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요한복음 7장
47.자기 때가 없는 사람
“이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요7:1-10)
요한은 A.D. 29년 4월에서 10월 사이에 발생한 사건들을 “이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는 한 절 로 요약하고 있다. 하지만 10월에 있는 유대인의 중요한 절기인 장막절(초막절, 유대력 7월 15-22일)이 다가왔을 때 주님은 다시 유대로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주님은 명절 초기에 일찍 올라가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가(성령의 인도를 받고서) 명절 중간 무렵에 올라가셨다.
그렇게 한 까닭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어차피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죽음을 당할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 때나 그렇게 할 수는 없었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했다. 나중에 드러난 것이지만 그 때는 (장막절이 아니라) 유월절이었다. 그래서 성령님은 장막절에 주님을 될 수 있는 한 늦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처치할 충분한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려 하였다.
주님이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속히 올라가려 하지 않자 예수님의 동생들(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은 예수님을 힐난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주님의 처신이 일관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기에 주님은 자기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메시아로 알려지기를 원했으며 높은 지위를 획득하기를 원했다. 그런데도 명절에 수도로 올라가지 않고 계속 시골에 머물러 있으니 왜 그렇게 하느냐고 비판한 것이다.
동생들이 주님에 대해 그런 말을 한 것은 궁극적으로 그들 역시 다수의 유대인들처럼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이신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이 메시아의 모습과 세상에 등장하는 방식 등에 대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신 후 그들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행1:14)
동생들의 비판에 주님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는 말씀으로 대응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때(계획, 시간표)라는 것이 없는 사람과 항상 자기 때가 준비된 두 종류의 사람을 볼 수 있다. 주님에게는 자기 때라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 어떤 원칙에 의해 행동하는가? 아무 생각이 없이 되는 대로 움직이는가?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성령)이 그에게 말씀하실 때 움직인다.
세상 상식적으로 말하면 동생들의 주장이 옳다. 자기를 나타내려 하면서 묻혀 있는 것은 옳지 않다. 주님은 분명히 산 위의 동네와 같이 또는 등불과 같이 온 세상에 자기를 나타내려고 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주님은 자주 예루살렘으로 가서 일을 했으며 장막절에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시골에 묻혀 있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한 그가 동생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권할 때는 올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동생들이 올라간 다음에는 태도를 바꿔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이러한 주님의 행동은 사람들이 보기에 일관성이 없고 원칙이 없는 행동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렇게 행동했으며 그렇게 사셨다. 왜 그랬는가? 그것이 바로 아버지를 따르는 아들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바로 목자를 따르는 양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양은 목자를 따르고 아들은 아버지를 따른다. 그것이 바로 양이고 아들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7,19)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다가 다시 올라간 것은 그가 자기 때를 따라 사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때를 따라 사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때 곧 자신의 야망과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아버지를 따랐다. 그의 관심은 율법이 무어라고 하느냐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느냐 내 육체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는 데 있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며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항상 성령을 좇아 행했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이러한 주님의 태도는 곧 오늘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기를 원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계획과 다른 자기 계획, 자기 야망이라는 것을 품고 있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때와 다른 ‘자기 때’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때에 따를 수 없다. 자기 계획과 자기 때를 가진 사람은 마음이 조급해서 무슨 일이든지 기회를 보아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자기 때와 자기 계획이 없었으므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그를 언제 어디로 이끄시든지 따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조급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평안할 수 있었다.
48.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이유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세상을 악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며 궁극적으로는 그 둘의 생명이 다르기 때문이다. 의와 진리에 속한 자는 궁극적으로 악과 거짓에 속한 자들과 어울릴 수 없으며 그들에게 동조하거나 그들의 일에 찬성할 수 없다. 사실 주님은 세상을 악하다고 그렇게 자주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자기 일을 했으며 자기 길을 갔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그를 미워하고 죽이려고 한 것은 그의 빛이 세상에 비췰 때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빛나는 존재와 삶’은 세상에 대해 저절로 빛이 되었으며 저절로 정죄와 심판이 되었다.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나타내는) 것마다 빛이니라”(엡5:13) 어두움은 억지로 정죄하지 않아도 빛 앞에서는 저절로 어둠으로 드러나며 심판된다. 결국 악하고 불의하고 거짓된 세상은 착하고 의롭고 진실한 주님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워하고 죽인 것이다.
처음에 주님은 “세상에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나중에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요15:18-21)라고 하심으로써 세상이 주님 뿐 아니라 ‘제자들도’ 미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이 그리스도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들도 미워하는 것은 이 둘이 같은 생명을 가졌으며 공동 운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3:20,21) 그러므로 이것은 어떤 조직이나 단체, 소속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다. 교회 다닌다고 다 세상의 핍박과 반대를 받는 것은 아니며 예수라는 이름을 입에 올린다고 해서 다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것은 아니다. 오직 예수의 생명이 그 속에서 드러남으로써 세상을 부끄럽게 하고 견딜 수 없게 하는 사람만 세상의 저항과 미움을 받는 것이다.
49.세상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을 보는 시각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7:11-13)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7:23,24)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7:40-42)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15)
세상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는가? 주님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혼란을 겪었다.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는 그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혹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외모 면에서 예수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같아 보이지 않았다. 가장 좋게 보는 사람들도 그를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았다. 이러한 어려움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세상이 그리스도(그리스도인)를 보는 시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를 도덕적 인간적 면으로 보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그리스도인)가 인간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얼마나 좋은 사람이냐’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그리스도인)는 다만 ‘좋은 사람’, ‘선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소위 성인 또는 훌륭한 선생이나 선지자로 추앙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가장 피상적으로 본 것이다.
둘째, 종교적 또는 정치적, 사회적 면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그리스도인)는 그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특성 때문에 자주 ‘세상에 문제를 일으키는 골치 아픈 존재’로 인식된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주장과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미혹, 선동하여 기존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요한복음 7:12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좋은 사람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무리를 미혹하는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다. 마태복음 16장에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 사람들의 시각이 나오는데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했다.
또 요한복음 7:40,41에 보면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고 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도덕적 인간적으로 본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라고 했고 사회적 정치적으로 본 사람들은 좋지 않은 사람, 골치 아픈 사람으로 치부했다.
주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도덕적이고 인간적으로 볼 수만은 없었다. 그것은 그의 사회적 영향력이 너무 커서 자기들의 세계를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공산주의가 기독교를 핍박한 것은 그리스도라는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 그리스도는 특별히 유익하거나 해롭거나 위험하지 않은 존재로 평가되기도 했고 어떤 사회에서는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귀찮고 위험한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 세력(영향력)이 아직 미약하여 세상과 충돌이 없는 동안에는 그리스도(그리스도인)는 방임과 무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점차 세상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게 되면 세상과 충돌하게 되고 세상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정치가들과 충돌하지만 세상에 속한 다른 종교들과도 충돌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진리가 독선적이고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단적인 입장으로 인해 세상은 그리스도를 거북하게 생각한다. 그리스도와 세상 종교의 궁극적 차이는 무엇인가? 세상 종교들은 그들이 비록 세상과의 차별을 선언하고 세상을 구원의 대상으로 여긴다고 하나 (원리나 교리가 아니라) 실제로는 세상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며 세상 가치와 정신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세상과 하나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 비해 그리스도는 세상과 완전히 구별된 위치에서 세상과 전혀 다른 길을 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매우 독단적이고 비타협적이고 반사회적인 존재로 비치기 쉽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별로 관계치 않지만 결국 반대하고 배척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
그 어떤 세상보다 그리스도를 더 싫어하고 배척하는 세상은 종교적 세상이다. 즉 세상의 종교인들이다. 주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고 중세의 교회 지도자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은 핍박을 받은 시기는 로마제국 시대나 공산주의 사회에서가 아니라 교회가 세상 권력을 잡고 있던 중세였다. 가장 교묘한 마귀는 종교로 거룩하게 포장된 세상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미혹, 선동하여 자기들의 왕국을 허무는 매우 골치 아픈 존재로서 제거 대상일 뿐이다.
셋째, 정치 사회 지도자도 아니고 종교인도 아닌 세상의 일반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직접 다가와서 부딪히는 경우가 아니면 상관치 않는 입장이다. 그들은 가능한 한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부딪히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공연히 자기와 무관한 일에 신경을 쓰다가 깊이 관여하게 되거나 그로 인해 무슨 오해나 손해를 입을까해서이다. 이처럼 대다수의 평범한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자기 삶에 깊이 개입하는 것을 꺼려한다.
넷째,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과 하는 일을 보고 그를 좋게 생각하며 존경하며 신뢰하지만 그의 외모에 걸려 주(主)와 그리스도로 인정하며 따르지는 못한다. 이것은 길가나 흙이 얇은 돌밭에 씨가 뿌려진 것과 같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과 행위에 공감하며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만 십자가의 도에 부딪혀서 결국 따르기를 포기하고 만다.
이것을 종합하면, 그리스도를 보는 세상의 시각은 한 마디로 말해서 ‘외모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과 입장들은 다 온당치 못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시각) 안에서 또는 계시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자기의 타락한 눈으로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 그의 생명을 받은 사람,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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