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과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
요한복음 10장
69.생명 주는 영이신 그리스도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이 말씀은 주님이 무엇을 위해 세상에 오셨는지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주님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오셨다. 그는 정죄와 심판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게 하고 그 생명을 온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 첫 사람(아담, 인류)은 단지 산 자이지만 둘째 사람(마지막 아담)은 살리는 자이다.(고전15:45)
종교와 율법은 좋은 이야기를 하고 사람을 살리려는 것처럼 다가오지만 결국은 사람을 정죄하고 죽인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람에게 십자가를 던지지만 결국 사람을 살리고 온전케 한다. “의문(儀文, 율법)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3:6)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율법을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싫어한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보다 모세(율법, 종교)를 더 좋아했지만 그 모세는 그들을 정죄하고 심판했을 따름이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요5:45)
왜 율법과 종교는 사람을 죽이는가? 로마서 7장이 잘 말해준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롬7:8-10) 그러니까 사실은 율법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의 죽은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종교와 율법은 언제나 사람의 가능성을 부추김으로써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 충분히 배우기만 하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뭔가가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한편으로 율법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율법을 좋아하는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언제나 희망적인 말을 했으며 인간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열심을 촉구했다. 오늘날의 많은 설교들도 그러하다. 사람들이 복음보다는 윤리적인 설교를 듣기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와 율법이 사람에게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가르치고 훈련시키면 좋은 사람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배우면 배울수록, 경건의 모양을 취하면 취할수록 인간의 완악함과 무능이 더 드러난다. 그러므로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종교와 율법으로 자기를 선한 목자인 것처럼 꾸미고 있는 자들에게 속지 말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주님은 부드럽고 좋은 말, 희망적이고 달콤한 말을 하는 분이 아니라 세상에 불을 던지며 사람들을 십자가에 매다는 분처럼 보여진 점이 있었기 때문에 당신의 마음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눅12:49,51) 새 집을 지으려면 낡은 집을 먼저 무너뜨려야 한다. 주님이 사람들에게 불을 던지고 분쟁을 일으킨 것은 이 때문이다.
죄인들에게 경건과 윤리 도덕을 외치는 것은 사기이다. 이것은 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얼굴빛이 좋다고 말해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이러한 도적과 강도 같은 삯꾼 목자에게 속지 않으려면 생명에 대한 참된 갈망이 있어야 한다. 정말로 살고(영생을 누리고) 싶다면 정확한 진단과 사정없는 치료를 하는 좋은 의사를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러한 의사이다. 그는 사람의 어떤 사정도 봐주지 않는다. 그의 목적과 목표는 오직 하나, 사람을 살리고 그 생명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70.선한 목자와 복된 양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1-16)
어떤 목자가 참되고 선한 목자인가? 첫째, 양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자이다.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그가 참 목자인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거짓되고 허망한 종교의 길로 인도했지만 주님은 생명과 진리의 길로 인도하셨다. 둘째, 참된 목자는 양들에게 단지 생명의 길을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자신이 곧 양의 생명이 되며 양식이 되는 자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6:35,51) 주님은 양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바로 이 사랑과 희생에서 권세가 나온다. 목자의 진정한 권세는 양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양을 사랑하며 위하는데서 나온다. 이 사랑과 희생은 양의 신뢰와 순종을 불러일으킨다. 선한 목자는 양을 풀밭과 물가로 인도할 뿐 아니라 양을 늑탈하고 해치려는 원수들을 몸으로 막는다.
거짓 목자의 목적은 오직 양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 이상 이익을 얻을 것이 없거나 위험이 닥쳐올 때는 주저 없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들에게는 양이 자기와 하나가 아니고 자기 생명과 자기의 영원한 운명(신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는 그렇다. 그는 우리에게서 무엇을 바라는 자가 아니요 우리를 사랑해서 만들고 키우고 온전케 하신 분이다.
그는 우리에게서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필요로 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운명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이것을 운명적 사랑이라고 한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를 그의 신부로 그의 백성으로 데리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자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목자의 복은 목자를 알아보고 어디든지 따르는 양을 얻는 것이고 양의 복은 자기를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 참 목자를 만나 그로부터 생명과 안식을 얻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복된 양이라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참 목자를 어떤 상황에서도 믿어야 한다. 참 목자와 함께라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진실한 양의 모습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란 결국 십자가를 의미한다. 주님이 사람들에게 십자가(자기를 부인하도록 요구한 것)를 던지지 않았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가 행한 기적과 말씀에 매료되어 그를 끝까지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을 던졌고 칼을 던졌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4-39)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단순하게 하고 목표를 선명하게 해야 한다. 여러 가지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육체 안에서 헛된 희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 옛 삶이냐 새 삶이냐, 헌 집이냐 새 집이냐를 분명히 해야 한다. 애굽인가? 가나안인가? 육체의 영광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인가? 어차피 둘 다 가질 수는 없다. 새 것을 원한다면 옛 것은 버려야 한다. 이것이 곧 십자가이다. 우리가 만일 이 십자가를 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참 목자 대신 거짓 목자에게 속아 그를 따르게 될 것이다. 먹어도 배부르지 못할 것을 구하며 그것을 위해 은을 달아주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먹지 못할 것을 주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삯군(절도, 강도)이 걸려들게 되어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헛된 사상과 윤리, 종교로 사람을 낚으려는 거짓 목자들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특히 오늘날은 이러한 자들이 더욱 횡행하고 있는 시대이다.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새롭게(단순하게)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71.목숨을 버리는 권세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0:17,18)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양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세상에 오셨다. 이것은 타의에 의해 억지로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영생을 얻기 위해 이생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참 목숨을 얻기 위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지금의 목숨을 버리라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것이 바로 썩을 것을 심고 썩지 아니할 것을 거두는 복된 투자이다.(고전15:42)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망으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하는 승리의 원리이다.(히2:14,15) 주님은 친히 이 원리를 따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자기 목숨을 스스로 내놓았다. 주님은 사망을 피해 다니다가 억지로 죽은 것이 아니라 때가 이르렀을 때 스스로 목숨을 내놓으심으로써 사망을 무기로 하여 사람을 위협하는 마귀의 권세를 무색하게 만드셨다.
세상에서 가장 큰 권세는 사망 권세이다. 누구도 죽음 앞에서는 힘을 못 쓴다. 그래서 마귀가 온 세상 사람들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마귀가 죽게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이보다 더 큰 권세 곧 사망을 이기는 권세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권세’이다.
주님도 육체를 가진 분이요 목숨이 아깝기는 우리와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생명의 원리(진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람의 목숨이 마귀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를 해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마10:28)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한 번 죽는 것’을 피하려 하거나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그럴 필요도 없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히9:27)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야지 안 죽을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는 것은 최고로 잘 죽는 것이다. 이 죽음 뒤에는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마귀를 발아래 두고 다스릴 수 있다. 마귀는 그에게 아무 힘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에게는 총(으로 위협하는 것)이 무용지물이듯이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 목숨을 스스로 버리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거칠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그보다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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