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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단축하여짐 / 고전7:29-31

2010.05.01 11:40

이상봉 조회 수:6381

때가 단축하여짐 / 고전7:29-31

 

36.종말을 대비하는 삶

바울이 고린도교회 또는 오늘 우리에게 ‘음행을 피하기 위해 결혼을 하라’고 권한 것이나 ‘그런 문제가 없다면 결혼을 하지 않는 것도 좋다’고 말한 것, 나아가서 ‘결혼을 한 사람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지내라’고 말한 것은 다 신약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특수한 형편 때문이다. 이 특수한 형편이란 바로 종말을 일컫는다. 종말 또는 바울의 표현대로 ‘때가 단축된’ 시기를 사는 사람의 삶의 자세는 그렇지 않은 때를 사는 사람의 삶의 자세와 달라야 한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분쟁과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2:11-14)

우리는 먼저 종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것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생활, 이 세상 삶은 머지 않아 끝이 난다.


세상에 종말이 확실히 오는 이유

첫째, 하나님이 그것을 정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은 그 지음 받은 피조물인 천사(마귀)와 사람(아담)이 타락하는 순간 첫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끝장내기로 작정하셨다. 세상이 지금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지만 이미 세상 안에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왔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후 세상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었으며 그 나라의 건설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마13장에 나오는 주님의 비유의 말씀은 지금 세상의 상황이 어떠하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 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13:24-30) 이 말씀의 의미가 그 뒤에 설명되어 있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마13:36-40) 주님은 이 세상의 끝이 분명히 있다고 말씀하신다.

세상 끝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3:41-43) 하나님이 정하신 이러한 뜻이 확실히 실현된다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그것이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사실’로 계시된 데서 볼 수 있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20:10-21:2)

이것은 곧 마귀와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다 지옥으로 떨어져 멸망당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접을 받아 새 세계에서 영광스런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당장 세상을 멸하시지 않고 그 삶을 연장시키는 유일한 이유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될 사람들 곧 하나님의 아들들을 부르시기 위해서이다. 오직 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천년을 하루 같이 참고 계신다. 그러나 참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까지이며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되는 그 날까지 뿐이다.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이다.

둘째, 만일 인류와 세상이 완전한 모습으로 영원히 존재하려면 현재의 타락하고 불완전한 것들이 끝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당위성』

구약은 본질상 영원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 나라도 율법도 성전도 제사제도도 선지자도 영원히 계속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참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의 모형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 참 것이 오기 전까지는 그것들이 존재할 수 있었지만 영원한 것이 왔을 때 그것들은 사라져야 했다. 자연계의 예를 들어보자. 애벌레와 번데기는 결코 영원히 계속 될 수 없다. 나비가 나오기까지 그것이 존재할 뿐이다. 이와 같이 타락하고 왜곡된 인류와 만물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 곧 재창조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임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이 완성된 후에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십자가가 구원의 길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지 않고서는 새 사람이 탄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신(자아)의 죽음 없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옛 인류와 옛 세상의 폐기 처분 없이 새롭고 완전한 인류의 삶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세상 만물의 성질과 경향을 볼 때 그것이 예상되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만물에 내재된 종말적 성질』

세상에 대한 예언, 종말에 대한 예언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 의해 나온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과거와 현재 상태에 근거하여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다. 이것들은 현재 세상에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는 어떤 징조나 근거도 없는데 단지 하나님께서 그러한 종말이나 미래를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갑자기 그런 예언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예언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예언들이 사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을 근거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엉뚱한 것을 갑자기 말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세상의 성질을 보면 주의 깊게 본다면 예측할 수 있는 당연한 것을 말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지금은 몸이 건강하지만 편식이 심하거나 몸을 무리하게 쓰거나 전혀 운동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그가 머지 않아 건강을 잃을 수 있음을 내다볼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의 미래에 대해서도 그런 예견을 할 수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 말한 것을 보면 그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모세가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의 불행한 미래에 대해 말한 것은 그들이 그때까지 광야에서 보인 행동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지금 세상의 상황은 어떤가?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하나도 없다. 만물이 다 일정한 수명을 지니고 있고 그 후에는 죽든지 사라지든지 하는 것을 우리는 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셨고 사람의 몸을 저주하셨기 때문이며 곧 인간 삶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범죄한 후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므로 이마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살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고통 후에 죽음』이 인간 삶의 정해진 순서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인간의 끝없는 욕심은 이미 제한된 삶을 더 단축시킨다. 유한한 세상은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삶의 확장을 결코 뒷받침하지 못한다. 인간 삶의 무한한 확장을 위해서는 무한한 에너지 곧 무제한적인 물질과 환경이 영원히 공급되어야 하지만 세상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더 나아가서 설사 물질의 고갈이나 세상(땅)의 제한이 없다 할지라도 인간의 악함과 죄악된 성질은 인류가 탐욕으로 말미암은 물질의 고갈과 기타 모순으로 멸망하기도 전에도 전쟁이나 기타의 방법으로 모두를 멸망에 이르도록 할 것이 틀림없다. 역사상에 되풀이된 가장 무서운 고통과 비극, 인간 삶의 단절과 후퇴는 대부분 어떤 환경 문제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악함이 빚어낸 것, 곧 전쟁과 기타 인간 죄악의 산물들인 것이다.

어저께도 수학여행 갔다 오던 부산 학생 100여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비단 전쟁이 아니라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사고로 죽거나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런 대규모 참사는 앞으로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끊이지 않고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인재(人災)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야말로 인간의 악함이 빚어낸 결과들이며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이처럼 끝없는 탐욕과 악함의 결과로 인해 인간 삶은 한쪽에서 흥하면 그만큼 다른 쪽에서는 이런 저런 모양으로 계속 도태되고 망하고 있다.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인류는 결국 어느 순간에 그 종말을 맞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세상 사람들도 거의 대부분 종말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다만 그 생각이 매우 막연하며 또한 자기 때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종말이라는 것이 필연적이고 자연 현상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류가 그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면 막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면 사람들은 종말적 파국을 막고 미래를 계속 현재처럼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새로운 땅을 개간하고 우주를 개척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식량을 증산하고, 곧 고갈될 석유 등의 에너지를 대체할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고, 환경 오염을 줄이고 자연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제도를 바꾸고 법을 정비하고 교육을 강화하여 사람들이 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문명화를 계속하며, 전쟁을 막기 위해 군비를 축소하고 평화 협상을 벌이며 국가 내부의 통일과 국가 간의 연합과 제휴를 도모하는 일 등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의 이 수많은 문제가 어디서 왔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다. 모든 문제는 다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인간 외적 환경 즉 자연 환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들이다. 물론 세상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래서 교육과 기타의 방법으로 인간 변화를 시도하고 인간의 죄악이 표면화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인간 변화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인간이 그토록 희망 없는 죄인이며 그 결과는 서로 물고 먹다가 다 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세상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철저히 인식하고 있지 못하며 따라서 철저히 다루지도 않고 있다.

사도 바울은 노예 제도의 사악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제도의 폐지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도리어 그리스도인 종들에게 상전에게 순종하라고 말했다. 그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고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라도 시도할 사람이었지만 당시 사회의 여러 모순들에 대해 개혁하려고 하지 않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전했다. 이것은 그가 세상의 문제의 본질과 핵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사람의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오직 사람을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고 교회를 세워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온전히 받게 만드는 데 그의 온 힘을 쏟았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인간이 진정으로 변화되고 또 그렇게 될 때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세상의 모든 모순과 악이 사라지고 대신 아름답고 영광스런 참 사회가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바울은 십자가와 그리스도 없이는 인간의 변화가 없고 또한 인간의 변화 없이는 세상은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종말을 대비하는 길

우리의 관심사는 단지 이제 종말을 믿고 그 위기에 민감하게 느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종말을 대비하는 것에 있다. 우리의 관심은 오실 그리스도를 잘 기다리는 것이다. 오실 그리스도를 가장 잘 기다리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우리가 ‘우리 안에 생명으로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살지 않는 사람은 나중에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지 못할 것이다.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아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 같이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 동행 동거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매매하는 자 곧 세상 일을 하는 사람이 그 일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까닭에 그 일을 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물건을 쓰는 사람이 다 쓰지 못할 사람처럼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물건을 쓰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모든 것이 다 그 배후에서 도사리고 있는 마귀로 말미암아 단순히 사람의 필요와 소용을 채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옭아매고 지배한다.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만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매이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일을 하며 아내와 살며 물건을 쓸 때, 그리스도와 함께 일을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아내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물건을 쓴다면 어느 날 갑자기 이 모든 것이 중단되고 끝나게 되는 때가 오더라도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반갑게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일을 하고 아내와 살며 물건을 쓸 때, 그 일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며 그 일을 영원히 할 수 없음을 알고 일을 하며, 아내와 영원히 살지 못함을 알고 살며, 물건을 다 쓰지 못할 줄 알고 쓴다면, 이 모든 것이 중단되고 끝나는 날이 오더라도 우리는 당황하지 않게 될 것이며 슬퍼하지 않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주님의 오심을 대비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현재적으로 누림으로써만 가능하다. 날마다 믿음으로 살며, 날마다 성령으로 살며,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삶을 더 깊이 체험해 나감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자연스럽게 주님을 알아보며 기쁘게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무도 현재의 모습대로, 현재의 육신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주님의 영접을 받게 될 자는 없다. 그 날에 우리는 근본적으로 변화될 것이다. 지금 이미 영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것처럼 그 날 우리의 육신을 포함한 전 인격이 처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변화된 모습처럼 변화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부활 생명을 현재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현재적으로 누리고 있는 자들에게 한정되는 일이다.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기쁨 중에 영접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종말이 올 때 영광의 주님을 반가이 맞이하여 죄로 점철되고 고통스럽고 불완전하고 유한한 옛 삶을 끝내고 영원하고 완전한 새 삶을 살게 될 사람은 오직 지금 하나님의 약속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뿐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무지하고 완악한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고 그를 믿게 만드셨다. 이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우리 중에는 일을 원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결혼하여 아내와 함께 살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물건을 그 원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잠시 아쉽고 잠시 서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세상 종말이 이를 때 구원의 주요 영원한 새 세계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와 함께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다 그를 원하게 될 것이다. 다 그와 함께 살고 싶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때가 늦다.

시험에 떨어졌을 때 모든 사람이 ‘이럴 줄 알았으면 놀지 말고 미리 열심히 공부하는 건데’ 하는 아쉬움을 가지며, 물건을 훔치려다가 훔쳐보지도 못하고 경찰에 잡혀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거나 평생 복권을 사거나 도박을 하다가 재산을 다 날리게 되었을 때 모든 사람이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땀 흘려 일 해서 돈을 벌 건데’ 하는 아쉬움을 가진다. 사실 알고 보면 그것은 알기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오직 소수만 그것을 실행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왜 실패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다가올 미래를 전혀 내다보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에 확실히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분명하게’ 내다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래 또는 결과에 대해 확실히 주의하고 분명히 내다보았다면 누구나 자기 힘 닫는 데까지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며 또한 누구나 어리석은 일, 범죄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아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알고 확실히 느끼는 것이 필요하며 어렴풋이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내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단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는 지식으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킴으로써 그 지식에 맞게 실제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세상의 종말이나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믿고 그 아는 지식에 따라 다가올 종말을 확실하게 대비하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될까? 모르긴 해도 매우 적다고 생각된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분쟁과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2:11-14)

왜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하는가?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것은 육신의 일 곧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일 등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생의 낙이요 소망인 것처럼 헛되이 의미를 부여하며 과도히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과도히 추구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추구해도 사실 짐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몇 주에 걸쳐 생각해 온 바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마24:19) 무엇이든지 평상시에는 좋은 것이라도 환난 날에 무거운 짐이 될 수 있는 것은 다 (적어도 환난 날에는) 좋지 않은 것이다. 아이 밴 것은 축복이며 젖 먹이는 일도 복된 것이다. 그러나 난리가 나서 도망갈 때는 그것은 짐이 되는 것이며 마침내 그로 하여금 도망을 가지 못하게 붙들어 매어 죽게 만드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주어진 짐들이 있다. 이것은 사실 벗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벗을 수 있는 것들은 벗어버리자. 하물며 이미 주어진 짐도 무거운데 새로운 짐을 만든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취하여 새로운 짐으로 만들지는 말자. 세상에는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소망이 없다. 많은 것들이 없으면 더 좋은 것들이다.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이 있으면 약간 유익이 있지만 없어도 별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한 여자가 처음 남편에게 만족을 얻지 못하므로 다른 남자를 찾게 되고 거기에도 만족이 없으므로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가다 보니 남편을 무려 6번이나 바꾸게 되는 어리석은 삶은 비단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인류의 많은 바쁜 행동들이 다 이런 원리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제쳐놓고 세상의 어떤 사람과 물질과 일에 궁극적인 만족과 기쁨이 있는 줄 알고 이리 저리 좇아 다니는 일은 이제 그만 하자. 때가 급한 데 왜 생명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무거운 짐을 스스로 취하겠는가? 오직 주님만 힘써 따라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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