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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지혜 / 고전1:22-25, 2:6-16

2010.05.01 11:19

이상봉 조회 수:6848

16.헬라인은 지혜를 구함

유대인들은 특히 표적과 능력을 구했지만 헬라인들은 그들과 달리 특히 지혜를 찾았다. 지혜를 찾는다는 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있는가, 인생의 바른 길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인생을 잘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찾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이성이 있으므로 (타락하고 모순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렇든지 아니면 단지 따분하고 지겨워서 그렇든지)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언제나 영원하고 완전한 삶을 찾는 경향이 있다. 헬라인들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총명하여 이성의 날개를 잘 펼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대인들이 다소 감각적이고 현실적인데 비해 다분히 이성(理性)적이고 이상(理想)적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매우 철학적이 되었다.

여기서 철학적이라는 것은 지식을 사랑하고 지식 자체를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들도 처음에는 지식과 지혜를 진리에 이르는 수단으로 추구했다. 그러나 결국은 지식 자체를 즐기며 끝없이 지식과 지혜를 구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일이 되었다. 그렇게 된 것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써는 궁극적인 진리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과 경험을 사용하여 사색하고 판단하는 것만으로는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진리에 이를 수 없었다. 진리에 이르지 못하면 진리에 이를 때까지 새로운 지식과 지혜를 계속 추구해야 하고 그렇게 하다보면 진리를 발견하여 그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 안되어도 '무엇인가 계속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것'즉 '지혜를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마치 인간의 진실한 자리요 목적인 것처럼 되어 버리는 것이다.

유대인들과 같이 특별히 종교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주로 표적을 구한다. 표적을 구하는 것은 신적 능력을 힘입음으로써 인간 자아를 높이고 확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헬라인들과 같이 지식적이고 철학적인 사람들은 주로 지혜를 구한다. 이처럼 지혜를 구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 곧 지각 활동을 통해 인간의 고상함과 존엄성을 나타내려는 것이며, 신의 능력과 같은 외부적 도움 없이 인간 자신의 끊임없는 정신 활동을 통해서 인간 영역을 확대하고 완전한 삶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유대인들만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며 마찬가지로 헬라인들만 지혜를 구하고 유대인들은 그것을 추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이 지혜를 찾는다는 것은 큰 특징을 말한 것이고 양자 다 표적과 지혜를 구했다. 유대인들도 지성인들은 지혜와 지식을 끊임없이 추구했고 헬라인들 역시 신을 추구하며 신적 능력을 힘입어 자기들의 삶의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했다.

결국 모든 인간은 항상 이런 저런 인간적 수단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영원하고 완전한 자리에 이르려고 노력해 온 것이다. 철학적인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 세계를 계발함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신의 자리에 이르려고 한 것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은 신의 도움을 받아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신의 자리에 이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다 타락한 인간의 헛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의 노력을 부질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탐욕과 음란한 마음에 부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그들이 원하는 표적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노력이 부질없게 되었고,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로는 진리를 도저히 찾을 수 없도록 감추어 버리셨기 때문에 그들의 노력이 부질없게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혀 표적을 보여주지 않으셨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누릴 수 있도록 명확한 표적을 제시하셨다. 그 표적은 무엇이며 어디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표적은 바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안에 감추어져 있다. 사람들이 그렇게 추구하던 놀라운 역사가 그 안에 감추어져 있었다.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자기의 모든 육체적 한계를 벗어버리고 신기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즉 사람이 신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목표이고 표적과 능력을 추구하는 자들의 궁극적 소망이다. 그런데 그 모든 노력은 다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게 성취된 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이 사람 된 분이며 또한 사람이 하나님 된 분이었다. 사람이, 더구나 그렇게도 낮고 초라한 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로 충만케 되었으며 어떻게 모든 고난과 멸시와 죽음을 이기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자가 되었는가? 이것이야말로 표적 중의 표적이며 기적 중의 기적이다. 능력은 바로 이 분 안에 드러났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소망하던 바 '사람이 신이 된' 실제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표적과 능력이신 그리스도는 밭에 감추인 보화처럼 감추어져 있었다. 그 표적은 전혀 대단하지도 신기하지도 주목할 만하지도 않게 보이는 한 초라한 사람 안에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가장 명확한 표적을 보지 못했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는 그들에게는 단지 보기 싫은 자요 거리끼는 사건일 뿐이었다.

또한 지혜는 어디 있는가? 사람들이 그토록 찾는 인생의 길과 진리와 생명은 어디 있는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 주님은 어릴 때부터 지혜로운 분이었다.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 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눅2:42-47)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마13:53,54)  

어디서 이런 지혜가 났는가? 그리스도의 놀랍고 완전한 지혜는 배워서 된 것도 아니고 밖에서 온 것도 아니고 오직 그의 생명 안에서 온 것이다. 그 생명이 곧 최고의 완전한 지혜였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눅7:35)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11:19) 여기서 지혜는 주님 자신을 가리킨다. 그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언제나 지혜롭다고 인정되었으며 옳은 사람들에게 옳은 분으로 인정되었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이 곧 지혜였기 때문이다. 그의 인격과 생명 안에 지혜와 의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항상 지혜롭고 옳았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신 길과 진리가 명확하게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가야 할 길로는 가지 않고 가지 말아야 할 길로 가는 이유는 그 생명 안에 그것이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길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그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고 본성의 문제이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이 갈 수 없는 길로는 가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생명 안에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의 길과 진리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 된 것이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매우 지혜롭다. 그것은 물 속에서 사는 법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배워서 안 것이 아니고 연구해서 안 것도 아니다. 그는 지식도 없고 지혜도 추구하지 않았지만 생명이 물 속에서 살도록 지어진 물고기 생명이기 때문에 저절로 지식이 풍부하고 지혜롭게 된 것이다. 생명 안에 지식과 지혜가 있다. 완전하고 영구한 지혜는 오직 생명 안에 있다. 아들의 생명이 곧 우리의 완전한 지혜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혜로우심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는 자기가 만나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머리를 굴리지 않았다. 전혀 그것을 모면하거나 반전할 수 있는 지혜라는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는 어떤 일에서도 잔꾀를 부리지 않고 오직 자기 생명대로 자기 인격대로 행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며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는 바보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일의 궁극적인 끝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에게 속한 자 곧 빛과 진리에 속한 자이므로 어두움에 속한 세상이 자기를 도저히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세상으로부터의 핍박은 당연히 예정된 것이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요15:18-21)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눅11:49)  

그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을 보아도 분명하고 하나님을 보아도 분명한 것이었다. 세상은 미워서 자기를 못박을 것이고 하나님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를 세상의 무법한 자들의 손에 내어 주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끝을 내다 보셨다. 핍박의 끝은 주님의 멸망으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세상의 심판과 아들에게 붙여진 자들의 구원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므로 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에게 있어서는 고난과 위험과 핍박이 왔을 때 피하고 모면하며 대항하는 것이 지혜가 아니라 달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지혜였다. 그리고 주님은 억지로 생각 끝에 이것을 선택하여 지혜롭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생명 안에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가라고 하신 길을 항거할 수 없는 순종의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히 순종하는 양처럼 자연스럽게 그렇게 한 것이다. 그는 참으로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는 생명이었다. 이것이 바로 생명 안에 지혜가 새겨져 있는 사람인 것이다.

최후에 승리하고 성공하는 것이 지혜이지 중간에는 이기다가 끝에는 져버리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마라톤 하는 사람들을 보면 처음에 일등으로 달려나가지 않고 중간이나 선두 근처에 머물다가 다른 사람들 힘 다 빠졌을 때 비축해 둔 힘을 발휘하여 마지막에 일등으로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닥치는 어려운 일들과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다 지혜를 발휘하여 물리치고 처리하려면 도저히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지혜와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일들이 사실상 우리가 비켜갈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을 주장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며 그분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최고의 지혜로 행하는 것이다.  

물론 근본적으로 주님의 길이 지혜로웠다는 것 말고도 주님에게는 어려운 상황에서 그때 그때 잘 대처할 수 있는 소위 일반적인 지혜도 충만했다. 그는 유대인들의 까다롭고 교묘한 시험들을 지혜로 다 물리치셨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린 것이 옳으니이까....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19:3)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 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마22:17-22)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 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마22:23-3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8:3-9)

주님은 제자들에게도 이 지혜를 주셨다.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21:15) 어떻게 이 지혜를 주셨는가? 제자들에게 지혜로워질 수 있는 어떤 훈련이나 공부를 시켰는가? 뇌 수술을 해주었는가? 그것이 아니라 다만 그의 생명을 불어 넣어주었다.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따르며 그를 사랑하는 가운데서 제자들은 그를 자기 생명으로 취할 수 있었다. 그의 영을 받을 때 그들은 결정적으로 주님의 생명을 취할 수 있었다. 주님은 이것을 상징적으로 이렇게 표현하였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20:21,22)

이것은 제자들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부어질 때 우리에게는 참 지혜가 충만해진다.  

하나님의 계시 없이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진리(참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은 결국 지적 만족을 추구하는 것 외에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다. 하나님과 그 진리는 사람보다 크고 또한 하나님에 의해 의도적으로 감추어졌기 때문에 인간의 지적 활동의 결과로서는 절대로 발견되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는 세상 지혜로 볼 때는 너무도 미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오직 참 지혜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곧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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