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제18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2)

이상봉 2010.05.04 14:50 조회 수 : 3158

제18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2)

 

요한복음 4장
 

25.사람이 목 마른 이유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4:1-18) 


사람이 인생의 갈증을 느끼는 궁극적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그리스도(하나님의 생명)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궁극적 생수를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지만 세상 영광도 여전히 함께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문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해결법이 비교적 간단하다. 그러나 둘째 문제는 조금 복잡하다. 이 문제는 사실 오늘날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일반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분명히 그리스도가 주는 생수를 마셨다. 그렇다면 그들은 갈증이 없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이 주시는 물과 야곱의 우물에서 긷는 물을 동시에 마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목마르고 배고픈 것은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쳤든 궁극적으로는 그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원한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써 만족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충분히 그의 모든 생명의 갈증과 부족을 채우고 그로 완전한 만족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리스도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세상의 다른 것들도 원한다면 그리스도는 그의 답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하실 뿐 세상 영광과 기쁨을 공급하시지는 않는다. 그는 오직 하늘에 속한 영원한 것을 우리에게 주실 뿐 세상의 없어질 것들로 우리를 만족케 하실 수는 없다. 그는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심을 만족시켜줄 수 없으며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헛된 정욕을 만족시켜줄 수 없다.  


주 예수님이 야곱의 우물물을 사모하는 자의 갈증을 해결해주실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근본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님은 항상 일등하기를 원하는 두 사람을 만족시켜 줄 수 없다. 한 사람이 일등하면 다른 사람은 이등이 될 수밖에 없는데 무슨 수로 만족시켜줄 수 있겠는가? 오늘 놀러가야 하니 날씨가 맑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 옆에 농사 때문에 비가 안 와서 걱정이니 오늘 꼭 비가 내리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이 무슨 수로 사람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실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가 주는 물을 마시면서도 세상이 주는 물을 여전히 마시는 사람은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마시는 바로 그 세상 물 때문에 다시 목마르게 될 것이다. 바닷물을 마실 때 다시 목마름이 있게 되는 것처럼 세상 영광은 사람으로 다시 목마르게 한다. 물과 소금을 함께 먹는다면 여전히 갈증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세상을 함께 추구하면 그에게는 여전히 갈증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해져야 한다. 인생의 완전한 만족을 위한 하나님의 해법은 ‘오직 그리스도’ 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구한 것처럼 야곱의 우물물(세상 영광)을 마시는 사람이 한 번 마신 후 다시 마시지 않아도 되는 길은 없다. 하나님께 그것을 구하는 것은 헛일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오직 차원이 다른 물을 주시는 것이다.  


아래 시는 그리스도가 주는 물을 제대로 마신 사람의 깨달은 마음을 나타낸 시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 하라고 병을 주셨다. 행복해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걸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주셨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내 마음속에 진작에 표현 못 하던 기도는 모두 들어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뉴욕대 부속병원 재활센터 입구 벽에 새겨져 있는 무명시인의 시) 


사마리아 여인이 필요로 하는 것은 사랑이었다. 그녀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 남자의 사랑을 갈망했다. 그러나 그녀가 만난 남자들은 모두 그녀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만족치 못했고 계속 갈급(渴急)했다. 그녀를 만난 주님은 그녀의 이러한 필요를 아시고 당신 자신을 그녀에게 주셨다. 그는 자기의 사랑으로 그녀의 근원적 필요를 채워주셨다.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만족할 수 있었으므로 그 여인은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오는 불완전한 사랑을 추구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만일 그녀가 하나님의 사랑말고 사람(남자)으로부터 오는 사랑도 여전히 원했다면 그녀는 결국 (종합적으로 볼 때) 만족하지 못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의 사랑을 근원적으로 대체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사실상 소용없다. 우리가 만일 세상의 물을 원한다면 우리는 결국 눈을 세상으로 돌릴 수밖에 없고 결국 다시 목마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도 여전히 갈증과 실망을 느끼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지나고 없어질 것들을 얻어서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그것들은 언제나 또 다른 목마름을 유발할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손에 얻어도 그것들을 얻는 순간 또 다른 것들을 원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 육신의 본성이다. 주님의 승리를 보라.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만족하고 안식하는 인생을 사신 비결은 그가 결코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취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 계실 때 누구보다 많은 반대를 받았고 누구보다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코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이사야 49:5에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그런데 주님이 세상에 활동하신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사49:4) 그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반대로 인해 거의 모든 일이 헛수고로 끝났다고 말할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사42:4) 이 예언처럼 주님은 그가 처한 환경이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결코 낙심하지 않았고 좌절하지 않았다. 주님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과 위로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5:41) 


우리는 이러한 주님을 본받아야 한다. 주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으로 삼으려 했을 때 그것을 즐기지 않고 도리어 산으로 떠나심으로써 그 자리를 피하셨다.(요6:15)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주님께 몰려들었고 주님을 환호했지만 주님은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영광 비슷한 것도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그것을 조금도 즐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이 주는 물, 야곱의 우물에서 긷는 물의 한계를 아셨다. 그러므로 기꺼이 그것을 거절했다. 마지못해 거절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의 미련도 없이 기꺼이 거절했다.  


많은 경우에 ‘떠나는’ 것이 가장 좋은 태도이다. 떠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세상의 헛된 유혹으로부터 지켜주는 매우 좋은 장치이다.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은 그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만족했기 때문이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16:32) 이것이 바로 주님의 승리의 비결이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하나님께 “왜 나만 혼자 여기 둡니까?” 하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세상의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를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환영과 지지는 하나님의 그것과 같지 못하며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은 사람들이 그를 반대하고 떠날 때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기뻐할 수 있었다. 주님에게는 얼마든지 마실 물이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행동을 본받아야 한다. 세상의 물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주님이 실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람으로부터 또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실행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힘써 추구해야 한다. 그의 사랑과 위로, 그의 생명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둘째, 세상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주는 명예와 영광, 사람으로부터 오는 칭찬과 위로, 사랑과 도움을 바라지 않으면 실망하고 좌절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그리스도로 인한 만족이 계속 유지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 물이 무엇인지 인식해야 하며 그것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한다. 마셔야 할 물을 마시지 않음으로 인한 갈증과 끝없는 갈증(욕망)으로 인해 느끼는 갈증은 다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제대로 누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제대로 누리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만 추구하는 것이다.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알면 다른 것들은 자연히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우리가 헛된 생각들과 헛된 욕망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삶의 참된 필요를 추구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완전하고 충분한 해결책이 되신다.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