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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그리스도 (2)

고린도전서 7:8-40

34.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결혼과 독신

사람이 결혼해야 하는 세 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 피차 돕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사실상 반쪽만 지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힘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의도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나머지 반쪽을 다른 사람이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신 후 그를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셨다. 그리고 그 둘은 즉시 결혼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이 홀로 거하지 않고 둘이 연합하여 하나로 거하는 것을 의도하셨다.
결혼은 사람 간의 연합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하나님과 사람 간의 연합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과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 혹은 남편과 아내처럼 서로 사랑하면서 그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도록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어쨌든 결혼은 사람이 홀로 거하면 안되도록 지음받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꼭 결혼을 하지는 않더라도 어차피 사람은 피차 돕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둘째, 성 범죄를 막기 위해서이다.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타락한 지금에 있어서도 성의식(性意識) 자체는 죄가 아니다. 식욕이 죄가 아닌 것처럼 성욕도 죄가 아니다. 강한 성욕도 죄가 아니다. 사람을 남녀로 짓고 결혼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 이전에 되어진 일이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1:15) 사람이 성을 더럽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타락하여 그것을 더럽힐 수밖에 없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과 성 자체는 깨끗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성이나 성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 안에서 적절히 사용할 수 없는 인간의 죄성, 즉 그러한 욕구를 조절할 수 없는 타락한 성질인 것이다. 피해야 할 것은 이성이나 결혼이 아니라 음행과 간음이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7:5하)
하나님이 결혼을 설정하실 때는 아직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결혼에 대해 말하고 있는 신약 시대에는 이미 죄가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제는 결혼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성적 충동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바울은 성의식을 죄로 규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결혼이 도리어 죄(음란죄)를 막을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기왕에 결혼한 부부는 상대방이 성적 범죄에 이르게 되도록 서로를 멀리함으로써 정욕의 충동으로 고민하도록 만들어서는 안된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7:5) 꼭 성적인 욕구뿐 아니라 부부가 아니면 서로 도울 수 없는 것들은 다 부부 각자가 상대방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돕지 않으면 안된다. 결혼한 사람들의 몸은 자기 것이 아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오늘날 많은 남편과 아내의 범죄들이 각기 그 배우자의 무관심과 멸시로 인해 일어나고 있다. 결혼한 남편이 마치 아내가 없는 자처럼 자유를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요즘 타락의 풍조 중 한 현상으로 결혼하여 아내를 둔 남자가 여자 애인, 여자 친구를 별도로 둔다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결혼한 남자는 여자 친구는커녕 남자 친구도 그 부인이 샘낼 만큼 즉 부부 관계 이상으로 자주 만나고 친밀하게 사귀며 많은 시간을 공유하는 식으로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왜? 그의 몸이 일정 부분은 자기 것이 아니라 아내의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내 역시 자기를 만족시켜줄 그런 별도의 배필(?)을 찾아서 나설 것이다. 이것은 곧 사탄의 뜻대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이라는 연합의 틀을 벗어나서 방종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의도이다. 그러므로 결혼한 사람들은 상대방이 범죄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서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셋째, 함께 은혜를 받기 위함이다.
남편과 아내에 대해 말하면서 베드로는 그 관계를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고 표현했다.(벧전3:7)  같은 믿음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돌아보고 믿음을 격려하면 혼자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가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적나라하게 서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결혼 생활은 (꼭 결혼을 통해서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죄와 허물과 연약함을 실제적으로 잘 드러내 줌으로써 서로가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이점이 있다.

그래서 약한 사람들 곧 결혼하지 않으면 그 성욕으로 인해 범죄할 가능성이 높고 그 외로움으로 인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좇으며 그런 것들에다 마음을 줌으로써 죄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결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7:6,7)
바울이 참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혼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그가 참으로 원하는 것은 결혼을 하거나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자기와 같이 오직 하나님을 잘 섬기며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완전한 생명의 축복을 깊이 누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결혼은 어차피 육신으로 하는 사람과의 연합이기 때문에 영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과는 같지 않을 뿐 아니라 같을 수도 없다. 그것은 임시적이며 불완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지 않으면 범죄하여 그나마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나마 가지고 있는 생명의 축복마저 잃어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에 결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솔직히 말해서 "음행의 연고로 각 사람은 결혼을 하라"는 말을 마치 영생의 복음 전하듯이 그렇게 크게 외칠 마음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권도(權道)일 뿐 명령도 아니고 그 권도라는 것도 초점은 음행하지 말라는 데 맞추어져 있지 결혼의 재미와 기쁨을 맛보라는 데 맞추어져 있지는 않은 것이다.  
바울의 현재 위치는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것으로 보인다. 그도 전에 결혼을 했으나 지금은 부인을 사별했는지 아예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인지 혹은 부인이 바울의 회심 이후 도망가버렸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는 혼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7:8)
왜 그냥 지내는 것이 좋은가?
결혼에도 유익이 있듯이 독신에도 유익이 있다. 독신의 유익은 무엇보다도 가족에 매이지 않고 온 신체적 힘을 다해서 주님의 일에 몰두할 수 있다는데 있다. 바울은 고전 7장에서 결혼한 사람들이 겪는 몇 가지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째는 생활의 속박이다.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는 구하지 말며..."(7:27) 일단 결혼하면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매인다. 그리고 매여야 한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결혼한 사람들은 육신의 고난을 당하게 된다. 매이는 것은 자연히 고난(힘든 생활)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7:28) 결혼한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는 것은 그 신체적인 고난의 측면으로 말하자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정욕으로 고통을 당하지만 않는다면) 주님을 섬기는 것보다 배나 힘들다.
셋째로, 결혼한 사람은 생활에 매일 뿐 아니라 세상 일을 염려하게 된다. 이것 역시 당연한 수순이다. 남편과 아내와 자녀에게 매이고 생활에 매이면 세상적 관심이 늘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세상 염려'가 늘 수밖에 없다.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7:32-34)
그러므로 결혼은 속박과 고난과 염려라는 짐을 지운다. 결혼한 사람들에게 이런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자기만 돌아볼 뿐 아니라 상대방도 돌아보아야 하고 자녀도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신으로 살면서 주님께만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기 마음을 스스로 통제하며 그 믿음이 흔들리지만 않는다면(물론 독신자도 홀로 신앙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며 교회 생활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부담 없이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독신에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유익이 많지만 모든 사람이 다 독신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 독신자로 남을 수 있는지 말해 주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은 사람이다. 어떤 이유로 성의식이 없게 된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것이 있으나 강한 충동이 없어서 조절할 만한 사람은 독신으로 지내도 좋다.
둘째, 마음에 확정한 사람이다.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7:36,37) 성적인 충동과 관계없이 누구든지 억지로 독신이 될 수는 없다. 독신으로 남을 수 있는 사람은 그 마음에 그것을 기뻐하여 주님께 자신의 삶을 결혼하지 않은 채로 드리겠다는 마음의 확정을 내린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강제로 즉 부모에 의해서나 혹은 제도로 인해 천주교 신부와 같이 억지 독신을 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셋째, 환경적인 문제가 없는 사람이다. 즉 부득이한 일(7:37)이 없는 사람이다. 결혼하라고 촉구하는 부모의 강한 압력에 매일 시달리는 사람(예컨대 5대 독자)이나 기타의 환경적 문제가 있는 사람은 독신을 유지하기 어렵다.

바울은 독신을 명령하지는 않지만 그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사실을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실제로 결혼하는 것보다 할 수만 있다면 결혼하지 않고 주님을 온전히 섬기는 것이 육신을 지닌 우리의 땅 위에서 형편으로 볼 때 좋은 점이 많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즉 육신을 지니고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이유로 인해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성도 생긴다. 그 때문에 많은 형제 자매들이 결혼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함으로써 범죄의 위험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매이게 되며, 육신에 더 많은 고난을 받으며, 생의 염려를 많이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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