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과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요한복음 11장
78.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6,2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으로서 죽지도 쇠하지도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이 생명이 사람 속에 들어가면 두 가지 일이 생긴다. 첫째, 그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살게 된다. 둘째, 그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죽어도 다시 사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생명 자체가 부활 생명이기 때문이다. 부활(復活, 다시 사는 것)이란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다.(히9:27) 그러나 그 죽음은 오직 ‘한 번’이다.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사람)을 죽게 하신 것은 그로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다시 살아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한 번 죽는 것은 새로운 생명(삶)의 기회를 얻는 것이며 축복이다. 만일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지 않고 거기 머물면서 생명나무 실과까지 먹고 영생하게 되었다면 -즉 죽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면- 그(인류)는 영원한 저주 가운데 처하게 되었을 것이다.(창3:22,23)
그러나 인류는 항상 죽음을 두려워했으며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해 왔다. 모든 환경이 지금보다 어렵고 살기가 힘들었던 옛날 즉 가난과 질병과 인권유린으로 인해 살기가 어려웠던 이전 시대에는 사람들이 세상(삶)에서 소망을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려하기보다는 도리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경향도 있었다. 죽음을 통해 괴로운 이 세상을 벗어나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적 환경이 좋아진 오늘날에는 될 수 있으면 죽지 않고 오래 살려고 애를 쓴다. 죽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든 소극적으로 피하려하든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무섭고 피하고 싶은 것임에는 틀림없다.
사람이 죽는 것은 범죄한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흙으로 지음 받았으니 당연히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이 죽는 것은 흙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명은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그런데 사람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스스로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왜곡된 피조물을 영원히 살게 할 수 없어서 흙으로 돌려보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죽음을 명한 다음부터 사람에게는 생명이 왕노릇하지 못하고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 안에 다시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게 되었으므로 사람은 다시 영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들어옴으로써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살고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은 ‘한 번’도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한 번은 죽되 두 번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말로 심각한 죽음은 바로 이 두 번 죽는다는 것(둘째 사망: 영원한 멸망, 계21:8)이다.
부활은 사람의 전인격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속 사람(영)이 먼저 살리심을 입고 겉 사람(몸)은 나중에 최종적으로 부활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 안에 영과 몸이 따로 있어서 각각 살아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람에게 역사하면 사람이 (몸은 죄로 인해 죽은 상태에 있으나) 하나님에 대해서 먼저 살아나기(관계 회복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롬8:10) 사실 사람의 죽음의 순서를 보면 겉 사람(몸)은 나중에(죽을 때) 죽지만 속 사람(영)은 처음부터 죽어 있기 때문에 부활의 순서도 속 사람부터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몸도 반드시 죽은 후 마지막 날에 비로소 부활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몸은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생명 공급을 통해 연약한 육신이 강건해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롬8:10-14)
그리스도인의 삶은 죽음을 피하거나 삶에 집착하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죽음을 극복하고 삶을 풍성하게 누리는 적극적 삶이다. 이 모든 것이 부활 생명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우리의 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어도 사는 것을 날마다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 있을 몸의 완전한 부활과 영생을 믿어야 하며 그로 인해 두려움과 집착 없이 여유롭고 담대하게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부활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 사람(영)이 살아난 것처럼 우리의 겉 사람(몸)도 날마다 살리심(강건케 됨)을 입어야 한다. 몸을 주님을 위해 드림으로써 주님도 우리의 몸을 위하시는 체험을 날마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6:13)
주님이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나타내고자 한 사실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약속의 구원자(메시아)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은 단지 그의 능력이 매우 놀랍다는 것을 보이려 한 것은 아니며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나사로처럼 병들거나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말하려 한 것도 아니다. 주님이 참으로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은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위로부터 온 생명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리심을 입어야 할 필요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과 그런 살아남(蘇生)은 오직 주님의 부활 생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어 다시 살게 하려는 것이며 그렇게 하여 사람을 자기 안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부활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것 즉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게 되는 것 자체가 부활이다. 진정한 부활은 영이 살고 그 다음에 몸(죽을 몸)도 사는 것이다. 영의 회복(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없는 부활은 백 번을 죽었다가 다시 산다 하더라도 무의미한 것이며 진정한 부활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백 번을 다시 살았다 하더라도 어차피 또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성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영원히 죽지 않는 성질을 얻어서 다시 사는 것만이 진정한 부활이다.
79.실천적 믿음의 어려움
마르다는 평소에 주님을 깊이 신뢰하고 따랐던 사람이다. 그러나 나사로가 죽은 후 주님을 만났을 때 그녀가 보여준 태도는 사람이 얼마나 믿음이 없으며 급할 때는 그나마 있는 믿음이라도 발휘하기가 더 힘들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나사로가 죽은 후 주님이 찾아오셨을 때 마르다는 주님께 먼저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아쉬움과 원망이 섞인 말이었다. 나중에 마리아도 그런 말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어서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라도 주님께서 능력으로 자신들을 돌아보며 구원하실 것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을 했다.
그때 주님은 그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니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 날에 나사로가 산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날에는 모든 사람이 다 사는 것이다. 주님은 지금 그런 일반적인 사실을 가지고 마르다를 위로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 실제로 나사로를 다시 살리러 오신 것이다. 마르다는 분명히 앞에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을 했다. 이것은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는 믿음이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나사로가 부활할 것은 믿지 못했다.
그때 주님은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었다. 그때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것은 동문서답이다. 주님은 마르다에게 주님이 가지고 계신 생명을 다시 살리는 능력(부활 생명)을 믿느냐고 물으신 것이며 그것으로 나사로를 다시 살릴 수 있음을 믿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그러나 마르다는 단지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또 주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셔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셨을 때도 마르다는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이제는 다 소용없다는 듯이 말했다. 주님은 그때 마르다에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하신 후 나사로를 그 ‘죽어서 냄새나는’ 상황에서 소생시키셨다.
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졌으면서도 주님의 생명을 풍성하게 체험하지 못하는가? 첫째, 계시에 대한 무지 또는 진리에 대한 불확실한 지식 때문이다. 둘째, 세상 상식과 관념이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믿음의 가장 중요한 방해 요소이다.
먼저 우리는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가 무엇을 말씀하시고 약속하셨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주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면 그의 호흡이 닿는 곳마다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확실히 알고 믿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이루리라”고 약속하셨고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고 말씀하셨으며 “무엇이든 믿음으로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것을 확실히 안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한 것은 틀림없이 그대로 다 이루어질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주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소 의심과 두려운 마음이 들더라도 성령을 의지하여 주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을 되새기면서 그것을 물리쳐야 한다. 마귀가 세상 상식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믿음을 방해할 때 그것을 단호히 뿌리쳐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때로 의심과 두려움에 시달릴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의심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의심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의심이 생길 때 그것을 주님의 도우심으로 뿌리치느냐 아니면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계속 의심하고 그 의심을 키워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상한 말 같지만 우리는 다소의 의심을 안고서도 주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가벼운 병을 몸에 지니고서도 몸이 여전히 건강하며 일을 잘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은 전체적인 건강이 약간의 연약함(병)을 삼키고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심이 생길 때도 우리는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의심은 우리의 무지(無知)와 연약으로 인해 생기는 일부의 문제로 남겨 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것을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여 길 자체가 멈추어지게 되면 그는 마귀에게 완전히 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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