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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한 자유


 고린도전서 7:8-40 (7:29-32上)

35.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우리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먹고 마시고 일하고 사람과 접촉하는 이 모든 것이 다 세상 생활이다. 세상은 어떤 곳인가? 98년 여름집회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때 생각한 것은 세상이란 단지 어떤 사람이나 물질이 있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이 그 배후에서 왕 노릇하고 있는 거대한 영적 조직이라는 사실이었다. 사탄은 그의 온 힘과 능력을 동원하여 세상을 번창케 하고 있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세상 안으로 끌어들여 자기의 지배를 받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 사탄은 그의 통치권이 일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는 그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말세가 되면 이러한 사탄의 노력이 증가되고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시험과 고난도 심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몸만 세상에 있을 뿐 그 신분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이므로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빨리 벗어나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즉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주님의 기도와 바울의 증거를 통해 알 수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어디까지나 세상에서 살면서 악한 자에게 빠지지 않는 것이며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생명)으로 악한 자를 대적하여 물리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17:15-17상)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고전5:9,10)

 

이처럼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있는 모든 죄인들과 관계를 단절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또한 그렇게 해서도 안되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삶을 살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과 섞이지 말고 세상에서 나오라고 말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6:14-18)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대해 취할 태도가 이중적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세상과 관계하고 또 일정한 범위 내에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과 접촉은 하되 어느 정도까지만 하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서 너무 멀어지게 되면 즉 세상을 아주 떠나버린다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선포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마귀의 나라는 계속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서지 못할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세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다면 즉 한계점을 초과한다면 우리는 사탄에게 매인 바 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가? 우리는 세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므로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다시 한 번 '세상과 접촉하는 것의 위험'에 대해 강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잘못될 때 생기는 위험은 매우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가령 여러분이 심한 통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의사가 일종의 마약인 몰핀을 처방해 주었다고 하자. 여러분이 이것을 받아들여서 몰핀을 맞으면 여러분은 일시적으로 생기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꾸 그것을 맞고 싶은 갈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치료는 되는데 한편으로 중독 위험에도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사에게 그런 처방을 받는다면 피치 못하여 그것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우리는 두렵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처방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단 한 번이 아니라 긴 시간 동안 계속 되어진다면 문제는 매우 심각한 것이다.

 

이것은 가정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겪을 수밖에 없는 실제 상황이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에 속해 있으므로 매일 세상과 접촉하고 있으며 따라서 세상과 접촉할 때마다 몰핀을 취하는 것과 같이 한편으로는 좋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좋은 사람, 가장 좋은 물건, 가장 좋은 세상 환경의 배후에도 역시 마귀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 그 물건, 그 환경 자체가 마귀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 배후에 마귀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에 접촉하는 순간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마귀가 우리를 그의 손안에 넣고자 시도한다는 것이다.

 

마약 중독에 걸리지 않고 그 위험한 약물을 써서 하는 치료를 과연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안전하게 견뎌낼 수 있을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서 이런 저런 직업에 종사하여 생계비를 벌며, 세상 것들을 사용하며, 세상 사람과 만나고 세상의 이런 저런 즐거움을 만끽하며 사는 동안 얼마나 안전하게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마귀의 꾀임에 빠지지 않고 견뎌낼 수 있을지 나는 정말 의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어떤 일이 세상 즉 마귀와 얼마만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모든 세상적인 것 배후에는 사탄의 세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사는 것 자체가 위험하며 별 생각없이 방심하여 살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이 세상의 본질을 안다면 우리는 세상에 있는 온갖 것들과 접촉하는 것이 불가피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것과 접촉해야 하고 세상과 접촉하는 동안에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눈을 계속 떼지 말아야 함을 알 것이다. 어느 순간에고 사탄은 우리를 덮칠 수 있으며 또 그로 인해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아편으로 치료를 받는 것이 한편으로는 병 치료의 수단이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약 자체가 다른 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의 권위 밑에서 우리가 당당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세상 것들이 우리가 조금만 부주의하면 우리의 실패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환경에 반드시 깊이 주의해야 한다. 오직 어리석은 자만이 환경에 부주의한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대할 때 한편으로는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사탄을 주시해야 하며 또 한편으로는 주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자녀를 기르며 장사하고 노동을 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때를 묻히지 않고 지날 수 있을까? 어떤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돕기 위해 우리에게 '결혼은 누구하고 해서 어떻게 지내고, 자녀는 몇을 낳아서 어떤 식으로 기르고, 직업은 어느 것을 택하여 어떻게 일하며, 돈은 얼마까지 어떻게 쓰고, 먹는 것과 입는 것은 어떻게 하고, 오락은 어느 것을 취하여 어느 정도로 하라'고 성경에 율법으로 기록해 놓으셨으면 참 간단하고 편할 텐데 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한다. 그렇게 되어 있다면 주님이 하라고 하신 분량과 방법만큼만 세상 일을 한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이고 그것을 초과한 사람은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금방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아무 것도 규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종종 어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율법과 규칙보다 더 확실한 도우미를 주셨다. 그것이 바로 당신 자신의 생명이다.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의 마음, 주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서 누리게 되었다. 우리는 세상에서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다른 아무 것에도 주의할 필요가 없고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오직 주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된다. 과거에 주님이 오시기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거룩한 생활을 도모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와 붙어있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할 때 그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알게 하시며 우리를 완전하게 이끄신다.
세상에 적그리스도가 일어난다는 것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기정 사실이다.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로써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요일2:18)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4:3)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세상에 살면서 마귀에게 속거나 사로잡히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을까? 요한이 일러준 답, 요한이 우리에게 일러준 대비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0,27) 이것은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바, 세상을 책망하고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던 진리의 영에 대한 시사(示唆)이다.(요16:8,13)

 

세상의 어떤 일에도 우리가 넘어가서는 안될 안전선, 한계선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땅에 그어진 선처럼 눈에 드러나게 표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분명하게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성령님을 철저하게 의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그 한계선을 넘어서려고 할 때 즉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며 우리로 멈추게 하신다.

 

성령님은 우리를 어떤 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시는가?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이 그것에 대해 말했다. 그는 성령께서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이끄시는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7:29-32상)

 

본문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차례로 언급되고 있지만 모든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니 곧 "때가 단축되었다" 또는 "때가 제한되었다"는 것이다. 이 세상 삶은 무한정 계속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가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5,16) 우리는 특수한 긴장(緊張)의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이런 날에 우리를 인도하는 원리는 "....를 가진 자들은 가지지 않은 자 같이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을 들을 때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울이 여기서는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라"고 말하고서는 다른 곳에서는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히13:4)라고 말할 뿐 아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5)고 말한다는 것이다. 전혀 아내가 없는 자 같이 살면서 또 어떻게 아내를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가?

 

그러나 이런 역설적인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것은 전혀 모순된 것이 아니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니고서는 결코 살 수 없는 삶이기도 하다.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살고 그러면서도 있는 그것을 최대로 활용하는 이 역설적인 삶은 세상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좇기 어려운 두 마리의 토끼와 같은 것이다. 이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무엇인가? 바로 "없는 것 같이"라는 말이다. 즉 문제의 답은 '없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 같이'라는 말 속에 숨어 있다. 다시 말해서 있는 것을 활용하면서도 그것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살려면 '있는 그것을 없는 것 같이 생각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내적 자유가 있다. 모든 것의 모든 것이요 가치 중의 최고 가치인 하나님이 그에게 있음으로 인해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상대적인 가치에 지나지 않게 되고 따라서 그것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자유를 누리는 참 그리스도인은 에베소서 5장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아내를 가지고 있으며 그를 즐거워하며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내에게 매이지 않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7장은 '어떤 것을 가지거나 가지지 말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무엇을 가지든 안 가지든 그것에 마음이 매이지 않고 자유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아내를 가지고 있고 재산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의 절대적인 가치 곧 그것들이 세상에서 본래 지니고 있던 가치를 상실해 버렸기 때문에 그것들을 소유하더라도 그것에 매이지 않고 마치 그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처럼 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내 있는 사람이 아내 없는 사람 곧 결혼 안한 총각처럼 다른 여자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지나치게 집착하여 아내의 사랑과 관심 없이는 못살게 되거나 혹은 아내를 닦달하고 괴롭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마음의 여유와 자유를 누릴 때 비로소 할 수 있다. 세상에서 남자 청년이 그의 애인을 사랑하는 것과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것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남자 청년이 여자 애인을 사랑하는 데는 조금도 여유가 없다. 여자가 자기만을 생각하고 사랑해 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와 결혼해 주지 않는다고 여자 집에 찾아가서 그 애인과 가족을 죽여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사랑한 것은 여자가 아니라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자신의 정욕과 야망이었다.

 

이보다는 조금 낫지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에도 자유와 여유가 비교적 적다. 이것은 철저히 give and take식이다. 내가 해 준 만큼 아내로부터 받고 싶은 것이다. 결혼 전에는 아내가 원한다면 이것저것을 다 허용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편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지만 막상 결혼을 하고 보면 헌신과 희생이 아니라 이용하고 부리고자 하는 마음이 더 생긴다. 그래서 서로 왜 잘 해주지 않느냐고 다투다가 마침내 타협하여 [서로 사랑하고], [서로 봉사하자]는 원칙을 세워서 철저히 주고 받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가 없는 것처럼 내가 설거지하고 아내가 없는 것처럼 아내를 놀러 보내주고 친구 만나게 해 주고 이것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딸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 자식에 대한 부모의 태도는 비교적 다르다. 여기에는 집착이 비교적 적고 댓가를 바라는 마음이 비교적 적은 것이다. 그래서 딸이 아무리 귀엽고 예쁘더라도 시집을 안 보내고 끝까지 데리고 있으려는 사람은 없고 딸이 아무리 그를 귀여워하는 아버지 마음을 몰라줘도 그것 때문에 그를 미워하거나 때리거나 죽이는 아버지는 없는 것이다. 아내는 내 마음을 몰라주면 밉지만 딸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마음에 어차피 딸은 내 소유가 아니고 내가 일정한 기간동안 키워서 자기 행복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이다 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이고 여유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내도 그렇고 사랑하는 애인도 그렇다. 그들 모두를 다 없는 것처럼 여유 있게 사랑할 수 있다.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들이 나를 사랑하고 나의 즐거움이 되어줄 때는 그것을 기쁘게 누리지만 어느 때에 그들이 나를 떠나기를 원하고 자기를 놓아주기를 원하면 놓아줄 수도 있는 것이다. 왜? 어떻게?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이미 가장 사랑스런 신부와 애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며 절대적으로 그들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만족과 기쁨이 되고 있으면 우리에게는 다른 것들 곧 세상의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나 지위가 아무리 좋고 사랑스럽다 할지라도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세상 자연인은 언제나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 극단에 처하여 산다. 그 양 극단이란 세상 것을 취하여 자기 소유로 만들고 그것에 전적으로 예속되어 사는 것이 그 하나이고, 반대로 경건하다고 하는 어떤 사람들처럼 자기 소유를 다 버리고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 사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의 태도는 이런 것이 아니다. 우리의 방법은 어떤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성령께 의탁함으로써 무엇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내를 버릴 필요도 없고 아내에 대한 애정을 버릴 필요도 없다. 오직 남편과 아내의 마음이 주님께 가 있음으로써 남편과 아내는 서로 애정의 오만한 통제에 눌려서 애정의 종이 되지 않고 자유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땅에 사는 동안 우리 생애에서 눈물과 그리움, 아쉬움이 완전히 사라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생이 더 이상 그런 일에 통제를 받지는 않는다. 또 기쁨과 그 기쁨을 만들어 낸 원인이 우리에게 계속 남아 있지만 그 기쁨이나 그것의 원인이 된 일에 우리가 헛되이 마음을 주고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내적인 억제가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전처럼 사고 파는 일을 계속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내부의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런 일에 매여서 꼼짝달싹 못하는 자리에서는 풀려나올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친 듯이 일을 하며 그저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미친 듯이 장사를 한다. 남녀들은 결혼을 위해 그저 사귀는 것이 아니라 온갖 육체적 탐닉을 다 도모하고 장사꾼들은 그저 좋은 물건을 필요한 사람에게 정당한 가격에 파는 것이 아니라 돈 버는 일에 혈안이 되어 사람을 좇아 다니며 기어이 물건을 사도록 괴롭히고 사기를 치며 부당 이득과 폭리를 취하고 떼돈을 벌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매인 것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먹고 마셔야 하며 또 그것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기르며 때로 육신의 여러 즐거움도 취하면서 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삶의 내용일지라도 우리의 존재 목적, 삶의 목적은 아니다. 우리 인생은 그런 것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좁게는 그리스도인, 넓게는 모든 피조물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지음 받았으며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이 말한 바와 같이 '예수의 증거를 유지하는' 자이다.(계1:9, 12:17)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나는 하나님을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우리에 대해 포기하고 '나는 저 사람에게 두 손 들었다'고 말할 때 비로소 되는 것이다. 사탄이 우리를 사로잡아 죄와 세상과 정욕의 종이 되게 만든 자리에서는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다운 거룩한 삶과 찬양과 간증을 유지하기 원하신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영광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문제이며 하나님이 이 땅의 주인으로 찬양 받느냐 아니면 사탄이 계속 이 땅에서 주인 노릇을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이 세상에 내려보내신 아들들은 세상에 살아도 세상 공기를 마시고 세상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잠수부가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활동을 하는 것과 같다. 그는 바다 깊이 들어갈지라도 특수한 옷과 산소통으로 자기를 바다의 압력과 물로부터 보호한 상태에서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대로 들어간다면 거기에 잠시도 머무르기 어렵다. 잠수부는 바다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거기를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는 반드시 그가 처해 있는 위험한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 가운데서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맨 몸으로 심해에 들어가면 곧 죽고 말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세상에 사는 동안 반드시 성령님의 역사를 필요로 한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안내자가 되시며 능력이 되시는 동안에는 우리는 세상 어느 곳으로 가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무엇을 소유하든지 안하든지 문제가 없다. 문제는 마음이요 생명이지 행위가 아니다. 누구와 접촉하면 문제가 있고 접촉을 안하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설령 접촉을 안하면 문제가 없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세상을 떠나지 않는 한 세상과 무슨 재주로 접촉을 안하고 살겠는가?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야 하며 따라서 세상 것들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장사하고 농사짓고 결혼하고 자식을 기르며 기뻐하고 슬퍼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 다 쓰지는 못한다. 이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쓰면서(하면서) 이것들의 본질이 무엇이며 한계가 무엇이며 그 속에 내포되어 어떤 위험이 내포되어 있는지를 반드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를 조용히 권고하시고 이끄실 때 조용히 그리고 주의 깊게 따라가야 한다.

 

주님은 세상에서 태어나셨지만 사실은 위로부터 오신 분이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세상에서 안전하셨다. 주님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고 추종되었으나 거기에 마음을 주거나 의탁하지 않았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전 받고 배신당했으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 임금이 오겠으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14:30,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마찬가지로 우리도 세상에서 나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이며 위로부터 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며 세상에서 그리스도 외의 어떤 일로 다툴 필요가 없고 집착할 것도 마음 쓸 것도 없다. 주님은 오직 세상에서 아버지께 받은 그 일을 하다가 세상과 관계없이 조용히 가셨다. 그는 세상에 속한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직 아버지의 일만 추구했다. 주님에게 있어서 세상은 남의 세계였다. 그에게는 세상에 대해 분명한 구분선이 있었다. 그러나 그 구분선은 주님의 발 앞 땅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 그려져 있었다. 이 선을 따라 주님은 세상에 속한 그 어떤 것도 헛되이 취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세상 또한 주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빼앗지 못했다. 물론 세상은 주님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때 마귀는 주님으로부터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목숨을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의 일을 위해) 스스로 버리셨지 세상으로부터 빼앗기지는 않았다.(요10:18) 세상은 주님으로부터 육신의 껍데기 목숨만 빼앗았지 하나님과 관계된 주님의 영원한 소유물은 아무 것도 빼앗지 못했다.

 

우리의 삶에서도 위로부터 온 것(영생에 관계된 것)은 다 안전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키고 계시기 때문에 결코 세상(마귀)이 빼앗아가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근심조차 않으신다. 그것은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하늘의 생명 곧 영적 생명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영적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무능하거나 저질이거나 실패하는 일이 없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4:4)
 

우리는 이 성령의 인도를 좇아 범사에 행해야 한다. 결혼한 사람이나 하지 않은 사람이나 다 성령 안에서 자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권면들은 다 이러한 성령의 인도를 권면의 말로 표현한 것이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7:10-14)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7:15-17)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7:18-19)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7:20-24)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7:25-28)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7:29-31)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紛擾)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7: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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