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과 세상을 책망함
요한복음 16장
112.종교적 세상으로부터 핍박 받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失足)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黜會)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例)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16:1-4)
주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까닭에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될 것임을 예고하셨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세상’은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가? 두 종류의 대표적 세상이 있다. 하나는 정치 권력을 가진 세상이고 또 하나는 교권을 가진 (타락한) 종교적 세상이다.
정치 지도자들이나 완악한 죄인들만 그리스도인을 대적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그를 대적하고 핍박했던 자들은 유대를 지배하던 로마 관리들이나 무지한 유대 민중들이 아니라 (유대왕 헤롯 일당을 제외하면) 모두가 제사장, 장로, 서기관, 바리새인 등과 같은 종교(유대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보면 세상이 아니고 교회이다. 그러나 실상은 세상이다. 종교로 위장한 교묘한 세상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종교적 세상으로부터 배척되고 핍박 받았다. 이러한 일은 그 후에도 계속 되었고 오늘날까지 반복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걸고 있는 집단(교회)과 개인(종교 지도자들)으로부터 핍박을 받아왔다. 교회의 세속화에 저항했던 2세기의 몬타누스파, 3세기의 노바티안파, 도나투스파, 9세기의 바울파, 11세기의 보고밀파(하나님 친구들), 12세기의 알비파, 왈도파, 종교개혁 전 영국의 롤라드파, 보헤미아의 후스파, 연합형제단, 종교개혁기(16세기)의 재세례파(독일), 위그노파(프랑스), 비국교도(영국), 17세기의 라바디파, 스페너의 경건파, 진젠돌프와 모라비아 형제단, 18세기의 빌라델비아 모임 등과 같은 각 시대의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대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기독교 교권주의자들(로마카톨릭, 성공회, 루터교회)로부터 끊임없는 배척과 핍박을 받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교회를 근본적으로 황폐하게 만들기 위해 사탄이 교회 안으로 침투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를 대적하고 핍박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제사장과 장로 등의) 유대교 지도자들을 가리켜 사탄의 무리(독사의 자식들)라고 부르셨다. 요한계시록 2:9과 3:9에서 주님은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 안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힌 소위 유대인의 무리들을 ‘사탄의 會’라고 부르셨다. 이들은 세상과 연합하여 본질적으로 세상과 하나가 된 거짓 교회(그리스도인)이다. 이름은 교회지만 실상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탄의 종들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세상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드러내놓은 세상’이고 하나는 ‘기독교로 위장한 세상’이다. 우리는 더러운 세상, 곧 공개된 세상보다 ‘깨끗한 세상’ 곧 위장된 세상이 더 위험하고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이미 자기 하나님을 가지고 있고 자기 거룩과 자기 행실(육체의 자랑거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그들의 거짓 세계(계17:4)가 드러날까 하여 생명에 속한 자들을 철저히 대적하고 괴롭힌다. 종교인들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것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과 그 섬김의 행위가 참 그리스도인들이 생명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것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즉 세속적인 종교인들이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은 그들의 거짓된 종교 세계가 진실한 형제들의 참된 믿음과 삶으로 인해 무너지게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택하고 자기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믿고 있다. 이것은 다 자기(육신의 욕망)로부터 출발한 것이요 하나님(계시)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려면 하나님께로 가는 길 곧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가져야 한다. 그 길은 그리스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는 거부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운명이 사람들이 스스로 바라고 꿈꾸는 것 즉 육신의 원하는 길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자기(육신의 원함)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통해 편안하고 행복한 (육신적) 삶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맞지 않는 괴로운 일이다.
만일 사람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홍길동이나 흥부나 심청이 또는 구약의 욥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은 (육신적으로) happy ending으로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삶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으로 막을 내렸으므로 결국 거절하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섬기기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운명이 불신자들로부터 거부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나 그리스도는 거부하는 자들’로부터도 핍박과 훼방을 받게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언제나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덕택에 자기는 ‘안 죽고 편히 살려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거짓된 왕국 안에 안주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세상에서는 육신대로 편히 살다가 죽은 후에는 하늘의 영광을 누리고자 한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길에 방해가 되는 경건한 신자들을 ‘별나고 까다로운 자’, ‘분리주의자’,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 ‘이단’, 등으로 몰아붙여 핍박한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할 때 그들의 양심은 사탄에게 속아 무디어져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마치 ‘하나님을 위하는 일’인 것처럼 생각하며 대담하게 행한다.
113.주님이 떠나셔야 하는 이유 (16:5-7)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16:5-7)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영원히 땅에 계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자기들을 돌봐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사람들(세상)이 빛이신 주님을 싫어하여 거절했기 때문이다. 사탄에게 속은 인간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고 그 어둠 속에 계속 머무르기를 원했다. 이로 인해 주님은 불과 30여 년의 생애를 보낸 후 이 땅을 떠나가야만 했다. 주님이 이 땅을 그렇게 속히 떠나신 것은 그가 빨리 떠나고 싶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30여 년도 견디기 힘들어한 세상 사람들 때문이었다.
둘째,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대속(代贖)의 죽음 곧 희생적 죽음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럴 뜻만 있었다면 주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대적하고 억지로 죽이려고 할 때 능히 그것을 물리치고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를 거부하시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까닭은 마귀에게 속아 자기를 지으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적대하는 인생을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셋째, 사랑하는 자들에게 더 큰 은혜(성령)를 베풀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과 완전하게 연합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사람과 연합하기 위해 처음에는 ‘말씀’을 주셨고 다음으로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그리스도로) 사람들 가운데 있게 하셨으며 마침내는 그 ‘육신이 된 말씀’이 영(靈)이 되어 각 사람들 속에 영원히 머물도록 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있는’(계21:3) 임마누엘 또는 새 예루살렘의 성취이다.
114.세상에 대한 책망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나를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말씀해 주실 것이며,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므로 너희가 나를 더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임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세상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심판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말씀해 주실 것이다.)
주님은 성령님이 세상에 오시면 죄(罪)에 대하여 의(義)에 대하여 심판(審判)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세상이 주님을 믿지 아니한 것을 책망하신다는 말씀이고, ‘의에 대하여’라 함은 주님이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제자들이 더 이상 주님을 볼 수 없게 된 것에 대해 책망하신다는 것이다. 또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이 심판을 받았음을 근거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이다.
1.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이 이르기 전에도 성령께서 그 택하신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워 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게 하실 것이다. 세상은 그들이 지은 죄로 인해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때 구체적으로 그들의 죄를 따지실 것인데, 그 죄는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불순종(타락)한 것만 해도 죽을죄를 지은 것인데 그런 자리에서 자기를 건지러 오신 구원자를 거절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다. 결국 ‘세상의 죄(the sin)’는 주님을 믿지 않은 것이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먼저 심판 받아야 할 인류의 근본적 죄는 ‘사람이 그 지음 받은 자리에서 타락하여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지 않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요 진실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가 짓지 않은 ‘사곡(邪曲)한 종류’(신32:5)는 그의 나라에 있게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인류는 반드시 심판을 받아 멸해져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나타낼 영광스러운 아들을 지으셨지 오늘날 세상에 있는 이런 종류는 짓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크신 은혜로 인류를 다시 영광스러운 존재로 회복시키겠다고 작정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새 인류를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이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궁극적인 일은 이 하나님의 구원자를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다시 이르게 되는 이 한 가지이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그들의 구주로 오신 분을 거절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성령)께서 세상을 책망하실 궁극적 죄(the sin)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죄에 대해 말씀하실 때 다른 모든 자잘한 죄들은 접어두고 오직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에 대해 말씀하실 것이다.
2. 하나님은 의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향해 “너희들은 나와 다른 (불의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내 나라에서 나가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심판이다. 그러나 그때 세상이 자기들의 (인간적) 義를 내놓으면서 “우리는 비록 하나님을 떠났지만 도덕과 종교와 법을 통해 이렇게 좋은 것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의가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다른 것은 다 놔두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여서 세상 밖으로 내쫓으신 것을 제시하시면서 그들의 입을 막으실 것이다.
주님은 의롭고 흠 없는 분이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세상은 그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가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고 쫓겨난 것은 세상에 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라는 말씀의 일차적인 의미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그 말씀을 거부한 것이 바로 인류가 그들의 모든 도덕과 그럴듯한 문화와 종교와 사상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불의하고 무도(無道)한 존재임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주님이 가신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세상이 수용하지 않아서 가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그런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이다. 주님이 세상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된 것이다. 즉 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그의 약속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주님이 아버지께 가는 것 즉 그가 십자가를 지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세상(인간)에는 의가 없지만 하나님께는 의가 있음을 나타내셨다.
3.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할 때 만일 세상이 “당신은 무슨 근거로 우리를 심판하려고 합니까? 우리가 왜 비뚤어진 존재입니까? 모든 인류는 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비정상적인 존재라는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당신은 처음부터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만일 당신이 말하는 그런 참 인간이 있다면 어디 우리에게 한번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실까? 이에 대해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과 (그 임금) 마귀가 이미 심판 받았음을 제시하심으로 답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제시하심으로 그리고 그에게 속한 의인들(의와 진리를 위해 죽은 자들)을 제시하심으로써 악한 자들의 모든 거짓된 입을 막으실 것이다. 마귀는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결코 심판을 받지 않았다. 그 까닭은 하나님이 그가 틀렸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를 심판할 명백한 근거를 제시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마귀의 입을 막을 수 있는 명확한 근거를 내놓으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귀는 무슨 변명을 하는가? 마귀는 무엇으로 그동안 자기가 옳다고 주장을 했는가? 그것은 마귀와 그에게 속한 자들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사람 중에서 그렇지 않은 존재 곧 아버지께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을 위해 자기를 드리는 (아들의) 인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자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런 자가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귀와 그에게 속한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그들이 자기의 지음 받은 처소를 이탈하여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사람 곧 그 지음 받은 자리에 서서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아들이 아무도 없었으므로 세상과 마귀는 하나님께 심판을 받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아들이 없음으로써 그들의 심판을 집행하지 못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그렇게(미루신) 하신 것이 아니라 정한 때를 기다리고 계셨을 따름이다. 그런데 바로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완전한 순종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세상과 마귀를 심판하실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셨다. 요12:23-34의 말씀을 보면 주님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목적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시게 되자 세상 임금이 이 땅에서 쫓겨나게 되어 더 이상 왕 노릇을 할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은 드디어 세상을 심판하시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해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이제 하나님은 사는 모든 날 동안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완전하게 순종하신 한 사람을 세상과 마귀에게 증거물로 제시하시면서 “보라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지은 참 아들이다. 그에 비추어 보건대 너는 내가 짓지 아니한 사곡한 종류가 아니냐?”라고 말씀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65 | 제65과 주님의 큰 기도 (2) | 이상봉 | 2010.05.05 | 2743 |
64 | 제64과 주님의 큰 기도 (1) | 이상봉 | 2010.05.05 | 2731 |
63 | 제63과 진리의 성령 | 이상봉 | 2010.05.05 | 2789 |
» | 제62과 세상을 책망함 | 이상봉 | 2010.05.05 | 2762 |
61 | 제61과 우리의 길 | 이상봉 | 2010.05.05 | 2612 |
60 | 제60과 열매맺는 삶 | 이상봉 | 2010.05.05 | 2806 |
59 | 제59과 산 자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 이상봉 | 2010.05.05 | 2807 |
58 | 제58과 그리스도 안에 | 이상봉 | 2010.05.05 | 2729 |
57 | 제57과 처소와 길 | 이상봉 | 2010.05.05 | 2799 |
56 | 제56과 새 계명 | 이상봉 | 2010.05.05 | 2711 |
55 | 제55과 유다를 향한 권면 | 이상봉 | 2010.05.05 | 2776 |
54 | 제54과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그리스도 | 이상봉 | 2010.05.05 | 2794 |
53 | 제53과 하늘에서 난 소리 | 이상봉 | 2010.05.05 | 2807 |
52 | 제52과 자기 생명을 영원히 보존하는 길 | 이상봉 | 2010.05.05 | 2835 |
51 | 제51과 기록된 대로 사는 삶 | 이상봉 | 2010.05.05 | 2778 |
50 | 제50과 복음은 가난한 자의 것 | 이상봉 | 2010.05.05 | 2806 |
49 | 제49과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 | 이상봉 | 2010.05.05 | 2961 |
48 | 제48과 눈물을 흘리신 주님 | 이상봉 | 2010.05.05 | 2794 |
47 | 제47과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 이상봉 | 2010.05.05 | 2798 |
46 | 제46과 나사로를 살리심 | 이상봉 | 2010.05.05 | 2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