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과 주님의 싸움
요한복음 18장
129.베드로의 칼을 거두심
주님이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보낸 무리들에게 잡히시게 되었을 때 베드로는 칼을 꺼내어 무리 중의 한사람인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었다. 이 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시면서 베드로의 행동을 막으시고 말고의 귀를 도로 붙여 주셨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고 되어 있다.(눅22:50,51) 또 마태복음에는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고 했다.(마26:51-54)
대적들이 주님을 해치려하는 것을 베드로가 힘(칼)으로 막으려 하는 것을 주님께서 금하신 것은 그때 주님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이 사람(주님의 대적들)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람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이 사실은 사람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 또는 마귀의 뜻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계셨다. 세상 만사는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적극적인 뜻이든 소극적인 뜻(마귀의 일을 허락하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든 다 하나님 안에서 되는 것이지 하나님 손밖에서 되는 일은 없다.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로 몰아가는 원수들의 공격을 담담히 받아들이셨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을 하나님 안에서 보기 때문에 요동하거나 염려하지 않는다. 만물을 주장하는 전능하신 이를 아버지로 두고 있는 사람은 세상과 싸우지 않으며 일이나 사람과도 싸우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며 아들의 생명을 위하시기 때문에 어떤 일이라도 궁극적으로 해로울 것은 없다.
원수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심부름꾼 노릇뿐이다. 주님을 죽이려 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을 판 유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사형 결정을 내린 본디오 빌라도가 한 일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세상 죄를 처리하고 부활로 말미암아 새 인류를 탄생시키는 일을 하는데 협력한 것이며 그로 인해 주님이 만물과 교회의 머리가 되어 온 세상을 영원히 다스리도록 협력한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항상 불안하며 범사에 요동할 수밖에 없다. 좋은 일이 있으면 들뜨거나 교만해지고 괴로운 일이 있으면 낙심하고 절망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일 자체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만 생각한다. 그의 관심은 환경 자체가 아니라 오직 환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다.
주님은 어떤 일이 생길 때 그 일이 누구 때문에 일어난 것인가 하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고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도무지 사람과는 상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을 바라보거나 의지할 일도 없고 싸우거나 원망할 일도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배우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쉬운 길’을 보게 된다. 주님의 삶은 우리가 지금 누구이며 어떤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일이나 사람을 보지 않고 그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과만 상대해야 한다. 일 자체나 일과 관련된 사람들과 시비를 가리며 싸워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 다 이해되고 다 인정을 받고 받아들여지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할 대상,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다고 인정되면 사람은 볼 필요가 없다. 담대히 자기 길을 가면 된다. 주님은 평소에도 그랬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바로 이런 여유를 보이심으로써 말미암아 그가 가진 생명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생명임을 드러내셨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칼을 거두라고 하신 것은 그 싸움이 칼을 가지고 사람과 싸워야 할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일의 실체는 무엇인가? 진리가 거짓과 불의에 의해 핍박을 받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누구에게 어떻게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가?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실제로 싸워야 할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마귀이다.
모든 거짓과 불의는 사람이 아니라 그를 격동하여 그런 일을 하게 만드는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다. 마귀는 거짓과 살인의 아비이며 모든 악을 만들어내고 뒤에서 조종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진리를 대항하며 악을 저지르는 모든 사람들은 다 사탄의 허수아비일 따름이다. 따라서 주님이나 우리의 싸움은 사람 이전에 먼저 사탄과 싸워야 할 싸움이다. 그래서 주님은 대제사장의 종과도 더 나아가서 대제사장과도 빌라도나 헤롯, 로마 황제나 그 어떤 사람과도 싸우지 않은 것이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우리의 싸움이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세상을 주관하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라고 했다(엡6:12). 싸울 대적을 알고 싸워야 이길 수 있으며 그의 무기가 무엇인지 알고 싸워야 이길 수 있다. 문제를 일으키는 자는 사탄이고 그의 무기는 거짓말과 사망 권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들고 싸울 무기도 쇠로 만든 칼이 아니라 영적 칼이어야 하며 사망을 이기는 부활 생명의 능력을 힘입어 싸워야 한다.
영적 칼(성령의 검)이 무엇인가? 바로 진리이다. 거짓말하는 자와의 싸움은 진리를 드러내고 거기에 순종하는 것으로만 이길 수 있다.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6:14-18)
우리가 만일 진리 위에 서지 않고 또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없다. 싸움이 되지도 않는다. 칼을 휘둘러 귀신을 잡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우리가 말씀에 순종해야 할 때 순종하지 않고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할 때 죽기를 무서워하여(편히 살고 싶어서) 그 자리를 피한다면 결코 사탄을 이길 수 없다.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고 기어이 살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 죽을 때까지 사람과 싸워야 한다. 마귀의 종노릇을 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그 책임을 묻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문제이고 그와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는 우리 문제이다. (마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사람과 싸우면 마귀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마귀를 이롭게 한다. 사람과 싸우는 것은 정확하게 사탄의 뜻대로 되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둘 다 망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는 마치 벤치 뒤에 숨어 있다가 벤치에 앉아 졸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몰래 그 중 한 사람을 꼬집음으로 둘 사이에 싸움을 붙이는 자와 같다. 우리는 일의 이러한 실상을 항상 직시해야 한다.
베드로는 칼을 가지고 사람과 싸우려 함으로써 하나님을 위하려 했지만 결국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도망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원수들에게 순순히 잡혀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원수를 이기셨다. 이 땅에서 마귀를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싸움에서는 다른 어떤 수단으로도 승리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알고 거기에 순종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만 승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코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던 것은 자기 잘못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다른 사람들 때문이었다. 왜 자기 일도 아닌 남의 일 때문에 죽어야만 하는가? 아버지의 뜻이 그랬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세상의 죄인들, 잃어버린 자식들을 사랑하사 찾고자 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독생자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이루기 원했기 때문에 아들은 부득이 자기 목숨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주님은 그런 아버지의 뜻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순종했는가? 자기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과 같고 자기 생명이 아버지의 생명과 같았기 때문이다. 곧 아버지 안에 있는 ‘사람을 향한 사랑’이 아들 안에도 똑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십자가를 진 것은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거부할 수 없는 생명의 요구와 부담으로 말미암아 (괴롭지만) 스스로 한 것이다.
우리 안에는 이 생명이 없고 이 진리가 없는가? 우리가 진실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우리 안에 다 진리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이 생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요구를 싫든 좋든 다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물려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할 수 없다. 육신이 좋아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물리적으로 항거할 수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명과 양심으로 인해 항거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때 우리 육신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나와 무관하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외친다. 그러나 우리는 최종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생명 깊은 곳에서 “그 모든 말씀은 다 옳은 것이야”라고 하며 찬성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진리의 사랑을 받은 사람’(살후2:10, 구원을 받은 사람)은 결코 진리를 거스를 수 없다.
그러므로 싸움이 시작될 때 육체의 의견을 묻지 말며 육체의 동의를 구하지 말아야 한다. 상식의 동의도 구하지 말아야 한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세상 사람들이 그럴 때 어떻게 대응하는가도 보지 말아야 한다. 오직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며 내 생명이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만 주의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진리를 따르는 자가 될 것이며 마침내 사탄을 이기게 될 것이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85 | 제85과 나를 따르라 | 이상봉 | 2010.05.05 | 4766 |
84 | 제84과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이상봉 | 2010.05.05 | 4804 |
83 | 제83과 새로운 그리스도의 탄생 | 이상봉 | 2010.05.05 | 4312 |
82 | 제82과 보지 않고 믿는 믿음 | 이상봉 | 2010.05.05 | 6017 |
81 | 제81과 부활하신 그리스도 | 이상봉 | 2010.05.05 | 4735 |
80 | 제80과 인생의 성공과 완성 | 이상봉 | 2010.05.05 | 4427 |
79 | 제79과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 이상봉 | 2010.05.05 | 6817 |
78 | 제78과 물과 피 | 이상봉 | 2010.05.05 | 4916 |
77 | 제77과 성경의 증거를 받는 삶 | 이상봉 | 2010.05.05 | 4082 |
76 | 제76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 이상봉 | 2010.05.05 | 4812 |
75 | 제75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죄 | 이상봉 | 2010.05.05 | 4201 |
74 | 제74과 진리에 속한 나라 | 이상봉 | 2010.05.05 | 4857 |
73 | 제73과 불행한 쓰임 | 이상봉 | 2010.05.05 | 4280 |
» | 제72과 주님의 싸움 | 이상봉 | 2010.05.05 | 4183 |
71 | 제71과 잡히신 그리스도 (2) | 이상봉 | 2010.05.05 | 4147 |
70 | 제70과 잡히신 그리스도 (1) | 이상봉 | 2010.05.05 | 4520 |
69 | 제69과 주님의 큰 기도 (6) | 이상봉 | 2010.05.05 | 4281 |
68 | 제68과 주님의 큰 기도 (5) | 이상봉 | 2010.05.05 | 4240 |
67 | 제67과 주님의 큰 기도 (4) | 이상봉 | 2010.05.05 | 4605 |
66 | 제66과 주님의 큰 기도 (3) | 이상봉 | 2010.05.05 | 45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