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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신 그리스도


1.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거룩함이다.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거룩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명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 거룩한 생명이 아니라 죄의 생명이요 사망의 생명이다. 거룩한 삶은 오직 거룩한 생명에서만 나온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을 원하는 것과 거룩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며 생명 없이 원함만 있는 상태에서는 영원히 거룩하게 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를 거룩한 자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거룩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곧 거룩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 거하면 곧 거룩 안에 거하는 것이며 거룩한 삶 외에는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환경에 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거룩하게 되기 위해 여러 가지 좋은 노력을 기울이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한다. 즉 거룩한 삶을 머리 속에 그리며 거룩한 성품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거룩한 사람들의 행실과 가르침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 마땅한 노력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을 기울여도 성과는 그다지 좋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더 철저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이며 그분이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며 모든 것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착하고 의롭고 사랑이 많으며 깨끗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 모든 거룩한 삶에 대한 열망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가 우리로 범죄케 한 더러운 마귀를 이기고 몰아내셨으며, 범죄한 우리를 십자가에서 처리하셨으며, 하나님께 대해 죽은 우리를 제거하고 하나님께 대해 살아 있는 새 사람(새 영)을 우리 안에 창조하셨다. 이것을 알고 믿으며 바라보는 것이 거룩한 삶의 비결이다.

거룩하게 되고자 하는 열망 자체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의롭고 거룩하고 진실한 삶의 열망을 불러일으킨 것이지, 그것은 결코 우리 자아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세상 윤리와 도덕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거룩한 삶을 실제로 사는 것과 거룩한 삶을 단지 간절히 추구하는 것이 다른 것인 것처럼, 거룩한 삶을 추구하고 열망하는 것과 단지 거룩한 삶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세상의 수준은 단지 거룩한 삶일 더 좋은 것이고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는 정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는 일어나는 거룩에 대한 열망은 그 이상의 것이다. 이런 열망이 있다는 것은 우리 안에 벌써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룩을 추구하는 것보다 먼저 거룩한 생명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바라보고 그를 의지하며 그를 사랑하는 것을 먼저 해야 한다.

거룩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밖에서 따로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곧 우리의 의와 거룩함이다. 사랑과 자비가 부족한 사람, 겸손과 인내가 부족한 사람, 거룩함과 진실함이 부족한 사람, 죄를 이길 힘이 필요한 사람, 지혜와 총명,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 이 모두가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오직 그 분 안에 거해야 한다. 새(鳥)로 태어나면 다 날 수 있고 물고기로 태어나면 다 헤엄칠 수 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피조물로 조성되면 다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의도는 분명히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의롭고 거룩하고 지혜로워서 이 땅 위에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 영광의 위치에로의 회복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서 있음으로써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2.그리스도가 바로 길이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자기를 이렇게 증거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리스도는 단지 우리에게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길을 알려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자체가 길이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로 오시는 길이나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주님의 인격이 바로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서는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다. 우리에게 있어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요 그리스도만이 하늘이며 그리스도만이 영적 세계의 전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추구하기보다는 그의 도움을 받아서 길과 진리와 생명과 빛, 지혜, 거룩함 등의 여러 기독교적 가치들을 얻기를 더 추구한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써 낙심하고 있다. 그들은 범죄에서 벗어나 승리의 삶을 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해 보아도 안되고 저렇게 해 보아도 승리의 길을 찾지 못한다. 그들이 오랫동안 길을 찾는데도 그것에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참되고 유일한 길이신 주 예수님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이외에 승리할 수 있는 어떤 다른 방법을 찾아 애쓰는 한 실패는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두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생각해 보자. 한 사람은 자기는 전혀 승리할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이다. 그는 주님께서 자기 안에서 모든 것을 친히 이루어 주시도록 맡기고 기도한다. 그 결과 그는 놀라운 변화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체험한다. 또 다른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앞의 사람으로부터 간증을 듣고 그와 똑같이 행동해 보았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이 두 사람 안에서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주님을 의지했느냐 아니면 방법을 의지했느냐의 차이이다. 처음 사람은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범사에 그를 의지했다. 그러나 둘째 사람은 영적 삶의 요령과 방법을 익혀서 모든 것을 공식대로 하려고 했을 뿐 주님과 접촉하고 그를 의지하지는 않았다. 요령과 공식은 자연 세계에서는 통하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사람은 본래 하늘을 날 수 없지만 새가 하늘을 나는 원리를 연구한 끝에 지금은 그 원리를 터득하여 사람도 비행기를 만들어서 하늘을 날고 있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는 아무리 신령한 원리를 연구하고 승리한 사람의 모양을 그대로 흉내낸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결코 승리자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다른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다 할지라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영적 세계이다.

유명한 전도자나 설교가가 나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면 사람들은 자기도 그와 같이 되고 싶어서 그를 모방하기 시작한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조용기 목사님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전도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목사님들이 그를 흉내내어 설교를 했다. 내용은 물론 그의 악센트까지 모방했기 때문에 얼른 들으면 마치 조용기 목사님이 설교하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해도 그들은 조용기 목사가 될 수 없었고 조용기 목사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왜 그런가? 조용기 목사님과 다른 목사님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방법의 차이가 아니라 경험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조용기 목사님이 그리스도를 경험한 것과 그를 흉내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경험한 것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뛰어난 영적 인물들의 사상과 신학을 익히고 설교를 똑 같이 따라 해 보고 행동과 외모를 같이 해 보지만 그런 위대한 사람이 안되는 것은 그들이 잘못된 방법을 사용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무릇 모든 승리자들은 자기 힘과 방법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그의 생명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그를 모방하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그와 같이 의지하거나 그의 은혜를 그와 같이 사모하지는 않고 단지 그의 행위와 외모만 공부하여 그것을 본뜨기에 바빴기 때문에 승리자가 안되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설교를 듣고 성경을 공부하기도 하고 기도도 하지만 삶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이 방법과 요령에만 주목할 뿐 주님 자신을 간절하게 찾고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영생 복락을 찾는 사람, 천국을 찾는 사람은 많다. 평안과 안식을 찾는 사람도 많다. 거룩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만유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를 의지하며 그를 자기 생명과 목적으로 삼고 그를 간절히 찾는 사람은 적다.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가 자기 인생의 전면에 나와서 모든 일을 하시도록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겠다고 하는 것, 자기 노력으로 선한 일을 하고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의 뜻이 거기 있지 않게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많은 신자들이 훌륭한 다른 신앙인들의 생활을 주목하고 그들에게서 승리의 방법과 요령을 터득하여 자기도 그들처럼 되려고 해 보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은 그들이 기독교란 외모가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 생명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자기 힘으로 선한 일을 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사람들 안에서 단지 선한 일이 이루어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만물)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 왕 노릇하고 생명과 능력이 되는데 있기 때문이다.


3.그리스도가 바로 진리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라고 하면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 혹은 객관적인 그 어떤 삶의 원리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진리는 그리스도 밖의 어떤 철학적 원리나 그리스도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다. "나는 진리요..."(요14:6)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께 하리라"(요8:3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진리이다. 그는 만물의 근원이요 만물의 길을 정하신 이요 만물이 돌아갈 자리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 만물의 진리가 있다. 그 안에 있을 때 만물은 진정한 자유와 안식과 만족을 얻게 된다. 기독교는 잡다한 세상 상식과 세상의 물리적 이치로 진리의 내용을 삼지 않는다. 영원하고 참된 진리, 우리가 진정 진리의 내용으로 삼는 것은 오직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만물의 모든 이치가 그 안에 서 있으며 만물이 돌아갈 자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뿐이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을 받은 주님께서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답하시자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요18:37,38) 이에 주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진리였으므로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진리를 앞에 앉혀놓고 그에게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가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직접 따르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언행을 연구한다. 그의 말을 연구하고 그의 사상과 사역을 공부하며 그의 행동의 특성을 연구한다. 이것은 곧 신학을 하고 기독교를 연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모방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이어간 사람들은 다 자기를 부인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맡기고 그의 생명의 인도대로 따라갔던 사람들뿐이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그에게 대해 연구만 많이 한 사람들이 한 일은 기독교 진리를 혼잡스럽게 한 것뿐이다.


4.그리스도가 곧 생명이다.

생명과 행위는 다르다. 생명은 행위로 나타나지만 그렇다고 행위가 생명을 대신하거나 생명이 이렇다는 것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생명은 틀렸지만 행위는 (비록 일시적이나마) 옳은 것처럼 나타날 수 있다.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닮거나 기독교적 가치를 따라 좋은 삶을 살아 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리스도의 그런 거룩한 생명이 자기 안에서 자유롭게 역사하도록 그를 믿는 일에는 별로 힘을 쓰지 않는다. 만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역사하기만 한다면 승리의 삶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서도 가능할 것이다. 승리하는 삶은 생명과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생명과 능력이 주님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바로 우리의 생명이요 능력이시므로 그를 의지하기만 하면 생명과 능력이 우리 안에서 왕성하게 역사한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고 능력있는 자처럼 되려고 억지로 애쓰지 않더라도 그리스도가 우리 생명과 능력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절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만든다. 눈은 뜨기만 하면 저절로 보는 것이요 귀는 열면 들리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신자답게 살기 위해서 과도한 육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그가 병들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병의 내용은 노력 부족이 아니라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않는 불신앙이다. 말로는 주님을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않기 때문에 생명과 능력이 없는 것이다.


5.그리스도가 바로 부활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요11:25) 이 말씀은 주님이 다른 사람을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주님의 생명 자체가 곧 부활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많은 신자들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죽음이나 절망의 자리에 이르면 좌절하고 만다. 죽음까지는 고사하고 약간의 실패와 고통의 자리에 이르더라도 평안을 잃고 흔들린다. 그것은 그 안에 죽기를 두려워하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죽기를 두려워하여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던 우리를 놓아주려 오신 분이다. 그는 어떻게 우리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자로 만드셨는가? 우리 안에 부활 생명을 심음으로써 그렇게 하셨다. 그 부활 생명은 곧 주님 자신이시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계1:17,18) 전에 죽어도 세세토록 살아 있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활을 알지 못하기 때문, 즉 그 안에 부활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지식적으로는 부활에 대해 다 알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믿지 못하고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통과 이생에서의 손실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하고 있거나 그를 참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활 생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바로 부활 생명이다.


6.그리스도가 바로 생명의 떡이다.

우리는 은혜와 은사 문제에 있어서도 동일한 사실을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신령한 양식과 신령한 은사를 얻기를 원한다. 그들은 기도로 이것저것을 구하기도 하고 신령한 집회에 참석하여 신령한 말씀을 듣고 신령한 은사를 받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만족을 얻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참 떡임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요6:48)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가 따로 있고 떡이 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을 구해야 한다. 그를 먹고 마시고 누리며 그를 배우고 그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깊이 추구되어야 한다. 다른 것으로는 도무지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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