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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할 수 없는 구원 / 고전1:26-29

2010.05.01 11:20

이상봉 조회 수:7128

17.하나님의 부르심

십자가의 구원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라는 말을 한 후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특성에 대해 언급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을 언급한 이유는 고린도교회 신자들 간에 있었던 다툼과 분열 때문이다. 무릇 모든 다툼과 분열은 내가 남보다 낫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남이 나보다 낫고 남이 나보다 잘했다고 생각하면 다툴 필요가 없다. 오직 내가 남보다 낫고 남보다 잘했고 상대가 나보다 못하고 잘못했다고 생각하는데서 모든 다툼이 일어나고 분열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다툼과 분열은 세상의 다툼과는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세상 다툼은 시비를 가려야 한다. 누가 더 옳고 바르냐 하는 것을 가려서 옳고 나은 쪽의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믿는 자 간에 일어나는 다툼은 시비를 가려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복음 안에는 도덕적 윤리적 우월성과 합리성이 가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는 정신이 가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누가 더 겸손하고 은혜를 은혜로 받느냐 하는 것이 가치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제일 잘 하는 사람, 곧 기독교 복음의 의미를 제일 잘 이해하고 그 정신에 제일 합당하게 행하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잘난 것이 있어도 자랑하지 않고 못난 것이 있어도 비굴하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며 겸손히 은혜를 더욱 사모하는 사람, 다른 사람 잘난 것을 보고도 시기하거나 부러워하지 않고 또한 다른 사람 못난 것을 보고도 비판하거나 멸시하거나 우월감을 갖지 않고 오직 내나 다른 형제들이 지금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잘난 것이든 못난 것이든 감사히 받아 가지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은혜로 말미암았으므로 더욱 은혜를 사모하고 더 좋은 것을 사모하자고 생각하며 아무하고도 가진 것을 비교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 교회에서 제일 온전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세상에서 잘난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로 좋은 일 많이 하게 하고 그것으로 자기 자랑을 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세상에서 못난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의 실패와 모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하게 하고 하나님 자랑, 은혜 자랑 많이 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 너희들이 주로 어떤 사람들인지 살펴보라고 말한 것이다.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 교회에 얼마나 앉아 있느냐 이것이다. 바울은 세 가지를 말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보다 지혜가 더 있느냐? 너희가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한 사람이냐? 너희가 다른 사람들보다 문벌이 좋으냐? 이 모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은혜를 베푸셨다. 그러나 받는 사람들 중 잘난 사람들은 다 바쁘다 시시하다 하면서 복음을 거부하고 오직 곤고한 사람들만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교회에 비교적 가난하고 곤고한 사람들이 많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지혜 없는 사람들이 많이 구원받은 것은 구조적인 복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부유하고 능력 있고 지혜로운 사람들 곧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셨다면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이점에서 하나님의 의도가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억지로라도 유능한 사람들을 교회로 많이 부르시지 않은 것은 그들이 육체로 헛되이 자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만들까 우려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그 잘난 육체적 우월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과 하나님의 참 능력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고 실패하게 될 것을 우려하셔서 사람들 부르실 때 잘난 사람을 많이 부르시지 않으며 또한 잘난 사람을 부르신다 할지라도 그들을 쳐서 하나 정도 부숴놓고 난 다음에 부르신다.
모세를 보라. 왕자였던 팔팔한 40살 때는 불러 쓰시지 않고 광야에서 목동이 되어 다 늙어버린 80살이 되어서야 불러 쓰셨다. 모세는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자기가 자격과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요구에 응할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므로 그는 나중에 자기가 행한 모든 일을 자기가 했다고 절대로 자랑할 수 없었다.

수십만 미디안 군대를 쳐부순 기드온의 군대는 겨우 300명이었다. 그들이 한 일은 횃불을 들고 옹기를 깨뜨리며 나팔을 분 것뿐이었다. 사실 미디안은 기드온 군대가 쳐부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쳐부수었다. 하나님은 처음에 수만 명이 왔지만 다 돌려보내시고 만 명만 남기셨다. 그러나 그것도 많다고 돌려보내시고 오직 300명만 남기셨다.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해내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사들의 면모를 보면 이것은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왼손잡이 에훗, 소 몰던 목동 삼갈, 여자 선지자 드보라, 적이 겁나서 포도주 틀에서 몰래 밀을 까던 겁장이 기드온, 아들을 30명이나 두고 각 아들들에게 나귀를 태우고 성을 하나씩 지어준 졸부 야일, 기생의 아들 입다, 아들 30명과 딸 30명을 모두 이방인과 결혼시킨 입산, 아들 40명과 손자 30명에게 모두 나귀를 태운 압돈, 적국 여자와 연애에 빠진데다가 몇 번을 속고도 끝까지 그 여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하여 마지막에는 눈까지 뽑히고 연자 맷돌을 갈다가 죽은 유명한 삼손, 이 모든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친히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밖에는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신앙을 소유하는 것, 성령으로 말미암아 선한 여러 가지 열매를 맺은 것이 우리 소유이고 우리 안에서 나온 것이며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이다. 그것이 모든 것을 이루어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기에나 합당한 자였을 뿐이다. 이점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자랑하는 사람은 아직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우리의 세계는 전적으로 은혜의 세계이다. 은혜와 긍휼과 용납의 정신이 복음의 핵심이다. 우리는 범사에 이런 정신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 사람을 대할 때도 일을 할 때도 언제나 은혜를 생각하고 긍휼과 자비의 정신으로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정신으로 사는 세계이다. 이것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말한 핵심이다.

베드로가 주님께 자기에게 잘못을 범하는 형제를 몇 번이나 참아주고 용서해주어야 하는가를 물었다.(마18:21-35) 그는 7번 정도 용서하면 많이 한 것인데 그 정도 할까요 라고 물었다. 여러분 같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할 것 같은가? 주님의 답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였다. 이 말의 의미는 '베드로 네가 하나님과 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용서받고 싶은 만큼 남을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한 비유를 들었다. 왕에게 일만 달란트 빚지고 탕감 받은 자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다가 도로 왕에게 구속된 사람의 비유였다. 자기 죄의 심각함, 자기의 절망적인 심판과 멸망을 모르는 자는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신경을 쓰고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 재판장처럼 나서기를 좋아한다. 자기는 성적표가 꼴찌로 나온 사람이, 그래서 아버지에게 걸리기만 박살날 사람이 동생이 지난 달에 1등 하다가 이번 달에 10등으로 떨어진 것을 아버지께 일어바칠 기회만 찾고 있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자랑이 어디서 나오는가? 누가 자랑을 할 수 있는가? 남의 허물과 과실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누구인가? 나는 요즘 날이 갈수록 나 자신의 형편없음을 절망적으로 느낀다. 날이 갈수록 인간의 죄의 끝이 어디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된 지 오래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죄에 대해서 내 죄든지 다른 사람의 죄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그 생명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화도 나고 답답하지만 그래도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들지 않는다. 내 안에서 밤낮 그런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뜻을 다루다 보니 옳고 그른 것을 누구보다도 잘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누구를 정죄하고 비판하고 심판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나는 내 코가 석자나 되기 때문에 그런 자격이 없다. 오직 형제들이 은혜 안에서 은혜의 정신으로 서로를 용납하고 다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더 사모하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교회 안에서 어떤 합당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죄인들을 모아놓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그런 일들이 없어져야 하는데 왜 계속 그런 일이 존재하느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죄인 된 것이 금방 된 것이 아니라 묵은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성령 안에서 처리되는 것도 금방 되지 않고 오래 걸린다고 말하고 싶다.

어떤 교회든 앞에서 달려가는 사람들이 아무리 계속 달려가도 새로운 사람들, 곧 오래 묵은 생짜배기 죄인들이 계속 들어오기 때문에 앞으로도 교회 안에는 우습지도 않은 일들이 계속 벌어질 것이다. 잘못된 여러 일들을 우리가 잘했다고 인정할 수는 없으나 사랑과 오래 참음으로 용납하는 것, 곧 성령의 정신, 은혜와 긍휼의 정신으로 사람들을 대해 나간다면 결국 모든 문제는 성령의 능력으로 해결될 것이다. 내가 우리 교회에서 기대하는 것은 우리 교회 안에서 여러 골치 아픈 문제들이나 모순이 몽땅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불가능하지 싶다) 형제들이 그런 일들을 사랑 안에서 용납하고 성령으로 은혜의 정신으로 대응하여 그런 문제들이 문제가 되고 서로에게 시험이 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가 평안과 안식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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