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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이김 / 고전10:12-13

2010.05.01 11:45

이상봉 조회 수:7130

시험을 이김 / 고전10:12-13

 
 

40.마귀의 시험을 경계함 (2)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고린도교회의 형제들이 같은 시험을 만났을 때 이스라엘처럼 실패하지 말고 승리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했다. 오늘은 시험의 성질과 이기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자.


1.시험이란?

시험이란 마귀가 하나님의 사람을 넘어지게 하려는 목적으로 흔드는 것을 말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못하도록(순종하지 못하도록) 흔드는 것은 마귀가 처음부터 행한 일이다.  

심지어 주님의 제자조차 마귀의 계속적인 시험 가운데 놓여 있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22:31,32) 마귀는 하나님의 사람을 마치 농부가 밀을 키에 얹어놓고 까부르듯이 흔든다. 그리고 이것은 일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까지 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기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마귀는 구약 시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때에나 주님과 베드로, 바울이 살던 그 시대에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나 변함 없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시험한다. 그리고 마귀가 변함 없는 것처럼 사람 역시 변함 없이 연약하여 여전히 마귀의 시험에 들기 쉬운 상태에 놓여 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특별히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기를 당부하셨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26:41)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에는 마귀의 총체적 시험이 있을 것이며 그 대상은 분명히 신자들임을 예고하셨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막13:22) 주님의 일깨우심을 받던 베드로도 나중에 형제들을 향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경고했다.(벧전5:8)  


2.시험의 내용

시험의 내용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외적 환경적 시험이고 둘째는 내적 시험 곧 마음의 흔들림이다.

첫째 시험은 우리가 흔히 환난 또는 역경이라고 부르는 어려운 환경이 닥치는 것이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4:8,9)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고전4:10,11)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것은 물론 자연스런 일이기도 하지만 마귀가 개입하여 일으킨 것이기도 하다. 마귀는 특히 전도자들을 비롯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려고 세상 죄인들을 동원하여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일으켜 괴롭힌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14)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5:8,9)

시험은 강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다. 마귀는 처음 믿기 시작한 신자들도 강력하게 시험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 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마13:18-22)

그러므로 첫째 시험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만을 따라가자면 핍박과 멸시를 받거나 가난해지거나 비천해지거나 외로워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며 자연스런 일이다.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환영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마귀의 직접적인 시험으로 말미암은 고난이 없다 하더라도 세상에서 사는 동안 신자는 이런 저런 고난을 당하게 된다. 그것은 첫 사람의 죄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았고 몸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의 몸, 사망의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세상에서 아무 어려움도 없이 살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모든 어려움들이 비록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지라도 주관적으로 인간들에게는 시험이 된다는 것이다. 신자도 육신을 가진 한 사람의 인간이므로 역경은 언제나 시험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역경 자체가 궁극적인 시험이 아니며 그것은 단지 시험의 기회를 제공하거나 시험의 계기가 될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역경 곧 외부적 시험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 반드시 사람을 넘어뜨리지는 못한다. 문제는 역경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그 역경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시험은 외적 환경적 문제가 아니라 내적 영적 문제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이 역경을 당한 것 자체를 시험에 들었다고 말하지 않고 그러한 환경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흔들려서 믿음을 잃고 원망과 불평과 좌절에 빠지게 되는 것을 가지고 시험에 들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첫째 시험 곧 외부적 환경적 시험이 아니라 마음을 상실하게 되는 둘째 시험이다. 마음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우리는 외적 시험이 왔을 때 즉각 마음이 거기에 흔들리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이것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는 것이다.


3.시험은 어떻게 오는가?

시험의 주체는 마귀와 사람 자신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14)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시험하시지 않는다. 다만 마귀로부터 오는 시험을 잠시 허용하실 따름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며 또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의 연약함과 죄인됨과 무능함을 아시는데 무엇을 시험할 것이 있겠으며, 사람을 그러한 죄와 고통의 자리에서 건져 구원하시려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고통을 주실 리도 만무하다.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에 (외부적) 시험을 잠시나마 허용하시는 것은 그것을 통해 사람의 심령을 단련하시기 위해서이다.

마귀가 사람을 시험하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일이고 문제는 사람 자신이 시험의 원인 제공자라는 사실이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많은 경우에 시험은 내가 가만히 있는데 마귀가 와서 공연히 시험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시험받을 만한 태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마귀가 와서 시험하는 것이다.

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니고 마귀가 일방적으로 사람을 공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미리 사람이 어떤 마음(욕심)을 품고 있다든지 어떤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든지 하기 때문에 마귀가 그러한 사람의 마음에 틈새를 파고드는 것이다. 사람마다 겪는 시험의 종류가 다른데 이것은 마귀가 사람의 어떠함과 관계없이 덮어놓고 사람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아킬레스건을 파악하여 그것을 물고늘어지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박수도 두 손바닥이 맞닿아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시험은 마귀 혼자 주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사람이 끌어들이는 것이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욥3:25)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마귀를 겁내거나 아니면 우리의 연약함과 세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우리가 어떤 두려움을 가지게 될 때 마귀는 바로 그것을 우리의 약점으로 파악하고 그리로 뚫고 들어오게 된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망상이나 부질없는 염려와 두려움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음의 문이 허술하게 열려 있을 때 그것은 곧 마귀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늘 죽을까 늘 병들까 늘 망할까 염려하는 사람들은 그런 일로 인해 특히 시험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사람은 언젠가 죽으며 병들고 가난해질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 공급으로 인해 그 본래 가지고 있는 저주의 상태보다는 훨씬 건강하게 살며 훨씬 평안하게 살고 있다. 불신자인 일반 세상 사람들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람들이 언제나 죽을 걱정, 망할 걱정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즉각 마귀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실제로 그런 일을 불러올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욥기에서 볼 수 있듯이 마귀가 언제나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하나님께 청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마귀는 무엇으로 사람을 넘어뜨릴 수 있을까 그것만 궁리한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아무 것도 탐내지 말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 오직 주님만 바라는 자들에게 마귀는 할 일이 없게 된다.

마귀가 한 귀신 들린 사람 안에 놀고 있다가 주님을 만나자 그는 즉시 소리쳤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막5:7) 주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생각밖에 없고 다른 육신적 욕심이나 야망이나 계획, 세상적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마귀가 상관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세계가 다르고 관심사가 다르고 목표가 다른데 무슨 상관을 하겠는가? 무엇으로 시험하겠는가? 돈도 술도 명예도 평안과 미래 보장과 영광도 다 소용없는 것이다.


마귀가 주님을 시험한 세 가지 내용을 알고 있는가?

첫 시험은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먹고 사는 문제를 아버지께 완전히 맡기고 살았다. 그러므로 시험이 되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육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아들의 삶을 온전히 사는 거기에 있었고 따라서 그의 양식은 밥과 돈과 직장과 사람들의 지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그것이었다. 그는 하나님만 기쁘게 하면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면 살았다. 그러나 마귀가 그에게 무슨 시험을 하겠는가? 그에게는 아무 탐욕과 정욕이 없었다. 그의 욕심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뿐이었다.

둘째 시험은 안전과 평안, 미래 보장 문제와 관련된 시험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기의 미래를 알고 계셨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알았다. 그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의 미래는 아버지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마귀가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떨어지면 하나님이 받쳐주나 안 받쳐주나 시험해 보라고 했을 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미래에 대한 보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는 미래에 대해 안전에 대해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마귀는 그에게 아무 것도 시험할 수 없었다.

셋째 시험은 세상 영광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은 아버지 한 분에게만 있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명예나 권세나 부귀 영화가 다 상관없었다. 소나 염소에게 풀이 영광이지 사람에게는 아닌 것처럼 주님에게는 아버지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그 영원한 세계에 대한 분명한 빛이 세상 영광의 헛됨을 분명히 보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에 혹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험의 절반은 우리 안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 무엇인가? 바로 시험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세계를 열어 보이신 것이다. 그 영광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이 있기에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다. 마귀가 아무리 시험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 모든 시험들이 무기가 될 수 없도록 그것들을 넘어서는 사람이 되기만 한다면 그것들은 다 소용없게 될 것이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다.


4.시험을 이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26:4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6:13)

시험을 이기려면 무엇보다 주님께 우리 자신을 부탁해야 한다. 즉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이미 시험을 이긴 자를 의지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겪는 시험을 이미 다 당해 보셨고 또한 그 시험을 다 이기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시험 당할 때는 주님을 간절히 의지해야 한다. 아무리 정교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험도 주님은 그 실체를 아시며 당신 자신이 그러한 시험을 당해 이기셨다. 그는 우리가 그런 시험에 들었을 때 진짜 시험에 들지 않도록 즉 시험에 지지 않도록 도우시고자 기다리신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1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5:8-10)
 
다시 말하지만 시험 당할 때 주님을 바라보며 그를 의지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시험을 이미 다 겪으셨으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심한 시험도 겪으셨다. 그리고 그것을 다 이기셨으며 그 이긴 생명을 우리 안에 부어주셨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미 승리하고 부활 승천하셨고 성령이 오신 이 시점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것은 힘과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상 우리 마음 먹기에 달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9)

사도들은 분명히 말한다. 간단하게 대적하라고만 한다. 우리가 힘써 어려운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주님께서 다 싸워 이겨 놓으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씨름은 이제 마귀와의 직접적인 싸움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싸움이고 우리 마음을 주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다스리는 싸움이다.

마귀의 시험에 대처하는 두 번째 요소는 ‘성령 충만하여 범사에 주님의 마음으로 살며 행하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5:15-18)

육신의 마음으로 살면 반드시 시험에 들게 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마귀가 상관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주님처럼 지혜와 진리의 마음으로 충만해지면 마귀가 우리를 상관할 것이 없게 된다. 마귀는 본래 거짓말과 속임수를 유일한 무기로 승부를 거는 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거짓말에 속지 않으면 그는 도저히 우리를 이길 수 없게 된다.

정신만 차리면 마귀의 시험은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여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이며, 세상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이며, 과거에 나는 어디 있었는데 지금 나는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만 알면 어떤 시험을 만나도 정신을 잃지 않고 제대로 가던 길을 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지혜 안에 있을 때 시험 자체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된다. 사실 우리가 시험을 이기려면 먼저 시험의 성질과 한계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당하는 이 고통이 무엇인지, 어디서 누구로부터 왔으며 왜 왔는지를 알면 우리는 실족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영원한 시련이란 있을 수 없다. 언제나 잠깐 시련을 겪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동안 잠시 진리가 거짓 세력으로부터 배척 당하지 영원히 그럴 수는 없다. 마귀가 세상에 있는 동안 죄와 고통이 있는 것이며 범죄한 육신으로 저주받은 땅에서 사는 동안 가난과 눈물과 고통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나라가 오면 그것들은 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오면 이 고통이 얼마나 달고 귀한 것인지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으로 인해 역경을 당할 때는 더욱 담대하고 기뻐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에 속해 있기에, 진리에 속해 있기에 세상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배척을 받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인지 머지 않게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15:18-21)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요17:14)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1:4,9-11)


5.시험의 유익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1:2-4)

시험을 만나면 기쁘게 여겨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마귀의 시험보다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능력이 더 크기 때문이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고 망하게 하려고 시험을 던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바꾸어 우리 영혼의 체력을 단련하는 기회로 삼으신다. 학생들을 골탕먹이려고 매일 시험 과제를 내 주고 수업 시간마다 시험을 치는 선생이 있다고 하자. 그 밑의 학생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어떤 학생들은 그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다가 아주 학교를 때려 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학생들은 그것 때문에 모든 문제에 완전히 대처할 수 있게 되어 아주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되게 될 것이다. 또 병사를 골탕먹이려고 매일 운동장 수십 바퀴를 뛰게 하며 팔굽혀펴기를 수백 번씩 하게 하는 상관이 있다고 하자. 그 밑의 병사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어떤 병사들은 탈영을 하거나 상관에게 대들다가 영창을 가겠지만 어떤 병사들은 그것을 계기로 아주 강인한 신체와 체력을 지닌 군인이 될 것이다.

마귀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가 어떤 종류의 시험을 하든 간에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시험당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계시지 않으며 반드시 개입하여 그 자녀들을 시험으로부터 보호하신다. 보호하실 뿐 아니라 도리어 그 시험을 영적 성장의 계기로 만들어 버리신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약1:12)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시지 않는다. 다만 마귀로부터 오는 시험을 잠시 허용하실 따름이다. 그러나 그 허용은 꼭 필요해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허용하는 의도는 신자를 단련시키고자 하는 데 있다. 큰 시험을 대비하여 작은 시험에서 힘을 길러 놓게 하는 것이다. 마귀의 최후 발악은 매우 강력한 것이다. 이것은 미리 마귀의 시험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놓은 사람만이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험은 사실상 면역 주사와 같은 것이다.

주님은 땅에 계실 때 많은 시험을 당하셨다. 광야에서 40일 금식 후에 당한 시험뿐 아니고 그 후로도 계속 시험을 당하셨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눅22:28) 이러한 시험에서의 단련이 마지막 시험 곧 십자가를 지는 시험에서 그를 이기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갑자기 큰 시험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작은 시험들을 많이 경험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체험하는 데 이력이 난 사람이 큰 시험도 넉넉히 이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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