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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제의 범위 / 고전12:1-3

2010.05.01 11:51

이상봉 조회 수:6563

교제의 범위 / 고전12:1-3


45.교회의 연합의 원칙

신자는 누구와 교제해야 하며 어떤 사람들과 연합해야 하는가? 그 답은 당연한 말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생명을 받은 형제들이다. 그렇다. 교제는 형제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과 교제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몸 안에 속한 지체들과만 교제한다. 이것이 우리의 교제, 우리의 연합의 한계요 범위이다.

누가 형제인가?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고 섬기는 자이다.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는 자가 형제이다. 예수님에 대해 좋게 말하는 자가 형제가 아니고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는 자가 형제인 것도 아니다. 오직 형제는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한 자이다. 우리는 세상과는 교제하지 말아야 하며 반드시 형제들 안에서 교제해야 한다. 또한 형제이면 그가 누구이든 가리지 말고 서로 받아야 하며 교제해야 한다.
 
교제와 연합에는 두 가지 치우침이 있다. 하나는 형제가 아닌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형제들과도 이런 저런 이유로 교제하지 않는 것이다.


분리의 문제

첫 번째 문제는 어떤 신자들이 형제가 아닌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다. 형제가 아니라는 것은 거듭난 생명을 소유하지 않은 이름만의 신자들 곧 교회 안에 들어와 있으나 실제는 세상 사람에 불과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연합을 추구하는 어떤 사람들은 연합의 범위를 너무 넓혀서 이런 사람들과도 연합을 도모하려고 한다.

얼마 전에 천주교에서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들이 불교 행사에 참석하여 설교도 하고 유교 제례에도 참석하여 같이 제사를 드린 것을 보았다. 그리고 오늘날 개신교 안에서도 종교다원주의를 제창하는 사람들이 이런 일을 흔히 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공공연히 불신자들을 그 안에 참여시켜 어떤 선한 일이나 사회적인 일을 함께 도모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도 교회 안에 불신자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불신자의 구미에 맞는 일들을 제공하고 있다. 불신자들을 접촉하는 것은 그들을 전도하여 구원코자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불신자들이나 이방 종교인들의 회개가 아니라 교회의 타락과 교회와 세상과의 혼합이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는 교회가 연합 문제 또는 교제 문제에 있어서 어떤 길로 가야 할 것인지를 말해 준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 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13:24-43)

교회에는 좋은 씨와 가라지가 함께 존재한다. 이 둘은 같은 밭에 심겨져 있으므로 함께 자라며 크는 동안에는 모양도 어느 정도 비슷하여 쉽게 분간하기 어렵기도 하다. 그러나 둘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연합할 수 없다. 연합을 추구하는 어떤 사람들은 알곡끼리만 연합할 뿐 아니라 가라지와도 연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비유를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알곡과 가라지가 연합하라거나 혼합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교회 안에 불신자가 섞여 있을 수 있음을 알고 있으라는 것이며 신자가 불신자를 해치거나 죽이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로마 천주교는 이단이라는 가라지를 뽑아버리려는 오류를 범했다. 그들은 원리 면에서도 잘못되었고 실행 면에서도 잘못 행했다. 그들은 가라지를 뽑지 말고 심판 날까지 그대로 두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참으로 주님을 따르려는 참 신자들 진리에 속한 자들을 이단으로 정리하여 죽임으로써 알곡을 제거한 꼴이 되고 말았다.

주님은 세상에서 가라지를 뽑을 것을 명령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 참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그들을 해치거나 쫓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정하고 연합하며 교제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는 연합해야 하지만 세상 안에서는 연합도 있고 분리도 있다. 마태복음 13장이 말하는 배경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다.(13:38)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두는 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다. 세상에서는 명목상의 신자 즉 거짓 신자들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단이나 진리에 속하지 않은 거짓 신자들이라고 해서 죽이거나 지구 밖으로 쫓아낼 수는 없다. 로마교는 그들이 가진 힘을 이용하여 가라지라고 판단되는 자들을 교회에서는 물론이고 세상에서도 제거하려고 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세상에서는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그 어떤 사람도 허용되며 그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다르다. 교회는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거짓 신자들이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거짓 신자들, 명목상의 신자들을 거부할 수 있는가? 제거할 수 없다면서 어떻게 몸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는가? 그것은 그들을 형제로 인정하지 않고 또한 그들과 교제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 주님은 세상에서는 가라지를 허용하셨으나 교회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허락지 않으셨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교회 안에서의 연합 즉 같은 생명을 지닌 형제끼리의 연합이다.

역사상 많은 교회들이 이 원칙에서 벗어났다. 로마 천주교는 자신들이 타락하여 교회 아닌 것이 되고 세상이 된 것은 생각지 않고 가라지를 세상에서조차 제거해 버리려고 살인과 심판을 시행했다. 독일 루터교회나 영국의 성공회 같은 국교회들은 이와는 반대로 교회 안에 세상을 공공연히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세례를 베풀고 교회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불신자들에게 교회의 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거듭난 아들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물질들까지 포함하여 구성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주신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끼리는 반드시 연합해야 하지만 아직 중생하지 못하고 세상에 속하여 세상적 삶을 도모하고 있는 이름만의 거짓 신자는 이 연합 안에 들 수 없다. 참된 연합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몸의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참된 연합은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 적을 두고 있고 교회에 부지런히 들락날락하는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생명의 흔적이 없고 주님을 주로 인정하여 순종하는 흔적이 없고 육신적이고 정욕적인 성질을 그대로 나타냄으로써 몸의 생명을 해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공격하고 쫓아내지는 않더라도 그들을 형제로 신뢰하고 교제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큰 해를 입게 될 것이다. 교통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누구이든지 우리의 교제는 단 두 존재와 하는 것이다. 우리의 교통의 배경은 단 둘 곧 하나님과 마귀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아니면 마귀에게 접하여 그의 거짓말을 듣는 것이다.


분열에 대해

우리의 두 번째 문제는 어떤 신자들이 몸에 속한 지체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분명한 사람들과도 이런 저런 이유로 교제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분열의 문제이다.

우리는 2주일 전에 모임과 연합에 대해 생각했다. 신자들은 혼자 있지 않고 함께 모여서 교제함으로써 연합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들도 혼자 있지 않고 함께 모여서 교통하는 것이 마땅하다. 초대 교회 때 모든 교회들은 서로를 형제로 인정하고 할 수 있는 한 만나서 교통함으로써 온 교회가 다 하나의 몸임을 나타내었고 그로 인해 보다 큰 생명의 유익을 누렸다. 바울 서신과 같은 성경들은 다 본래 한 교회나 한 신자에게 보내진 것이지만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각 교회들을 두루 돌았다. 그것은 그들이 서로 교통하며 생명 안에서 연합의 관계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에도 물론 교회들은 혼자 있지 않고 무리를 지어 연합체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 연합이 이상하고 불완전한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들이 이루고 있는 연합이 성령 안에서의 연합이 아니라 교파적 연합이기 때문이다.

교회들도 신자 개인들처럼 서로 교통해야 한다. 온 세상의 신자들과 온 세상의 지역 교회들이 다 함께 모여 항상 교통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한 서로를 형제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한한 직간접으로 교제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교회를 포함하는 하나의 연합체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우주적 교회) 보다 작은 다른 파당(교파)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지금 교회들의 실정은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교회들은 지금 연합을 한 것도 아니고 안한 것도 아닌 상태에 놓여 있다. 교파적 연합이 바로 그런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교파란 무엇인가? 같은 사상과 같은 역사적 정치적 배경을 가진 교회들의 집단이다. 이것은 누가 일부러 만든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어찌 하다보니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교파는 어떤 의미에서 역사적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님께서 만드신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우주적 교회와 일치하지 않으며 종종 그러한 우주적 교회에 대항하는 기능을 해 왔다. 그러므로 교파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따른 교회 연합체가 아니라 단지 각기 인간적 형편에 따라 모인 교회 집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파는 엄밀하게 말하면 연합이 아니라 분열이다. 바울은 이것을 경계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고전1:10-1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고전3:3,4)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遍黨)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고전11:17-19)

교회의 분열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보다 작은 범위로 교제의 범위를 제한하여 교제하고 있는 상황을 일컫는 것이다. 서로 싸우든지 안 싸우든지 교제의 범위, 형제로 인정하고 함께 연합하는 범위가 그리스도의 몸보다 작으면 그것은 분열이며 당을 짓는 것이다.

분열이란 나누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나누어진 상태를 용인하고 그 안에 들어 있으면 현재 나누어지려고 적극적으로 애쓰지 않더라도 분열은 존재하며 유지된다. 우리의 분열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 보라.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은 어떻게 분열하는가? 각 지역 사람들은 지금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다. 서로 나누어지려고 특별히 어떤 노력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분열은 있으며 계속 유지되고 있다. 적극적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추진하지도 않는데 왜 분열이 있는가? 그것은 그들이 이미 서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나누어진 상태 안에 가만히 있기만 하면 분열은 자동적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교회 안의 분열도 이와 같다. 오늘날 교회들의 연합체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교파이다. 교파 교회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교회를 다 형제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교파 범위 안에 들어 있는 교회들끼리만 형제로 인정하고 교통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연합체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합이 아닌 불완전한 연합, 가짜 연합이다. 이 안에 들어 있으면 저절로 분열은 지속되며 유지된다.

그러므로 교파적 연합은 연합의 유익은 별로 없고 폐해만 많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런 연합은 하지 말아야 하며 그런 연합체에 가담하지 말아야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어느 한 쪽에 붙으라고 하면 거기에는 어머니당과 아버지당이 생겨날 것이다. 이것을 연합이라고 할 수 있는가? 어머니당에 가입하는 것은 연합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를 지지하는 것이다. 소(小) 연합에 가담하는 것은 완전한 연합을 반대하는 것이 된다.  

우리 교회가 교단에 가입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형제들의 합의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내가 처음부터 그렇게 인도를 받고 시행해 온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나는 왜 그렇게 하는가? 별나서? 잘나서? 혹은 특별한 신념 때문에 그렇게 하는가? 그렇지 않다. 내가 교파에 가입하지 않는 것은 교파가 성경적인 연합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나를 교파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교파에 속해 있는 것은 그 자체가 분열에 가담하는 것이다. 경상도 사람들과 전라도 사람들이 일부러 결혼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지역주의를 고수하는 것이 곧 분열을 고착화하고 지속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을 통해서라도 탈지역주의적 행동을 함으로써 분열을 깨고 연합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나는 가장 약하고 가장 무능한 자이기 때문에 개인 신앙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나 교회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형제들의 도움과 다른 교회들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내가 조금이라도 자존심이나 내 자신의 의로 인해 다른 교회들을 무시하고 멸시하여서 다른 교회들과 연합하여 함께 주님을 섬겨나가는 일에 소극적이라면 주님이 나를 심판하실 것이다.

나는 어떤 때는 힘도 없고 잘나지도 못한 내가 이렇게 혼자 서 있는 것이 두렵다. 사람들은 내가 교회를 새로 시작했고 또 아직 작은 규모의 교회이므로 우리 교회를 개척교회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우리 교회가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다른 의미로 개척교회라고 생각한다. 이전에 많은 교회들이 걸어가지 않은 길로 거의 홀로 걸어가기 때문에 나는 내가 지금 교회를 개척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개척이 아니고 이미 참 교회의 길을 개척해 놓은 많은 교회들이 있고 나는 그들 가운데 속하여 함께 주님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대부분의 교파 교회들은 도저히 내가 따라갈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으며 나로 하여금 함께 모이는 것이 유익하다는 판단을 주지 못하고 있다. 나뿐 아니라 그동안 바른 길을 추구하는 많은 교회들이 있었는데 성령님은 언제나 그들을 교파나 국교회 또는 자칭 우주적(카톨릭) 교회라고 부르는 로마 천주교회 같은 사이비 연합체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비록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도해 오셨다. 이 몸은 언젠가 드러날 것이다. 새예루살렘이라고도 불리는 이 참 신자의 연합체는 지금 이 세상에서는 하나의 가시적 단체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성령님은 지금도 깨끗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을 한 데 엮어 분명한 하나의 몸으로 조성하고 계신다.

교파는 『전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우주적 교회』와 무관하다. 『교파』는 마치 『교회』안에 있는 『당파』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둘 곧 교파와 당파의 특징은 생명 아닌 것으로 서로 다투는 것이다. 생명의 울타리는 몸이다. 몸의 각 지체는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한 사람의 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싫든 좋은 하나를 유지하고 있다. 그보다 작을 수도 없고 그보다 클 수도 없다. 몸보다 작으면 상반신이나 하반신 혹은 순환계, 골격계, 신경계 등으로 나누어져야 될 것이다. 몸보다 크면 옷이나 몸에 묻은 때까지도 몸에 포함시켜야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함께 받아서 누리는 이것이 우리 연합의 한계이다.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했느냐 임하지 않았느냐, 주님을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예수님을 찬양하며 그를 주로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이것이 우리의 기준이다. 이보다 적거나 이보다 큰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교회 안에서 서로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는데, 같은 은혜를 받았고 같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데도 은사나 능력의 차이, 사상이나 지식의 차이, 빈부, 유무식, 귀천, 지역, 인간적 개성과 성향의 차이 등으로 인해 형제들이 서로 인정하지 않고 다투고 분리하고 당파 짓는 것은 연합의 울타리를 몸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그보다 좁힌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주님을 참으로 믿지 않는 사람, 명백히 주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 세속적이고 사악하고 교만하며 주님을 신뢰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단지 한 교회 안에 있다든지 혹은 육신적인 성향과 조건들이 같다는 이유로 인해 혹은 교인의 숫자가 많아지고 교회가 크기를 바라는 이유로 인해 혹은 예수라는 말만 입에 올리면 다 형제로 포용하여 하나로 연합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으로 인해, 형제가 아닌 그런 사람들을 다 포용하는 것은 연합의 울타리를 너무 넓힌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 숨쉬는 하나의 유기적 몸이 아니라 잡동사니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고린도교회는 성찬을 나누면서 그들이 하나의 몸으로 연합된 것을 망각하고 당을 지어 갈등을 겪음으로써 주님의 몸을 오해하였으며 주님의 살과 피를 그릇되게 받았다. 이것은 생명의 경계선을 너무 좁힌 것이다. 형제이기만 하다면 다른 것은 묻지 말아야 한다. 지식과 사상의 차이, 빈부귀천의 차이, 과거, 인간적 개성의 차이 등은 보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오래 참고 용납하다 보면 어느 때 다 용해되어 하나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주님이 참으로 좋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를 넉넉하게 하고 풍성케 하기 때문에 그분만 바라보고 있으면 다른 문제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이 주님을 어떤 다른 사람이 사랑하고 함께 따라올 때 그 사람이 참 귀하게 느껴지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그가 인간적으로 이런 저런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내가 아는 이 보배 주님을 그도 알고 있으며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로 인해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얼마든지 그와 연합할 수 있으며 연합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 외의 어떤 기준으로도 연합을 말하고 싶지 않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가 아무리 그럴듯한 사람이라도 합하고 싶지 않으며 함께 있고 싶지 않다. 반대로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교파, 어떤 사상, 어떤 취향,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든지 그와 함께 있고 싶고 그와 교통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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