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요한복음 7장
50.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장막절 중간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주님은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그 가르치는 것이 너무나 탁월하고 권세가 있어서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눅2:46,47)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4:22)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 그리고 이러한 일은 주님만 행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주님의 제자들도 행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凡人)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행4:13)
주 예수님이나 그의 제자들은 가난하고 비천한 집안 출신이어서 교육을 별로 받지 못했다. (당시의 주된 교육은 율법 교육인데 상류층만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했으며 놀라운 권세로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어떻게 별로 율법을 배우지도 못한 사람들이 율법(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가르칠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 지식은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생명을 받은 자는 누구나 알 수 있다. 헤엄치는 만 가지 이론에 통달한 사람보다 그런 지식이 전혀 없는 물고기가 더 헤엄을 잘 치는 것은 물고기에게 ‘헤엄치는 (지식이 아니라)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이론을 전혀 배우지 못한 새들이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것 역시 새 안에 ‘지식을 능가하는 생명’ 곧 ‘나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지식은 절대로 생명을 능가하지 못한다. 그러나 생명은 지식을 포함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 27) 그리스도의 모든 지식과 능력은 다 그 안에 있는 ‘아들의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에서 나온 것이다.
아들만이 아버지를 참으로 안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 속에 새겨져 있어서 아는 것이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때가 되면 아들도 다 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둘이 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학자들에게서 율법 해석을 배운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통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 연구하는 자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난 자가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은 오직 자기 생명을 받은 아들에게만 자기를 열어 보이신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9-12)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아들의 영)을 받아야 하고 그 영을 좇아 살아야 한다.
율법에 대해 배운 것이 별로 없는 갈릴리 어부들이나 성경을 별로 공부하지 못한 오늘날의 시골 농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영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지식은 배움을 통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 사람의 지식은 인격(생명)으로서 자신과 하나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들은 말을 하는 것처럼 하지 않고 제것을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말할 때 멀리 있는 어떤 분을 힘들여 설명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을 말했다. 자기 안에 있는 마음과 뜻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나타내었을 따름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말한 것이 된 것은 그의 마음과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조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여 하나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뜻은 사람이 하나님을 모시는 집이 되어 하나님과 한 생명으로 연합하는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의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3,7) 이러한 일은 하나님(아들)의 영이 사람 안에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진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히8:10,11)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6,27) 이 기름부음(성령의 충만)이 바로 그리스도(그리스도인)로 하여금 배운 것이 없어도 하나님을 알고 말하게 만든 근원이다.
주님이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힘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하며 가르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자기 일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일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가 만일 하나님의 일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려고 했다면 즉 그가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따라 행하지 않고 육체의 원함을 따라 행하려 했다면 비록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권세 있는 생명을 지녔다 할지라도 그는 그렇게 영적 권세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는 날려고 할 때 그 일을 매우 쉽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생명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새가 (나는 것이 아니라) 헤엄을 치려고 한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그 일은 생명을 거스르는 반(反)생명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역이 순조롭고 권세가 있었던 것은 그가 오직 자기 생명대로 일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아버지의 뜻을 나타내고 아버지의 일을 이루고자 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5:19-30)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권세는 하나님의 뜻을 절대 순종하는 그의 아들의 길에서 나온 것이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이것이 핵심이다. 자기 뜻을 말하려는 사람은 스스로 말할 것을 연구하고 조직하느라 애를 써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대로 입을 벌리기만 하면 된다.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19,20) 이것이 바로 비결이다.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고 권세 있게 인생을 살려면 하나님의 생명을 거스르지 않고 오직 그 생명을 따라 살면 된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위로부터 받은 생명을 거슬러 살려고 한다면 그는 모든 면에서 피곤하고 억지스러운 인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생명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로 작정한다면 그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고 오직 성령 안에서 안식하면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려는 사람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든지 저절로 솟아나오며 아무 제한 없이 언제든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는가? 말씀을 전혀 배우지 않아도,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것으로 연단을 받지 않아도, 저절로 말씀을 풍성히 소유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일에는 과정이 있고 순서가 있다. 무릇 모든 생명은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을 거친 후에 온전케 되고 풍성케 된다. 그리스도의 생명도 생명이므로 역시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3-17) 이 말씀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형성되고 온전케 되려면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려면 말씀을 듣고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며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며 격려하며 일깨우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자나 교사나 전도자 등의 직분(은사)을 두신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영)이 있고 그가 그 생명의 인도를 따라 온전히 행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얼마든지 알며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외적 변수(外的 變數)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탄의 방해이다. 마귀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실행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훼방하는 자이다. 만일 이러한 방해가 없다면 사람은 한 번 성령을 받으면(말씀을 받으면) 아무 문제없이 끝까지 하나님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자기 안에 있는 문제이고 하나는 밖에 있는 문제이다. 육신의 연약함 즉 우리가 죄(사망)의 몸을 입고 있다는 것이 그 첫째이고 마귀가 우리를 그냥 두지 않고 쉴 새 없이 흔들어댄다는 것이 그 둘째이다.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고 바깥 환경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의 연약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영의 인도는 매우 놓치지 쉬운 것이다. 엘리야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바람이나 불이나 지진 같은 것을 일으키셨지만 그것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나간 후에 나타난 ‘세미(細微)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왕상19:12) 이처럼 우리 안에 역사하는 성령의 말씀도 대단히 세미한 음성이기 때문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말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세미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나 부주의한 상태에서는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 생명(성령)이 있다고 해서 다 말씀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전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뜻에 완전히 순종하고자 해야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풍성히 누릴 수 있다. 자기 생각에 깊이 빠져 있거나 세상의 말을 다 듣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어렵다.
그래서 때로는 바깥의 도움도 필요한 것이다. 먼저 말씀을 깨달은 형제가 다른 형제들에게 그 깨달은 말씀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혼자서는 말씀 위에 굳게 서기 어렵기 때문에 서로 돕고 격려하여 세워줄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그러나 이러한 일도 역시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다. 안에 하나님의 말씀(영)이 전혀 없다면 밖에서 아무리 가르쳐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생명과는 상관없는 지식뿐이다. 오직 속에 생명의 역사가 있는 사람이라야 밖에서 가해지는 생명의 역사에 반응을 나타낼 수 있다.
속에 말씀이 있는 자라야 밖에서 가르칠 때 말씀이 견고해지고 풍성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신학을 연구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또한 공부를 많이 못했으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잘못된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과 ‘영이요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성경을 공부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당연히 잘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주님의 발아래 앉아 겸손하게 그 음성을 듣는 사람만 생명의 말씀을 누릴 수 있다. 살아 있는 말씀을 가진 사람들 곧 영의 인도를 받는 형제들과의 교제가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주님의 이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뜻)을 온전히 깨달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당시 유대인들이 왜 명백한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그 이유도 말해준다. 주님은 세상을 구원하러 온 하늘의 보배였지만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은 주님이 한편으로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감추었기 때문이다.
그는 참으로 받을만한 자들에게만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 그 외모(겉으로 드러난 모습)를 초라하고 볼품 없는 모습으로 드러내었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받은 생명이 없고 사람을 외모로만 취하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로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별로 배운 것도 없고 집안도 보잘것없는 시골 청년 예수를 하나님께로 부터 온 그리스도로 아는 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자들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님의 말씀과 사역은 매우 권위 있었고 분명한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지만 사람을 외모로만 취하며 육체를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확실하고 귄세 있는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지 못했다. 그래서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7:24)
그러나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그 뜻을 행하려는 사람은 아무리 주님의 외모가 볼품 없더라도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으니 그것은 그들이 이미 자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경험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내 속에 있는 말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있어야 밖에 있는 말씀이 참 말씀인지 사람의 거짓된 말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
오늘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깨달으려면 좋은 연구 방법과 이해력과 열심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그대로 순종하여 행하겠다는 굳은 마음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실천 순종할 마음이 없이 그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쌓아놓기만 하려는 사람, 知的 만족을 얻기 위해 말씀을 대하는 사람,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만 말씀을 대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그 말씀의 비밀을 열어 보이지 않으시며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지 않는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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