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머리에 수건을 씀 / 고전11:1-16

2010.05.01 11:47

이상봉 조회 수:7156

머리에 수건을 씀 / 고전11:1-16

42.권위를 알고 복종함

바울은 자신이 범사에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가 된 것처럼 모든 형제들도 자기를 본받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형제들이 많은 일에 있어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근거하여 그들을 가르친 대로 행하는 것을 칭찬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바울이 가르친 것 중 한 가지를 따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지 머리에 무엇을 쓰는 문제가 아니라 우주의 질서와 관련된 문제요 영적 권위를 알고 존중히 여기는 것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형제들은 바울이 전한 바 ‘교회에서 여자들이 앞에 나서서 기도를 하거나 영적 은사를 발휘할 때는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권위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우주 질서 곧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모른다는 것은 오늘날 인류가 처하게 된 불행한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잘 모른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음을 뜻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조성되었으며 현재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적 생명체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생명의 질서가 있다. 교회의 모든 지체가 이 생명의 질서와 흐름을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몸의 생명은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교회 생활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영적 권위에 대해서 깨닫고 자기 위에 있는 권위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우주 가운데 하나님이 머리이시며 주인이시며 왕이심을 깨닫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요 단지 하나님을 섬길 아들이요 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요 그의 생명으로 사는 피조물이다. 이것을 알고 선포하며 실행하게 되는 것은 구원과 회복의 첫 수순(手順)이다.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를 의지하는 태도를 취해야 하며 형제들 가운데서 자기 위치를 깨닫고 마땅히 섬길 자를 섬기며 순종할 자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성경에는 두 개의 제도가 나타난다. 하나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세운 창조 질서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고 파괴된 우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세운 은혜의 제도이다. 이 두 시스템은 서로 무관한 것은 아니나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이다.  

먼저 『은혜』라는 시스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은혜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과 공의로 인해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을 그들의 죄로 인해 멸망시키지 않고 대신 그 자신이 희생됨으로써 (그의 아들을 희생시킴으로써) 구원하시는 것과 관련된 제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쓰는『구원』,『교회』,『형제 자매』,『모든 사람이 다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서로 차별 없이 같이 사는 것』 등의 개념은 다 은혜의 시스템 안에 속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주로 은혜의 제도와 관련하여 일하신다. 이런 은혜의 제도가 생긴 것은 첫 창조 때부터가 아니라 사람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났을 때부터이다.  

다음으로 『창조 질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창조 질서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통치(統治) 제도라고 말할 수 있다. 통치란 다스리심을 말한다. 그래서 통치는 다른 말로 치리(治理)라고 하기도 한다. 이것은 은혜 시스템과는 다른 것이며 그것이 있기 전부터 존재한 것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태초부터 정하신 혹은 영원 전부터 정하신 우주의 질서이다. 그 질서의 첫째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우주 가운데 유일하신 참 신이요 우주의 왕시며 모든 피조물의 주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만물을 지으시고 그 기뻐하시는 뜻대로 그 관계를 정하셨으며 그 기뻐하시는 뜻대로 그들을 다스리신다. 이것이 우주의 질서이며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리고 사람이 지음 받을 때도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며 먼저 남자를 지으시고 다음으로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또한 아담이 타락한 후에 구세주를 약속하셨는데 그가 남자의 후손으로 나지 않고 여자의 후손으로(남자 없이) 태어나게 하신다고 하셨다. 이것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정하신 것으로서 하나님의 통치에 속하는 일이다. 또 하나님은 처음에 에덴 동산에서는 과일과 채소를 사람들의 양식으로 주셨지만 나중에(홍수 후에)는 짐승의 고기를 양식으로 주셨다. 이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결과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같은 언어를 썼다. 그러나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으며 하나님을 대적할 때 하나님은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써 서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없도록 만드셨다. 이것 역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치리의 손길이다. 또 바벨탑 이후 하나님은 인류를 온 세상으로 흩으셨다. 그 결과 많은 인종이 생겼으며 많은 민족들이 생겼다. 이것도 다 하나님의 통치의 결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민족들 중 유독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은혜가 있더라도 통치는 그대로 남았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은혜 제도 아래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여러 인종들 여러 민족들은 각기 왕을 세워 여러 나라들이 되었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이루어진 일이다. 이제 세상에는 왕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신처럼 다스리는 질서가 허락된 것이다.

그러나 사사시대까지 이스라엘은 하나의 민족이기는 했지만 인간 왕이 신처럼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국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무엘 때에 와서 백성들은 자기들도 다른 나라들과 같이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도록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으나 허락하셨다. 그 결과 그들은 이방 나라들처럼 왕국이 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의 제도에서 벗어나 스스로 통치 제도 아래로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다. 사울이 왕으로 선택된 순간부터 이스라엘은 동시에 은혜의 제도와 통치의 제도 아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은 은혜는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은혜는 은혜이고 통치는 통치여서 은혜가 통치를 대체하거나 밀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은혜는 통치보다 앞서지 못한다. 통치는 우주의 기본 질서로서 어떤 경우에도 지속된다. 은혜가 베풀어졌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없다.


1.아담의 경우

아담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속의 약속을 주셨다. 여자의 후손이 일어나 그들을 살게 할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에서 추방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였다.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냈을 뿐 아니라 아담이 다시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룹들을 세워 지키셨다. 은혜는 아담에게 구주를 약속했으며 가죽옷을 해 입혔지만 하나님의 치리(다스림)의 손길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었다.


2.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정탐꾼들의 말을 듣고 믿음이 없음으로 인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이때 하나님은 분노하시고 그들에게 주신 특권을 철회하사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만드셨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낌새를 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제야 회개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나섰으나 결국 많은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뿐 그들의 원대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하나님은 치리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럴 권세를 가지고 계시며 종종 치리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 곧 이스라엘 백성들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는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이므로 그대로 시행되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은 가나안에 못들어갔지만 그들의 자손들이 들어갔다. 이것은 은혜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은혜는 은혜고 치리는 치리여서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향해 악한 말로 외쳤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다스림의 손길이 펼쳐졌으며 그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도 거두어지지 않았다.
 

3.모세의 경우

모세는 백성들이 물을 달라고 불신앙적인 태도로 불평하며 원망할 때 너무나 화가 나서 바위를 두 번 쳤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거룩을 백성들 앞에서 훼손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 결과 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치리의 손이 그에게 미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모세는 누가 뭐라해도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그는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뽑혀서 이스라엘의 구원자 역할을 담당했고 하나님의 친구처럼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며 직접 교제하기도 했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해 참으로 많이 수고하고 큰 용기와 믿음으로 이스라엘을 가나안 접경까지 이끌어내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입은 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고 그가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하여 치리를 당한 것은 또한 그대로 사실이다. 그는 마지막에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이 바라보이는 비스가山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하나님의 치리는 결국 그를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4.다윗의 경우

다윗이 범죄한 후에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그의 죄를 즉시 용서하셨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에도 하나님은 다윗과 특별한 교제를 가지셨다. 이것은 다 다윗에게 베푸신 은혜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칼이 그의 집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나단 선지자의 예언은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치리이다.

이처럼 은혜와 치리는 전혀 별개의 것이므로 이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며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정하시고 그것을 이행하실 때 (즉 그의 통치를 펼치실 때) 그것에 이의를 달거나 거부해서는 안된다. 은혜와 치리는 서로 다른 것이지만 결코 서로 거스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은혜와 치리는 서로 보충하며 돕는다. 은혜는 치리를 무시하게 만들지 않고 도리어 사람들로 하나님의 치리에 복종하게 해 주는 것이다. 오직 어리석은 자들만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방종한다. 그러나 은혜를 참으로 아는 자는 더 철저히 하나님께 복종하며 그의 손 아래 겸손하게 된다.


이제 머리에 쓰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초대교회 때 여자들이 교회에서 공적으로 기도를 하거나 예언을 할 때에는 반드시 그 머리에 수건을 쓰고 그 일을 해야만 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겠다는 표시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우주의 기본 질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머리이시고 그 아래에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아들이 있으며 그 그리스도 아래 만물이 존재하는데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고 만물을 아들을 위한다는 것이다. 이 질서는 하나님의 통치에서 나온 것이다. 이 질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므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파괴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여기서 천사란 마귀를 일컫는다. 마귀는 자기 처소(위치)를 떠나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도전함으로써 우주 질서와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했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속여서 자기의 타락한 자리로 끌고 갔다. 이로 인해 인류는 마귀와 함께 하나님의 권위를 파괴한 죄로 멸망당하게 되었다. 교회란 무엇인가? 바로 이런 인류 중에서 하나님께서 일부를 구원하여 회복시켜 놓은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마귀를 향하여 자신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자들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선언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자가 이 표시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가운데서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지음을 받았고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이 정하신 우주 질서와 권위에 복종한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는 권위의 시스템 중 맨 마지막에 있는 여자가 그 머리를 수건으로 가리고 “저는 권세자가 아니며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이 정하신 권세 아래 순종합니다”라는 특별한 표시를 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귀를 거부하며 그의 거짓말과 반역을 정죄하고 우주 가운데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권위가 회복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가진 분들로서 동등한 영광과 권능을 지녔으며 다 같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 본래 하나님과 동등한 아들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로 기꺼이 파송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제 아들은『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자』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치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여기에 절대적으로 순종했다. 그는 자기가 아버지의 뜻대로만 움직이고 보내신 분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것을 기쁘게 받았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요8:38)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8:28)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머리이며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요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순서이며 질서이다. 앞에 서는 자는 권위자요 생명을 주는 자이며 뒤에 서는 자는 순종할 자요 생명을 받는 자이다.

훗날 온 세상이 다 이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각 남자의 머리 곧 온 인류와 만물의 머리이심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우주의 질서이며 그것은 영구불변하며 반드시 그대로 될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를 지금 아는 사람들은 교회뿐이다. 세상은 이것을 모른다. 오늘날 교회만이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요 남자는 여자의 머리임을 알고 있다.

은혜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피조물인 사람들(교회)를 위해 몸을 바치게 했고 그들을 신부요 형제요 친구라고 부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은혜는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형제와 자매라고 부르게 만들었으며 차별이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통치는 여전히 존재하며 이것은 사람들이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사람 간에도 서로 받들고 존중하며 순종하도록 만든다. 은혜는 치리를 보충하지 결코 폐하지 않는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하고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자라고 세상에서 납세 의무나 병역 의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은혜를 받은 자라고 해서 하나님을 가벼이 알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권위를 깊이 알며 하나님의 통치를 존중하고 거기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나는 초대 교회에서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기도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모든 신자들이 꼭 그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천주교에서는 이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은 성찬을 행하는 것보다는 비교적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여지가 많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꼭 그런 형식을 취해야 권위에 대한 순종의 표시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도 여러 말 할 것 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권위에 대한 순종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안 쓰는 것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우리 마음과 실제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위임 권위자들에게 순종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에 훨씬 더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기 때문에 권위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과 권위 순종의 정신이 희미해진다면 우리는 반드시 실제로 머리에 수건을 씀으로써 바울의 의도에 부합하는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다.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