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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신 그리스도

오늘날 기독교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이 세계의 큰 문제 중 하나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내용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교이며,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를 알고 경험하는 것을 그 목표와 내용으로 한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는 너무 복잡하다. 이렇게 된 것은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의 목표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을 구성한다고 생각되는 요소가 너무 많고 다양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기독교는 어떻게 보면 세상의 모든 종교적 요소들을 다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기독교는 종교 뿐 아니라 도덕, 철학, 문화 등을 다 포괄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 마디로 기독교라고 하지만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실체를 간단히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단순하시지만 기독교는 너무 복잡하다.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말하셨으며 그 분만 추구하셨지만 기독교는 너무 많은 것에 대해 말하며 너무 많은 것을 추구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반드시 깊이 알고 깊이 경험하며 항상 간절히 추구하기를 원하시는 유일한 목표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뿐이다.

기독교가 복잡하게 된 요인 중 하나는 교회에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각 사람들의 자연인으로서의 자질과 개성이 다르고 영적 은사도 다르므로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서로 다른 모양을 나타내며 서로 다른 관심사와 가치들을 주장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으므로 기독교(교회)가 다양하고 복잡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교회 생활(기독교 생활)은 매우 단순하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부득이하여 여러 가지를 추구하고 여러 가지 모양을 나타낼 수도 있다. 그러나 지엽적으로는 그렇다 해도 전체적인 모습에 있어서는 (세상을 대해서나 우리 자신을 대해서나) 적어도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받아들여서 누리는 것이 유일한 교회 생활의 내용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다양한 사람들을 부르신 것은 다양한 사람들로 하나님의 영광을 다양하고 풍성하게 나타내게 하기 위한 것이지 기독교를 복잡하고 혼잡스럽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된 생명을 이어받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로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하여 그리스도 생명의 축복과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적, 육신적 복을 얻을 수도 있다. 건강과 재물과 만사형통의 복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여러 가지 신령한 은혜와 은사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어떤 비영적인 축복을 누리거나 혹은 영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자신은 아닌 비인격적 능력과 현상을 누림으로써 만족하게 하는 데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 자신을 알고 누리는 데 있다. 그 길은 그리스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온 세상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 놓이게 되고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가득 차며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을 받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만물은 본래 이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고 우리의 구속 역시 이 목적을 위해 이루어졌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1:9,10)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1:16-20)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3:11)

장차 그리스도가 만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리스도는 만유이시고 만유 안에 계신다. 그러나 지금 많은 신자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처음에 예수를 믿을 때 대개 죄 사함과 삶의 구원을 기대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여러 가지 축복을 받으며 은혜의 체험을 하며 은사도 받아 누리게 된다. 그럴 때 그들은 기뻐하지만 얼마 안 가서 이런 은혜의 체험들이 자신의 모든 필요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또 다른 축복과 은혜, 영적 은사를 구하게 된다. 어제는 그것이 필요하여 그것을 구하고 오늘은 이것이 필요하여 이것을 구하는 생활이 반복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구하지만 우리의 필요는 완전히 채워지지 못한다. 더구나 그런 기도들이 속 시원하게 응답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것은 근본적인 무엇이 잘못된 데서 나온 현상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신령한 그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받아서 완전하고 근본적인 만족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과정이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이런 저런 필요를 채워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필요 자체로 오신 분이다. 그리스도만 있으면 다른 것은 다 필요 없고 완전히 만족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 그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최고, 최종 목적이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

그리스도가 만유시요 또 만유 안에 계심을 확실히 알고 있는가? 하나님의 목적은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이 으뜸이 되시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그의 영원하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그 아들에게서 만물이 나게 하시고 또한 나온 만물들을 그리스도에 맡기시며 다스림을 받게 하셨다. 여기서 만물이라고 하면 복잡하므로 단순하게 사람만 이야기하자.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지음 받았다. 그 목적은 영원하신 아들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본받아 만드셨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갖다 놓였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포함시키신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0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은사를 따로 따로 준비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지혜라는 선물, 의로움이라는 선물, 거룩함이라는 선물, 구속이라는 선물을 따로 준비하여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요 의요 거룩함이요 구속함이 되게 하셔서 그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넣어 도매로 처리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의 눈에는 오직 그 영원하신 아들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뿐 아니라 모든 것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주실 때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 저것을 구해도 하나님은 더 주실 것이 없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여러 가지 하나님의 은사와 선물이 더 충만하게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아는 것이다.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 종종 느끼는 이상한 현상 중 하나는 거룩한 삶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사람이 점점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거룩하지 않은 사람처럼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가 처음 신앙 생활을 시작할 때는 제법 좋은 모양을 나타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런 좋은 모양들은 사라지고 도리어 상당히 원색적이고 거친 모습이 우리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전에는 좀 잘해 보려고 애를 썼고 그것이 제법 그럴듯한 결과를 나타냈는데 지금은 그것이 더 안된다는 것이다. 좀 참으려고 애를 쓰고 좀 겸손하려고 애를 쓰며 지혜롭게 생각하려고 애를 쓰지만 처음보다 도리어 지금이 더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아보려고 애쓰는 노력이 무색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해 봐야 소용없음을 알게 하시려고 그것을 막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어떤 일에 자포자기하게 된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일이 되는 쪽이 아니라 안 되는 쪽으로 인도하신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이런 저런 능력을 자기 안에 축적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오직 만유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를 더 알고 더 바라보게 하도록 만드시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믿는 것대로 따로 하고 영적 능력들을 우리 안에 축적하는 것은 그것대로 따로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여러 가지 노력에서 해방시켜서 오직 아들의 생명 안에 거하는 일만 하도록 인도하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새롭고 영원한 건축을 하고자 하신다면 먼저 우리 안에서 허물기부터 하셔야 한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보다는 유능한 사람이 되고 싶다든지 착하고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든지 거룩한 사람이 되고 싶다든지 하는 욕망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충만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시기를 의도하시는 궁극적인 목적과 내용이 될 수는 없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목적인 그리스도 안에서 파생되는 결과요 산물일 따름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두시는 것이며 그가 우리 생명이 되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수년동안 경건한 삶과 능력을 그렇게 찾아 헤매었지만 그것을 얻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죄와 무능에서 떠나 신령하고 능력 있는 것을 찾아 헤매었는가! 우리는 자만과 자존심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겸손을 모방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가!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본받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와 헛고생의 반복 가운데서 우리에게 한 가지를 확신시키셨다. 그것은 곧 우리가 고상하게 수고하여 얻으려고 하는 모든 영적 가치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하고 완전한 생명의 능력을 상실하고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전에 천성적으로 혹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 획득하고 소유하고 있던 좋은 성품과 능력들은 우리가 영의 세계로 들어온 후에도 기능을 발휘하여 우리로 영적 가치들을 추구하게 만들며 또 그런 대로 그런 가치들을 얻게 우리 안에 축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우리가 그 동안 축적해 놓았던 모든 것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하신다. 마침내 우리를 제법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던 여러 요소들, 우리를 우쭐하게 만들던 상당한 공로와 외모가 다 사라지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다. 그런데 소유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이 너무도 뿌리깊기 때문에 그것을 분쇄하고 무너뜨리려는 하나님의 작업도 우리 평생에 계속 되는 것이다.

여러분 가운데는 특별하게 인내가 있는 분도 있고 대단히 양심적인 분도 있으며 특별한 사랑과 친절을 소유한 분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활 속에는 하나님께서 그토록 여러분 안에서 발견하기를 원하시는 어떤 것은 여전히 잘 발견되지 않는 것 같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찾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 자질과 장점이나 그 결과로 나온 우리의 공로와 업적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찾으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그렇게 심고자 하셨으며 지금 그렇게 애타게 찾으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이다.

한 형제는 이런 간증을 하였다. 어떤 형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를 방문하여 동정을 보이고 위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형제를 만나러 나갔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이상하게 몸이 피곤해졌고 그와 만나서 대화를 하는데도 마음이 답답하고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형제를 위로하는 일을 하는데 왜 괜찮던 몸이 갑자기 그렇게 피곤하고 지치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았지만 뚜렷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순간적으로 자기 환경에는 특별한 문제는 없지만 자기의 영적 생활에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문제는 바로 자신이 종종 성령의 인도에 깊이 주의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자기 생각에 옳다고 생각되면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즉 이번 일에 있어서도 형제를 방문하겠다는 고상한 생각을 했지만 그 생각의 고안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수행하려고 분주하게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정신을 따라 친절하고 자비로운 형제가 되려고 노력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를 돕던 지원을 철회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닮았다는 모습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다만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스스로 그 사람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영광을 보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자 하시며, 우리 육신적 생명의 능력을 보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생명의 능력을 보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궁극적인 필요는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일이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임을 볼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에 방해가 되는 우리 자신의 모든 헛된 노력들을 내려놓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런 것들을 대항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마땅히 나타나야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역사하셔야 할 자리에 우리 자신에게 속한 것들이 대신 들어서서 힘을 쓰고 역사를 하게 될 때 마땅히 반응을 보여야 한다. 그때 우리가 보일 반응은 그런 것들을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위험하게 생각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죽은 행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죽은 행실을 미워하시며 그런 것들에서 스스로 돌아서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 되신다. 그는 만유이시고 만유 안에 계신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과 구속이 되셨고 지금도 그렇다. 그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이 따로 있고 진리가 그리스도밖에 따로 있고 생명이 따로 은사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그 모든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기독(그리스도)교이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되지 않으면 기독교는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오직 그를 알고 그를 완전히 누리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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