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죄
요한복음 19장
135.그리스도의 죄목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한 것은 그가 자기들에게 걸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죽일 수는 없었으므로 그들은 다음과 같은 명분을 내세워 주님을 정죄하고 죽였다.
첫째, 예수는 자기를 구세주라고 민중을 미혹하여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하는(惑世誣民하는) 자이다.
둘째, 예수는 자기가 왕이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에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고 백성들을 선동하고 그들이 로마를 거슬러 민란을 일으키도록 함으로써 현 정부를 밀어내고자 하는 자이다.
이 두 가지 죄목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로마 정부로 하여금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이도록 만들기 위해 내세운 정치적 죄목이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19:12)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눅23:1,2)
셋째,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이라고 칭함(요10:33,19:7)으로써 하나님께 큰 불경을 저지른 자이다.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다 가로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저희가 가로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눅22:69-71)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요19:7,15)
이 세 번째 죄목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이도록 만들기 위해 내세운 종교적 죄목이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 내세운 가장 큰 죄목이 바로 이 신성모독죄(神聖冒瀆罪)이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라는 말로 이해되었다)이라고 칭하는 것(요10:33,19:7)은 곧 자기를 그릇되게 높이는 교만 행위이며 하나님을 낮추어 모독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스라엘에서)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이 크게 잘못된 일인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면 사람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이 문제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나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나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먼저,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을 향해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부르듯이 ‘내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호11:1) 이는 곧 하나님이 구약 시대에도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을 일반 세상 피조물이나 종처럼 대하시지 않고 그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친아들로 여기셨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그 마음과 행위를 본받아 거룩하게 살 것을 요구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곧 하나님의 아들(種子)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거기에 부응하여 살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들 곧 하나님의 아들로 살도록 부름 받은 무리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자신을 마땅히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해야 했으며 범사에 하나님을 본받고 따르기를 아들이 아버지를 본받고 따르듯이 해야 했다.
이러한 진리는 구약성경의 많은 말씀들 속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유대인들 중에서도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망령된 일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세기 1장이 보여주는 진리는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아들(형상)로 지음 받은 거룩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부르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마땅히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일컫는 것은 단지 이름(호칭)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 삶의 문제이다. 그것은 곧 일생을 하나님과 같이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범사에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그 마음을 헤아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사람에게 당신의 호흡(영)을 불어넣으셨다. 그러나 인류는 타락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자리에 있지 않고 다른 길로 빠져버렸다. 이러한 때에 주님은 자기(인생)를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 하나님의 아들로 사신 분이다.
주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그가 가진 초월적 지위 곧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聖子, 獨生子)이라는 특별한 위치에서 말한 것이 아니고 단지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위치에서 말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얼마든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살았다. 이로써 주님은 사람의 진정한 지위를 회복하셨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유대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한 예수님을 그렇게 불경한 자로 몰아 극력 정죄하고 죽이기까지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겉으로 보면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람과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너무도 존귀한 분으로 여겨 높이고 있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즉 유대인들이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컫는 것을 극력 반대하며 그들 가운데서 제거하기까지 한 것은 그들이 결코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반대하는 솔직한 이유는 하나님을 본받는 삶,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마음으로야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육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사시고 나는 사람으로서 나대로 살고 싶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신 거룩한 분이니 그 분대로 거룩한 길을 가시고 나는 나대로 사람의 길(사실은 육체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죽인 것은 영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아들(롬8:14,15)로 살기 싫고 오직 육체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육체대로, 욕심대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는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나 생명으로 하나된 관계가 아니라 神과 人間의 관계 즉 보호자(수호신)와 피보호자의 관계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께 제물(신이 기뻐하는 것)을 드리고 하나님은 반대급부로 사람을 보호하며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적당히 거리를 두고 거래하는 관계로 제한하고 싶어한다. 마치 중국(宗主國)과 조선(從屬國)이 가졌던 관계처럼 win-win하는 관계로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신에게 바칠 것을 바치고 신은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제한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내 뜻과 내 인생이라는 것이 따로 없고 하나님의 뜻이 곧 내 뜻이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 내 인생이다’ 라고 말하는 한 사람의 등장은 큰 충격과 도전이 되었다. 하나님과 마음을 같이 하며 그로써 하나님을 능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한 사람이 등장했을 때 유대인들은 더 이상 그들의 거짓된 종교 세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그리스도께로 나오든지 아니면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136.사람의 권세 (19:10,11)
빌라도가 주님께 ‘나는 당신을 죽이고 살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라고 말하자 주님은 ‘위에서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나를 해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질 수 없다’고 응수하셨다. 이는 곧 사람의 모든 권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집행) 권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고 말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한 권세에는 선한(정당한) 권세와 악한(부당한) 권세가 다 포함된다. 다윗 왕처럼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헤아려 이루려던 좋은 권세든지 사울이나 빌라도나 네로 황제(로마서 13장의 배경이 되는 권세)처럼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권세든지 모든 권세는 다 (최소한) 하나님의 허락 하에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결국 합력(合力)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권세든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억지로 바로 잡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세상의 권세가 하나님의 권세(손) 아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일도, 어떤 권세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서 상관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며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고자 하는 뜻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유대인들의 거짓되고 황당한 고소로 인해 잡혀서 죽게 된 것에 대해 누구를 원망하거나 바로 잡으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다. 그는 그 일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줄 알았기 때문에 그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았으며 목숨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다. 그는 이 모든 일이 아버지의 뜻에 따른 일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빌라도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만일 사람의 권세를 하나님의 뜻을 집행하는 대리 권세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항상 권세와 싸워야 하며 사람과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부질없는 짓이며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과 싸우는 꼴이 된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롬8:31-35)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권세에 순종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권세를 무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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