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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3)

이상봉 2010.05.04 14:54 조회 수 : 3305

제19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3) 

 

요한복음 4장

 

26.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법 (영으로 예배함)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4:19-26)


주님이 자기의 모든 사정을 통찰하는 놀라운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께 자기가 평소에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던 한 가지 일에 대해 물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어디서 드리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였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여자가 이 문제를 주님께 제기한 것은 어떤 학자들의 주장처럼 주님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림으로써 그녀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진정으로 그 문제가 그녀에게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주님은 그녀의 말에 진지하고 깊이 있게 대답하셨다.  


당시 사마리아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과는 별도의 성전이 (그리심 산에) 세워져 있었다. 사마리아 지역에 사이비 성전과 사이비 신앙이 뿌리를 내린 것은 오래 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질 당시부터였다. 이스라엘이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누어질 때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유대)으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벧엘에 예루살렘 성전과 비슷한 거짓 성전을 세우고 절기와 제사장을 비슷하게 정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했다.(왕상12:25-33)  

 

그러다가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망했을 때 그 땅에는 앗수르 정부의 이민정책에 의해 이주해 온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결혼하여 형성된 족속이 바로 사마리아인들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재앙으로 황폐케 된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여호와)을 진노케 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앗수르 왕에게 이스라엘 제사장 하나를 보내어 ‘여호와 종교의 율법’을 배울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을 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짐으로써 사마리아 지역에는 이방 종교와 접붙여진 저급한 사이비 유대교가 형성되게 되었다.  


스룹바벨이 이끄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바벨론에서 유대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려고 할 때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도 그 일에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그것을 거절했고(에스라 4:1-4) 이에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대적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리심산에 그들만의 성전을 지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땅에는 예루살렘의 시온산과 사마리아의 그리심산에 각 하나씩 두 개의 성전이 있게 되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당연히 사마리아인들의 (그리심산에서의) 예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길이 무엇인지를 주님께 물은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주님의 답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모두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주님은 그녀에게 “여자여 내 말을(原文-나를)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하셨다. 유대인의 예배가 맞다거나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고 그 둘 다 온전하고 합당한 예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예배의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먼저 주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예배가 아니므로 전적으로 거짓된 것이지만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므로 적어도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자에게 유대인들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주님은 오직 근본적으로 새로운 예배 곧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말씀하신 새롭고 참된 예배 곧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어떤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엄숙하고 경건하게 드리는 예배 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만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것이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전혀 새로운 예배가 아니요 본질적으로 유대인의 예배와 같은 것이다. 성전에서의 예배는 엄숙하고 경건하게 드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며 정성스럽게 드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겠는가?   


신령(神靈)과 진정(眞正)이란 말은 영(spirit)과 진리(실제, truth)라는 말을 번역한 말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말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영(靈)은 ‘육’(肉) 곧 육신적 인간 또는 자연인(flesh, carnal mind, the sinful nature, the mind of sinful man)과 대조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영은 하나님의 정신으로 회복된 변화된 인간의 마음(spiritual mind)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진리란 ‘모형과 그림자’(example, copy & shadow 히8:5)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진리란 철학적 의미에서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실’(참) 또는 ‘실체’(실물)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 종합하면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통할 수 있는 진정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과 교통한다는 것이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진짜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은 가짜로 섬겼다는 것인가? 그렇다. 다만 그동안 그것이 문제가 안 되었던 것은 그런 가짜 섬김 또는 임시변통의 섬김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사람과 진정한 교제를 나누시지 않고 형식적인 방법, 실제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교제를 가지셨는가? 그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형편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로 삼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겠다는 것은 출애굽한 그 시점에 있어서는 장차 이루어질 계획일 뿐 당장에 될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부르신 그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타락하여 영이 죽은 자들이요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자연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불러놓고 하나님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나라(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세계)를 열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그것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었는가?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으심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는 일이었다.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30:2,6)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이러한 일은 오직 성령이 오신 신약 시대에 성취될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시에 부름 받은 그 사람들과도 교통을 하셔야만 했기 때문에 부득이 그 당시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방법 곧 ‘종교적인 방법’을 쓰실 수밖에 없었다. 

 
종교적인 방법이란 간단히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다. 제사의 3대 요소는 성전과 제물과 제사장이다. 즉 구별된 사람을 세워서 구별된(거룩한) 장소와 날짜에 구별된 행동(儀式, 禮物, 禁止)을 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묵은 것이며 죽은 것이며 세상적인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7:6)  


그렇다면 영 안에서 또는 참으로(진리로, 실제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행하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진짜로 섬기는 것이다. 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영적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면 그의 모든 삶은 다 섬김이 된다. 성령을 받으면 사람은 하나님과 생명으로 연합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같으며 그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정신으로 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러한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과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인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reasonable worship, 합당한 섬김, 진정한 섬김)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영적 예배를 이해하려면 먼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본래 어떤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이 늙은 어머니를 섬기는 것을 생각해 보라. 어머니 앞에 향불을 피우고 주문을 외우며 절을 100번 하는 식으로 어머니를 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섬긴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상대를 기쁘게 하며 그와 합당한(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즉 상대를 사랑하고 그의 말을 들으며 그와 같이 있음으로써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이 예배이고 섬김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의식과 예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진정한 섬김(예배)이 아니고 종교적 섬김(예배)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섬기는 것이다. 진정한 섬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 사는 것이다.  


종교적 방식에 의한 예배는 지난 시대에 어쩔 수 없이 사용되었던 방법이다. 기도를 하거나 제사를 드리는 것도 의미 있는 행동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섬김의 방법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섬김)는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그 관계에 맞도록 사는 것이다. 귀신에게는 제사로 섬기는 것이 맞을지 모르지만 인격이신 하나님께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    


사람을 만드셨을 때 하나님이 사람에게 의도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누리며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항상 공급받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누리며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인격을 가지고 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바른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찬양하는) 삶 자체가 예배인 것이다.  


그리스도(성령)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회복된 것이 바로 이러한 삶 곧 ‘예배하는 삶’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누릴 아버지로 알고 그 생명을 따라 (아들로서) 산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삶을 살았으며 그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셨다.  


구약의 예배(섬김)도 이러한 참된 예배(섬김)을 지향(指向)하고 있었다. 돌로 지은 성전은 그리스도라는 참된 성전 곧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로 연합해 있는 인격’을 지향하고 있었고 거기서 드려지는 제사와 제물 역시 그리스도라는 참된 제사와 제물을 지향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이 그리스도(생명)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되는 것이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모든 제물은 다 이러한 아들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들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말씀하신 것은 구약적 예배 즉 성전 예배(종교적 섬김)는 끝나고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섬길 때가 왔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것이 언제인가? 주님이 오신 바로 그 순간부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종교적 방법, 육신적 방법,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 된다. 우리의 길은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사는 것이다. 영으로 행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는 길이다.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마음, 정신)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오직 영으로만 섬겨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을 받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0-12)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말의 의미를 좀더 생각해 보자. 영으로 예배한다는 말이나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사실 같은 말이다. 영과 진리는 다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섬김이 구약의 모형적 섬김에 대해 실제요 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영(靈)은 육(肉)에 대응하는 말이고 진리(眞理, 實體)는 그림자(모형)에 대응하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육이란 육신(자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적 표현 즉 ‘하늘에 있는 것을 땅의 모양으로 바꾸어놓은 것’을 말한다. 하늘에 있는 참 성전(새 예루살렘-그리스도를 말함)은 땅에서 성막이나 예루살렘 성전으로 표현되었다. 이때 하늘에 있는 영적 실제로서의 그리스도는 영 또는 진리라고 말하고 땅에 있는 성전은 육 또는 그림자와 모형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진리란 그림자에 비해 실제 또는 참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구약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지 못하고 단지 그리스도의 모형과 그림자인 율법 제도에 의해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예배한 것과 비교할 때 참으로(실제로) 예배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도 결국 영으로 예배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참 성전을 섬기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이 바로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을 비롯하여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경우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자기 앞에 있는 그 주님을 받아들이고 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참 실체요 참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돌로 지은 성전을 계속 붙드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사람의 영은 죽은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으며 그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요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스르는 자라고 볼 수밖에 없다.  


주님은 여자가 어디서 예배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분명하게 “여자여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길이다. 제자들이 장차 예루살렘 성전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주님께 물었을 때 주님은 그것들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막13:2) 하나님은 왜 당신이 세우신 성전을 그렇게 철저히 파괴하시는가? 참 성전인 그리스도가 왔기 때문이다. 실체가 왔으면 모형과 그림자는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주님 당시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 것이 아니라 율법과 성전 곧 그들의 종교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그들이 귀히 여기는 많은 것들을 더 이상 가치 있게 여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들도 주님을 귀히 여기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들은 실제로 율법이나 성전도 귀히 여긴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귀히 여긴 것은 오직 자기들의 전통과 종교와 그 안에 포함된 자신들의 기득권이었다. 만일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율법)과 제도(성전)들을 귀히 여기는 자들이었다면 그리스도도 귀히 여겼을 것이다. 그림자는 귀히 여기면서 실체는 거부하는 행동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사탄에게 속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주님이 육체로 이 땅에 계시지 않는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영과 진리 안에서 섬길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된다. 또한 교회 형제들을 섬기면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으며 또한 성령의 인도를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터전인 교회를 주셨다.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형제들을 섬길 때 우리는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지체를 섬기는 것은 몸을 섬기는 것이며 머리를 섬기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섬기려고만 하지 교회 생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22:7)고 말씀하셨다. “네가 어찌하여 내 교회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신 것은 주님과 교회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사실을 나타내신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하나님은 지금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그리스도인들)을 성전으로 삼아 그 안에 거하신다. 땅에 계실 때 주님은 ‘우리 가운데’ 즉 ‘우리 곁에’ 계시는 산 성전이셨다. 그러나 지금 주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전이 되셨다. 이것은 훨씬 진보한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만나 교제하고 섬기려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가야한다. 하나님이 돌로 지은 성전에 계시면 사정이 어떠하든지 무조건 그리로 가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안에 계시면 돌로 지은 성전을 버리고 그리 가서 그를 섬겨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은 성전 건물 안에 계시지도 않고 사람으로 땅에 계시지도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교회) 안에 계신다. 하나님은 오늘날 성령으로 말씀하시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그리스도인들)로 당신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려면 반드시 교회 형제들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건물이나 장소에 계시다고 생각하거나 자기가 재림주라고 하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집회 장소 건물이 보통 건물보다 귀하고 거룩하다고 생각하며 기도는 아무래도 교회 건물로 가야 잘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유한 형제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들을 만나 교통하는 일에 대해서는 소홀하다. 이것은 주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 한 개인이 하나님을 온전하게 드러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런 한 지체 한 지체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교회)을 이루고 그 교회가 바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하나님)를 대표하는 유일한 통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형제들을 그리스도로 알고 귀히 여기며 피차 복종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성도는 (비록 개인적으로는 완전치 못하더라도) 하나님을 드러내는 몸이요 성전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영과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기 원한다면 반드시 형제를 귀히 여겨야 한다. 형제를 사랑하며 힘써 교통해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은 정해진 장소와 정해진 시간에 자기를 잠깐 드러내었다가 사라지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이나 어떤 날에 모이는 것은 그때 잠시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포착하여 예배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신약 시대에 집회를 가지는 것은 형제들과 함께 있기 위함이며 형제들과 함께 주님을 찬양하며 생명의 말씀으로 교제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생명으로 행하는 생활 자체가 예배(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모여서 어떤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예배인 것은 아니다. 신약의 예배는 오직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다.(롬12:1)


성령으로 사는 삶, 아들의 생명으로 사는 삶,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이다. 하나님은 아들(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받지 않으신다. 그의 눈에는 사랑하는 아들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그를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를 위해 사람을 만드셨고 또한 우리를 구속하셨다. 만물은 다 그 아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며 오직 그를 섬기게 될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세상 마지막 날 다 없어지게 될 것이다. 새로 임할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아들들의 나라이다. 그 날에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그 예배는 행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존재로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오직 아들의 생명으로 채워진 사람들만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님께 예배가 되는 나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없이는 잠시도 살 수 없는 자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는 1초도 견딜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으로 예배하는 것이며 존재로 예배하는 것이다. 그 생명 안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자이다.  


이러한 모습이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새 예루살렘)에서만 나타날 모습은 아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가운데서도 나타나야 하는 모습이다. 하나님은 지금 바로 이와 같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로 살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교회당에 모여서 소위 예배라는 것을 열심히 드리고 선한 일을 열심히 한다 해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면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모든 약속은 다 성취되었고 모든 그림자와 모형은 실제(실체)가 되었다. 그러므로 옛날 것을 붙잡아서는 안 된다. 새 것이 오면 옛 것은 가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낡은 부대에 담을 수 없다. 낡은 부대란 ‘의문 율법을 좇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의문 율법에 속한 죽은 행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하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은 해도 무방하고 안 해도 무방한 것이 아니고 현재의 시점에서는 절대로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육에 속한 것은 언제나 영을 대적하고 훼방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행하기보다는 눈으로 보는 것을 따라 행하기 쉬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헷갈리게 하는 것, 퇴보하게 만드는 것들은 마땅히 치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단순하고 선명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그리스도 외의 모든 것들 곧 모든 종교적 행위들과 거짓 경건(경건의 모양만 추구하는 것)들, 육신의 일들은 다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貶論)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2:16,17)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10:1,9)  


첫 것인 성전과 제사가 폐해졌으므로 그것을 흉내낸 오늘날의 소위 ‘예배(儀式禮拜)’도 사라져야 한다. 안식일이 폐해졌으므로 그것을 흉내낸 오늘날의 소위 ‘주일성수(主日聖守)’ 도 사라져야 한다. 레위인과 제사장이 폐해졌으므로 십일조와 성가대도 사라져야 하고 무엇보다 제사장제도를 흉내낸 성직(목사)제도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 목사는 제도가 아니라 단지 은사(恩賜)일 뿐이다. 목사직은 교사나 집사나 권면자(권사)나 구제하는 자처럼 교회의 여러 은사(직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교회의 머리나 근간(根幹)의 위치에 있는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목자가 필요하다면 형제들 중 그런 은사 곧 다른 형제들을 돌볼 수 있는 은사가 있는 사람을 세워서 일하게 하면 되는 것이지 직업적인 성직자를 모셔오는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또 목자로 세워진 사람은 자기 믿음과 은사의 분량대로 겸손히 다른 형제들을 섬겨야지 결코 자기를 형제들 위에 높여 중보자(머리)처럼 행세해서는 안 된다. 참된 예배(섬김)과 목사, 주일 성수, 십일조, 성가대 등이 무슨 상관이기에 그것들을 말하는가? 소위 ‘예배’라고 일컫는 죽은 행위가 바로 ‘목사 제도’에 의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목사 있는 곳에 예배 있고 예배 있는 곳에 목사 있다. 목사가 없으면 예배도 없다.  

 
그러므로 신약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 우리는 목사나 예배, 교리와 같은 외부적 인도자나 종교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 성령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영원히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의 생명을 따라 사는 이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 그 방법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자로 하여금 율법주의와 구약의 제사적 신앙을 다시 붙잡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행하고 있는 소위 ‘예배’는 전혀 신약적인 예배(섬김)가 아니다. 모든 교회 모임이나 행사에는 1부 순서로 소위 ‘예배’라는 것을 드리는데 이것은 그 뒤에 이루어지는 2부 순서 곧 회의나 야유회나 기타의 행사는 예배가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행태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삶이 예배와 예배 아닌 삶으로 이원화(二元化)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 구약적이고 첫 언약에 속한 불완전한 신앙이다. 

 

구약의 신자들은 하나님을 친히 섬기지 않고 (섬길 수도 없었다) 오직 제사장에게 양이나 예물을 바치고 집으로 돌아가서 생업과 육신의 일에 종사하면 되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오직 제사장의 일이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삶을 전적으로 바치지 않았고 오직 자기 소유물의 십분의 일(십일조)과 일주일 중 하루(안식일) 그리고 간단한 의식(예배)만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인생은 자기 마음대로 썼다. 그들에게는 자기 인생의 9/10 또는 6/7은 자기 것이고 단지 1/10 또는 1/7만 하나님의 것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16,17,23)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예외도 없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원적인 삶이 용납되지 않는다. 


성직자 제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성직자가 결과적으로 다른 신자들의 삶이 이원적이 되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신앙 생활을 대행하거나 면제해주는 것은 그로 하여금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다른 한편으로 세상을 섬기도록 돕거나 방조하는 것이다. 몸의 지체들 가운데는 한 지체가 다른 지체를 지배하는 일도 없고 한 지체가 다른 지체들의 기능을 대행하는 지체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도 한 지체(목사)가 다른 지체들(일반 신자들)의 신앙을 주장하거나 대행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이 다 하나님을 힘대로 섬기지 않고 성직자(교역자)와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구분되어 성직자는 다른 신자들 위에서 그들의 신앙을 주장하며 대행하고 신자들은 얼마간의 헌금을 내고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만 하면 되는 식의 행태는 신약 시대에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십일조 또는 주일성수라는 제도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시간이나 돈의 일부만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내 것이라는 생각이다. 집회에 참석하거나 기도 또는 찬송을 하거나 성경을 읽고 봉사하는 시간만 하나님을 위해 드려지는 거룩한 시간이 아니라 먹고 자고 아이 키우고 돈 벌고 일하는 모든 시간이 다 하나님을 위해 드려져야 할 거룩한 시간이다. 그것이 온전케 될 때 즉 우리의 모든 삶이 거룩한 삶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진리 안에서 온전히 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합당치 않은 말과 행동부터 버려야 한다. 즉 우리는 ‘예배’란 말도 쓰지 말아야 하며 십일조나 주일성수라는 말도 쓰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말만 안 쓰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원적인 삶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온 몸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전 시간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전체(全體)로 섬겨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율법을 비롯한 구약의 제도들과 신앙 시스템을 따르려면 그는 구약의 일부 형식과 제도(십일조나 안식일 준수, 음식을 가리는 것 등)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구약 전체를 다 받아들여야 한다. 할례도 받고 유월절도 지키며 동물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일까지 다 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첫 것에 속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 따라가야 한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3,4) 우리는 구약을 다 취하든지 아니면 다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한다. 구약을 취하든지 신약을 취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해야 한다.  


정해진 시간(안식일, 주일)과 정해진 장소(성전, 교회)에 중보자(제사장, 목사)의 인도를 따라 이루어지는 어떤 행위를 예배라고 한다면 그런 예배는 절대로 신약에 속한 참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예배(섬김)를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신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그것들을 폐하시고 성령 안에서 새롭고 완전한 세계를 여신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아들의 생명을 누림으로써 아들로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유일한 참 예배이다. 예배라고 하든 삶이라 하든 이름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것은 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가 있으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그리스도가 없으면 무슨 행위를 하든 하나님은 그것을 보지 않으신다. 그리스도 없는 모든 경건의 모양과 그럴듯한 의식은 다 죽은 종교 놀음에 불과하다.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참된 신앙 생활에 방해가 되는지 유대인들의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주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만일 정기적으로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죄인된 실상을 더 빨리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양을 잡고 향불을 피우며 구제와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 섬기는 모양을 정기적으로 내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 소망도 없는 절망적인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렇게 깨닫지 못하고 교만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로 회칠된 무덤처럼 자기는 의사가 필요 없는 건강한 자이며 해방과 구원이 필요 없는 경건한 자라고 스스로 착각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들의 종교적 지식과 종교 행위들(의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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