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15.유대인은 표적을 구함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을 당신의 방법으로 계시하셨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율법과 선지자로 당신을 계시하셨으며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당신을 완전하게 계시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의 계시대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며, 하나님을 경험하되 자기 방식대로 경험하려고 한다. 그 중에서 특히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나타난 계시대로 알려고 하지 않고 그들의 종교적 관념에 따라 하나님을 '감각적으로' 알려고 한다.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종교적인 사람들이 다 그렇다. 그들은 하나님을 어떤 종교적인 현상을 통하여 알려고 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느끼기 위해 얻고자 하는 현상은 흔히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일컫는 표적이다. 그러므로 표적을 구하는 것은 종교적인 사람들의 특징이다.

하나님은 물론 한 때 즉 구약 시대에 자신을 그런 방식으로 나타내신 적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오랜 본성 속에 종교적인 특성이 들어 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을 끊임없이 종교적으로 추구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득이 근동의 여러 다른 신들과 경쟁을 하며(?) 자기를 그 여러 신들 중의 한 신인 것처럼 종교적으로 표현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종종 표적을 보이셔야만 했고 성전과 제사 및 제사장이라는 종교적 수단을 통하여 그 백성들과 교통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유대인은 왜 표적을 구하는가? 그들은 왜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표적을 행해보라고 말했는가? 그것은 그들이 영적이지 않고 육신적이기 때문이다. 영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정신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고, 육신적이라는 것은 불신앙적이며 정욕적이며 하나님보다 자기 육신의 욕구에 관심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람 곧 육신적인 사람의 중요한 특징은 육신적인 삶의 만족, 그런 삶의 확장과 충만을 위해 끊임없이 '능력을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을 확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신적(神的) 능력을 추구하는 것이다. 신비적이고 이적(異蹟)적인 현상을 항상 도모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표적과 신비적인 은사를 좋아한다. 이들은 표적을 행하는 사람과 그런 표적을 나타낼 수 있는 신비적인 은사를 소유한 사람은 무조건 하나님께 속한 자로 간주하고 반대로 그런 것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나 자기들 보기에 그런 것이 충분치 않은 사람은 무조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은사를 소유하고 표적을 행하는 그 사람의 인격이 어떠하냐 하는 것은 보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마음과 정신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기들의 현재 육신적 이익과 육신적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언제든지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표적만 있으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유대인들은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믿을 수 있었는가?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4-27)

유대인들은 주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서도 그를 믿지 못했으며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주님의 명백한 인격과 삶 곧 주님이 가르치시는 진리의 말씀과 그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고서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그가 자신들과 이방인들을 구원하고 심판하러 오신 메시아인지 어떤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주님의 많은 가르침과 표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다가 주님께 더 크고 많은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내 양이 아니므로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표적이 부족해서 못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신 자가 아니기 때문에 못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표적을 보고 감각적으로 하나님을 느낌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그것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5-27)

주님은 계속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을 악하고 음란하다고 하셨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12:38-42)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12:43-45)

여기서 주님은 작은 표적만 가지고서도 회개를 한 앗수르의 니느웨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표적이 적어서 하나님을 못 믿겠다고 말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정죄하셨다. 이런 사람들은 비종교적인 사람들보다 더 마음이 강퍅하고 교만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하나님의 은혜에는 끄덕도 않는 사람들이어서 하나님의 큰 은혜에도 불구하고 결국 표적을 별로 보지 못하고 단지 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믿게 되는 이방인들보다 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마16:1-4)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16:5-12)

주님의 제자들조차 표적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표적은 말씀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말씀을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표적은 말씀 전하는 자를 신뢰하고 믿게 만드는 보조적인 효과를 가지는 것이다. 광야의 만나는 그 백성을 궁극적으로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더 큰 손길을 믿게 하기 위한 보조적인 손길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병이어의 표적을 베푸신 것은 주님이 증거하시는 바 진리의 말씀을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한 보조적인 역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누룩 이야기만 나와도 떡 생각만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떡 이야기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주님을 깊이 따른다는 제자들조차 누룩 이야기가 나오니까 바로 떡을 연상할 정도였다면 보통의 유대인들이 말씀과 계시보다 표적과 능력을 더 추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참으로 주신 유일한 표적과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를 청종하고 그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아무 것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떡도 병 고침도 그리스도 안에서 나왔고 홍해의 갈라짐과 만나, 반석의 물,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왔으며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참으로 표적을 보고 싶은 사람은 그리스도께로 가야 한다.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표적이다. 그는 인간의 완전한 회복의 표적이다. 이전에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람으로서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양식을 삼았으며 그것으로 그의 생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으로 삼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아버지의 기쁨과 영광이 곧 자기의 기쁨과 영광이었다. 그는 가장 가난하고 가장 작은 자였지만 가장 부유하고 가장 큰 자였다. 그는 항상 많은 사람들을 용납하고 먹이며 사랑했으며 말씀과 삶으로 큰 권세를 나타내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터무니없이 멸시와 천대를 받았지만 언제나 평안했고 영광스러웠다. 그는 온 세상으로부터 거리낌과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서 온 세상의 주가 되어 만물을 다스리는 자리에 앉았다. 이것이 바로 표적이다. 그런 사람이 또 어디 있는가? 이 표적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표적을 구하는 사람은 이 표적을 보아야 한다.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 그에게서 무궁한 권세와 무궁한 능력이 나왔다. 그것은 그의 생명 자체에서 나온 권세와 능력이었다. 이것은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고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죽음으로써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