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복음에 참여함 / 고전9:19-27

2010.05.01 11:43

이상봉 조회 수:8474

복음에 참여함 / 고전9:19-27
 


38.생명을 향한 열망에서 나온 헌신

지난 주에는 바울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를 낮추며 헌신한 내용 중 자기의 자유와 권리를 희생하고 양보한 것에 대해 생각했는데 오늘은 그 중에서 바울이 여러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여러 모양으로 낮춘 것에 대해 생각하고 나아가서 왜 바울이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던가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자 한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되며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되며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처럼 되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며 이런 저런 모양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모양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사실상 자기를 버릴 수 있는 데까지 다 버렸다.

그는 진리의 사도로서 누구보다 진리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었으며 그의 모든 생각과 말은 모든 세상의 사상과 주장을 월등히 능가하며 그것을 다 막아버릴 수 있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다 개성과 주관이 있으며 생각과 사상이 있으며 습관과 취미가 있고 특별한 경향성이 있다. 이것들은 사실상 그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로서 그 사람과 결코 쉽게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모든 것들 곧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생명만 빼고 나머지는 바로 그 한 가지를 전하기 위해 다 버렸다. 그에게도 주관이 있고 고집이 있었고 나아가서 그러한 그의 주관과 고집은 매우 설득력 있고 가치 있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림으로 구원을 얻는 이 본질적인 진리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다 양보하고 다 버린 것이다.  

바울이 그렇게 한 까닭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사람을 얻기 위해서였다. 김 아무개는 김 아무개지 바울이 아니기 때문에 그 김 아무개를 얻으려면 바울은 바울을 고수해서는 안되고 김 아무개의 자리로 들어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얻으려면 이런 사람이 되어야만 하고 저런 사람을 얻으려면 저런 사람이 되어야만 했던 것은 먼저 그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고는 즉 자기 자리에 앉아서는 그 사람을 얻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왜 진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상대방이 양보하고 낮아지지 않고 꼭 바울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상대방은 죽어 있거나 여유가 거의 없는데 비해 바울은 살아 있고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아무 것도 모르는 데 비해 바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무엇을 해도 왜 하는지를 알고 하는 것이고 무엇을 안해도 왜 안하는지를 알고 안하기 때문에 바울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이렇게 저렇게 자기를 낮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인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후4:5,6)  이 말씀은 세 가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첫째는 바울에게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비취었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그러한 빛이 비취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 진리를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며, 셋째는 그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인데도 실제로 종이 되어 섬기는 대상은 그가 접촉한 피(被)전도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자기에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체험이 있었다. 그 빛이 워낙 크고 소중했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진리의 세계가 워낙 사람들의 세계와 간격이 컸기 때문에 그것을 전하기 위해 사람들의 위치로 낮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진리를 전하는 일이 워낙 힘들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의 자유와 권리까지 대폭 희생하며 혹 복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사탄의 방해에 걸리지 않을까 조심하고 또 조심했으며 배려하고 또 배려했던 것이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 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행16:1-3)

전도 여행 중 루스드라에 이르렀을 때 바울은 디모데라는 헬라계 유대인을 만났는데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동역자로 삼아 전도 여행에 데리고 떠나려고 했는데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할례 받지 않은 디모데를 중용하는 것을 보고 오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받게 했다. 이것은 바울이나 디모데 입장에서는 전혀 필요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호의적인 유대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배려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다.

이는 곧 바울이 어떤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걸림돌을 놓아 오해를 사거나 접촉점을 상실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참으로 전도자였다. 참 전도자는 어떻게 하든 사람을 얻고 살리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 양보할 수 있는 것, 낮출 수 있는 것, 희생할 수 있는 것은 다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루스드라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완고한 마음으로 배척하며 할례만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주장했다면 바울은 어떻게 했을까?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행15:1,2)  바울은 진리에 대해서는 전혀 양보하지 않았다.

바울이 안디옥에서 전도할 때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와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주장했을 때 바울은 결코 그것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만일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는 거짓된 유대인들의 반대와 훼방에 직면했다면 그는 그들이 주장하는 할례를 단호히 거부하는 것은 물론 그 사람들 자체를 배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의 가능성이 적은 자들이요 도리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이므로 배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드러나기 전까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호의적이고 생명을 갈망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으로 느꼈을 때 바울은 주저하지 않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거기에 장애가 될 수 있는 모든 걸림돌을 치웠다. 거기에는 자기의 일부 권리와 자유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성령님은 그를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성령님은 그로 하여금 매우 지혜롭고 신중하게 사람들에게 다가가도록 역사하신 것 같다. 그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깊이 배려했으며 인간의 입장, 하나님께 대해 죽어 있고 무지하고 마음이 완악하고 깨달음이 더딘 죄인의 입장에서 죄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이 점은 바울뿐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바울 일행과 유대에서 온 형제들 사이에 할례 문제로 다툼이 생겼을 때 안디옥교회의 형제들은 바울과 바나바 일행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어 의논케 하기로 결정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행15:5-29)

바울과 사도들은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 우상의 제물과 음행, 피와 목매어 죽인 것만 피하고 나머지는 다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는 사람을 한편으로 자유롭게 하고 한편으로 구속하는 것이 있어서 그 생명만 있다면 사실상 아무 말 안해도 다 알아서 행동하게 된다. 그런데 왜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규정을 제시했을까? 사실 이런 것들조차 사도들로서는 꼭 제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대교의 전통과 경건 개념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변화시키고 한꺼번에 자유케 한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순리적이고 순차적인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자신이 갑자기 전과 100%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이 오늘의 그 사람으로 되기까지는 수십년간의 역사와 배경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내가 지금 생각하고 소유하고 있는 세계로 들어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는 참 진리와 주장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를 위해 많은 희생과 수고를 감내하지 않으면 안된다. 주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떤 희생과 수고를 했는지를 기억하자.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벧전3:1,2)

만일 생명을 구할 필요와 열망이 없다면 믿는 아내는 믿지 않는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자는 하나님과 그 진리에만 순종하면 되지 진리를 거스려 행하는 세상 죄인들의 말을 다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믿지 않는 남편을 대하는 아내의 태도에 대해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말하고 있다. 왜? 그렇게 함으로써 남편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여유를 가진 자가 생명 없는 사람을 섬길 수 있으며 또한 생명의 여유를 가진 자가 그렇게 섬김으로써 생명 없는 자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18:1-4)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마18:5-7)

우리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아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의 생명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지 우리의 사상이 중요하지 않다. 어떤 신학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으며 예수님과 바울과 그 어느 신실한 그리스도인도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런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왜 사람을 사랑하고 그 생명을 아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우리의 권리와 자유와 개성과 자아까지 희생하고 양보하고 낮추면서 남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살리기 위해 애써야 하는가? 바울에게 물어보면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9:23-27)

바울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그토록 사랑하고 배려하고 아낀 것은 자기도 복음을 누려야 할 대상 곧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바울이 천사였거나 구원이 필요치 않은 존재였다면 그토록 사람을 사랑하고 배려하며 그 생명을 아끼려고 애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단지 복음을 전파할 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도 복음에 참여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에 복음 증거와 생명 구원에 그렇게 주력했던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남에게 하는 것이 곧 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남의 생명을 아끼는 것이 곧 내 생명을 아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생명과 구원, 복음을 누리는 문제에 있어서 결코 객관적일 수가 없었다. 자기도 죄인이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 곧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오래 참으심과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그리고 죽을 때까지 계속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않으면 이 은혜를 유지하지 못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실제로 복음을 깨닫고 제대로 누리도록까지 인내하며 수고하며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생명에 관심이 있고 참으로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결코 형식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어떤 걸림돌이 있더라도 그것에 개의치 않고 살 길을 추구할 것이다. 자기가 생명을 얻는 데 있어서 이렇게 절박하고 실제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함에 있어서도 절박하고 실제적일 수밖에 없다.

즉 복음을 전할 때 그가 전하는 복음을 상대가 이런 저런 이유로 잘 안 받아들인다고 해서 상대의 그런 행동을 하나 하나 따지고 시비를 가리지 않고 도리어 모든 형식적이고 지엽적인 문제들은 다 자기가 수용하고 어떻게 하든 상대가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정말 살릴 생각이 있으면 그에게 어떤 허물과 어떤 절차상의 문제와 어떤 아니꼬운 것이 있더라도 그것에 개의치 않고 그의 마음을 어떻게든 열어서 그를 살리고자 할 것이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 모든 것(희생과 양보와 스스로 구속 받음)을 행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