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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는 어디서 / 고전11:1-16

2010.05.01 11:48

이상봉 조회 수:7051

권위는 어디서 / 고전11:1-16
 

42.권위를 알고 복종함 (2)

1.사람은 왜 권위가 없는가
 
권위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온다. 성경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1:3)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가 만물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능력을 매우 필요로 한다. 사람들이 신(하나님)을 믿는 것도 대개 능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권위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이 우주의 주인이고 모든 만물의 근원이시며 모든 권위와 능력의 원천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권위는 그다지 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적극적으로 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인격과 그의 권위를 알고 복종하는 자에게만 그 능력을 온전히 나타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추구하기 전에 먼저 그의 권위를 제대로 알고 두려해야 한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올라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사14:12-14)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 (사14:15)

큰 권세를 행사하던 한 존재에게 하나님은 ‘너는 권위 없는 자리로 떨어졌으며 장차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겉으로는 바벨론 왕을 향해 한 말이지만 실은 세상의 모든 교만한 인간 권세의 근원인 사탄을 향해 한 말이다. 사탄은 지금 큰 권세를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실은 그에게는 아무런 참 권위가 없다. 마귀는 아직도 분명히 큰 힘을 지니고 있으며 큰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가진 힘은 거짓말과 속임수 위협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아무런 진정한 권위가 없다. 따라서 그는 그가 가진 큰 힘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으며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들과 만물로부터도 멸시를 받고 있으며 종국에 가서는 영원히 멸망 받게 될 것이다.

그가 이런 존재가 된 것은 그의 본래 지음 받은 자리가 그렇게 아무 권위도 영광도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사탄은 천사장으로 지음 받았으므로 그의 자리가 그렇게 낮고 비천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는 본래 하나님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영광스런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수종하는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같은 영광을 받고자 하는 망상을 품고 하나님의 권위를 거스렸기 때문에 그의 모든 영광과 권위를 잃고 더러운 마귀로 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이 사탄 된 것은 권위에 거역했기 때문이다.

사탄의 원리는 『자기 찬양의 원리』이다. 우리는 이 사탄의 실패에서 반드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권위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알고 그것을 인정하고 거기에 복종하는데서 사람의 권위가 나오는 것이다.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자에게는 아무 권위도 생기지 않는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회복 역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위를 알고 그 음성을 들으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만드는 역사이다. 온갖 선과 온갖 일들이 세상에서 다 이루어진다 하여도 그것은 인류의 구원과 상관없으며 인류의 회복과 상관없는 것이다. 오직 인류의 참된 구원과 회복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주로 알고 그에게 완전히 순종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 성취되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가 선악의 개념을 분명히 가짐으로 범사에 선을 추구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나 심지어 천국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거짓과 악의 아비이므로 선이 행해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또한 그의 나라를 잃고 싶지 않으므로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것도 매우 싫어하지만 그래도 단순히 외형적으로 선을 행하거나 복음을 전하고 교회가 서는 것만으로는 그가 사람들 가운데 확보해 놓은 그의 지배권과 영향력을 잃지 않기 때문에(그의 나라가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그렇게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스도의 권세에 복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매우 두려워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 말할 것이 없고 아무 질문과 이의가 없는 사람이 되어 그분의 음성을 전적으로 청종하는 자가 될 때 마귀는 사람 안에 심어놓은 그의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사탄의 나라는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할 때 완전히 무너진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마귀를 대적하려면 단지 선을 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선은 선이되 어떤 선이냐 하는 것이 분명해야 한다. 참 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보내신 아버지께 복종하신 것을 빼 놓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진정한 선의 으뜸은 아들이 아버지를 알고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이것이 최고선이다. 선행 뿐 아니라 전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증거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기뻐하며 그분께 전적으로 순종하셨는지를 빼놓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가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그것으로 (불순종으로 인해) 마귀의 권세에 묶여 있는 죄인들을 해방시키셨는지를 선포하는 것을 빼놓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전히 전파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권위에 대한 순종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권위를 모르는 자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23)

왜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했을까? 그것은 비록 제사가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이지만 거기에도 자기 의지의 요소가 들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순종만이 자기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만 추구하는 것이다. 순종만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은 여전히 순종만 빼고 여러 가지 섬김의 일들을 하고 있음으로써 마귀의 올무에 빠져 있다. 마귀는 끝까지 사람들을 속여서 순종만 빼고 무엇이든지 하게 만듦으로써 사람들로 헛되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시도할 것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바 참 신앙을 구성하는 두 가지 핵심 요소는『상한 심령』과『순종』이다. 사무엘이 말한 바와 같이 제사보다는 상한 심령이 훨씬 더 중요하다. 상한 심령을 가진다는 것은 곧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며 그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이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괜히 자기를 낮추고 무언가를 할 수 있는데도 못한다고 억지 겸손을 떠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자다. 우리는 죄 가운데서 태어나서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아왔기 때문에 죄는 우리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죄라는 것이 자기 안에서 자신과 분리될 수 있도록 따로 존재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떨어내 버리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죄란 우리 인격과 완전히 연합되어 있어서 우리와 하나이며 따라서 그것은 도저히 뗄 수도 분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자신과 죄가 하나로 연합해 있음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참으로 섬길 수 있는 사람이다. 내가 살아 있고 숨쉬는 한 죄는 반드시 따라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참으로 섬길 수 있다. 이런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것을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6,17)  

다윗은 밧세바 사건을 통해 자신이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었고 하나님 앞에서는 일개 흉악한 죄인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자격도 없는 사람이며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은 그것이 제사라는 형식으로 나오든 무슨 형식으로 나오든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의만을 구했다. 자신이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상한 심령 곧 깨지고 낮아진 마음이 유일한 것이었다.

상한 심령이 된 사람은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51:18)

앞에서도 말했듯이 상한 심령의 인간은 결국 자기 의를 신뢰할 수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의 구원, 하나님의 의(하나님이 예비하신 의)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구하게 된다. 인간에게 의가 없고 희망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게 절감될 때 사람은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저는 아무 할 말도 없고 아무 능력도 없고 아무 대책도 없으니 하나님이 다 하십시오” 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저더러 어떤 선한 일을 하라고 하시거나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하시면 저는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게 구원의 능력을 베푸시고 다만 이리 따라 오라 저리 따라 오라 하시면 저는 얼마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그리스도)을 의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두 번째 요소를 보게 된다. 바로『순종』이다. 의지(依支)는 곧 순종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자기의 무력함과 죄악을 깨닫고 자기 인생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뢰하는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은 범사에 전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믿고 그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순종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실제로는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며 그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다.

권위를 아는 것,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가만히 엎드려 그의 음성을 들으며 그가 우리 안에서 그의 능력과 지혜로 모든 일을 추진해 나가시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환경으로든 우리를 다루실 때 항변하며 대항하지 않고 조용히 그것을 받아들이며 다루심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빛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 눈을 여사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우리 삶이 우리 자신의 생각과 뜻대로 영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 의해 영위되는 것임을 보게 되어야 한다. 이것을 분명히 볼 때 우리는 자기 본위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어떤 이유로든 우리가 『자기본위(自己本位)의 삶』을 살아간다면 권위에 대한 복종은 불가능하다.

내가 살아 있고 내 뜻과 야망과 자존심이 살아 있어서는 이런 저런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위임 권위는 물론이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권위 곧 하나님의 말씀에도 복종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럴 때는 이 권위라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에 가장 거치적거리는 미운 물건으로 느껴지게 될 것이며 결국 우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고집불통이 되고 말 것이다.

어떤 청소년들이 부모의 말을 안 듣고 반항아가 되거나 가출을 하는 과정을 한 번 자세히 살펴 보라. 어떤 아이들도 처음부터 부모를 부정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부모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 부모의 말을 들으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 계획이나 욕망을 부모들이 받아주지 않거나 부모의 뜻과 자신들의 뜻이 상치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부모를 거역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생각은 무엇인가? 자기 뜻도 실현하고 부모의 뜻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게 될 때 결국 자기 뜻을 택하고 부모의 뜻은 버리게 된다. 만일 부모들이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허락한다면 아이들은 단지 부모의 요구대로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부모 자체를 버리거나 부모의 권위 자체를 부인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단지 놀지 말고 공부하라는 부모의 말이 싫지 부모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아이들은 부모의 말(요구)과 부모라는 존재(권위)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결국 자기들의 뜻을 관철하려면 단지 부모의 말(요구)만 버려서는 안되고 부모 자신(가정)을 버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소위 ‘자기 뜻’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의 권위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버리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임을 알 수 있다.  


2.우리는 어떻게 권위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권위와 관련하여 우리의 관심 중 하나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진정한 권위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데 있다. 우리는 먼저 사람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한 분을 주목해야 한다.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은 놀라운 권위를 지닌 분이셨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7:28,29)
  

이러한 주님의 권위는 어디서 왔는가?

겟세마네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기도는 사무엘상 15:22의 원리에 따른 것이다. 바로 순종에서 온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순종했고 이것이 그를 권위자로 만들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아버지께 순종했다. 심지어 십자가를 지는 일에 있어서도 “아버지여 저는 십자가에 달리겠습니다. 이것이 제 결정이고 제 뜻이므로 아버지가 뭐라 하든지 저는 이 쓴 잔을 마시겠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아버지의 뜻이 그것이므로 저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합니다” 라는 태도를 취했을 뿐이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마26:39,42)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막14:36)

바로 이러한 태도가 예수님을 만유의 주로 최고의 권위자로 높이게 만든 것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시8편)

주님은 본래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아니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자요 우주의 왕이셨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런 지위를 버리고 타락으로 인해 천사보다 못하게 된 인생의 자리로 내려오셨다. 그는 인생(사람) 중에서도 어린아이와 젖먹이와 같은 가장 작은 자가 되셨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에서 아버지께 조용히 순종하셨다. 이것이 그로 영광과 존귀로 관 쓰고 만물을 발 아래에 두고 다스리는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만들었다. 주님은 왜 이런 삶의 과정을 겪으셨나? 바로 우리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서이다. 우리의 본이 되시기 위해 그것을 행하신 것이다. 순종이야말로 인간 회복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누가 권위 있는 사람인가? 바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이다. 권위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그러므로 자기를 높이고 나타내는 자에게는 권위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자에게만 권위가 있다. 누구든지 높아지고 싶고 영광스럽게 되고 싶고 만인에게 권세를 떨칠 수 있는 참 권위자가 되고 싶으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의 권위에 절대 복종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권위가 없고 작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권위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권위에 접하며 하나님의 권위를 나누어 받게 되기 때문이다. 서당개 삼 년에 풍월 읊는다는 말처럼 같은 사람이라도 권위 없는 자들 가운데서 허풍을 떨며 거짓 위세를 부리는 것만 배우는 사람하고 참 권위자이신 하나님을 가까이함으로써 참 권위의 능력을 접하는 사람 간에는 큰 차이가 있게 된다.

진정한 권위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힘 있는 사람이 권위자가 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세상 권위도 알고 보면 진정한 권위가 아니라 단지 사람들로 두려움을 가지게 만들어 억지로 복종케 하는 거짓 권위라는 사실이 이미 세상 안에서도 다 드러나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교회에서 권위 있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권위를 알아 볼 줄 알고 그 권위를 받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영광스럽게 되기 어렵다.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위임 권위와 존귀에 대해 잘 알아보고 잘 받드는 사람은 얼른 보면 바보 같고 벨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비천하고 낮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런 사람이 결국 가장 권위 있는 사람이 된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나이다.” 이 말은 로마 군대의 한 백부장이 주님께 드린 말이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8:8-10)

이 사람은 아마도 성경에서 주님의 칭찬을 가장 크게 받은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 가장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사람들도 이 사람만 못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왜? 그들은 제사만 알았지 권위에 대한 순종은 몰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누가 진정으로 권위 있는 사람이 될 것인가? 바로 참 권위를 알아보고 그 권위에 자기를 낮추어 순종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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