정결케 하셨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사람으로 세워져서 주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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