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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 고전2:1-5

2010.05.01 11:22

이상봉 조회 수:6845

19.성령의 능력을 따라 복음을 증거함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라는 것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약 1년 반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할 때를 말한다. 바울은 그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 즉 뛰어난 말과 지혜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란 곧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의미한다. 바울이 이처럼 고린도에 거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만 알기로 작정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것만을 전하기로 작정했다는 뜻이다. 그가 이렇게 작정한 것은 그가 다른 곳(예컨대 바로 앞 전도지였던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할 때 자기의 체험과 철학적인 지혜, 세상 상식적 지식을 사용하여 사람들이 복음을 알아듣도록 최선을 다해 전도를 했지만 그것이 별로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할 때 했던 말의 내용이 사도행전 17장에 부분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 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17:22-31)

이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행17:32-34) 즉 아테네에서 온갖 철학적 지혜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한 것은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할 때 오직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만을 전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방법은 그리스도와 성령님이다. 사람에게 먼저 그리스도가 전해지고 다음으로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역사하여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 안에서 누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모든 구원 역사는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단지 그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작은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것은 참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최선을 다해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해야 한다. 지혜를 사용하고 지식을 사용하고 능력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을 통해 일을 하시는 성령님께 순종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 구원이 그러한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했다. 전도하는 일 자체가 부끄럽거나 전도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렇게 했는가? 혹은 자기 능력이 매우 미약해서 제대로 전도를 하지 못할까봐 그렇게 했는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자기의 잘못되고 헛된 인간적 노력에 의해 그르쳐질까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약함은 육체적인 허약이나 지식이나 지혜의 부족, 소심함 등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약함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놀라운 구원을 사악하고 완고하고 강퍅한 죄인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놓고 생각할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느낀 데서 오는 약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힘도 지혜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 안에 하나님을 심는다는 것, 눈에 보이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땅에 있는 인생에게 하늘에 속한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보게 하고 누리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것은 바울이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 구원의 방법이 오직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서 그 생명으로 살도록 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결국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보고 죽으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것을 어떻게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고린도에서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던 것이다.

그는 이 복음이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해지려면 즉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받아서 누리게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역사하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식하고 있었다. 믿음은 궁극적으로 사람의 지혜로운 말과 따뜻한 권면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는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나아갈 때 '내가 사람을 구원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는 다만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을 찾는다'는 생각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찾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십자가에서의 사역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그 (보잘것없고 수치스럽고 미련한) 이름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택한 사람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택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성령의 역사가 관건인 것이다. 듣는다고 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마음을 감동시키는 사람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령님은 사람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소중히 여기게 만드신다.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와 조화를 이루는 전도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말고 다른 것을 전하면 성령은 역사하지 않는다. 역사할 수도 없다. 성령은 사람 안에서 종교적 현상을 경험하게 하고 사람의 종교적 필요를 따라 어떤 체험을 가져다주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그는 보혜사 곧 그리스도를 체험케 하고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존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외의 것에 대해서 성령님은 반응하지 않으며 역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도할 때는 잘 전해야 한다. 이때 잘 전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유의해야 한다. 잘 전한다는 것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뛰어남)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인격)과 그의 사역만을 전하는 것이다. 말과 지혜도 필요하다. 그것은 어디에 필요한가? 오직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그의 십자가의 역사를 분명하게 전달하는데 필요하다. 잘못 말해서 그리스도 아닌 것을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일이 없도록 말을 잘해야 한다. 잘못 말해서 십자가 아닌 엉뚱한 것을 그리스도의 사역이라고 말하지 않도록 지혜로워야 한다.

여기에 말과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올바르고 합당한 말과 지혜는 정신을 차리고 말한다고, 조심해서 말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하고 생각을 많이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먼저 전하는 사람 자신 안에 오직 그리스도와 십자가밖에 없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전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그것에 관심이 있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말할 수 있으며 그것만 전할 수 있겠는가? 무릇 먹은 대로 내 놓고 가진 것을 내 놓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 가운데 있을 때 먼저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이것은 전도와 일(사역)의 문제 이전에 바울 개인의 신앙 문제였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여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며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절대로 하나님께 올바르게 사용될 수 없다.

일은 어디까지나 사람 다음이다.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고 그 다음에 그 된 사람에게서 일이 파생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이라는 것도 그 목적이 오직 사람을 만드는 것일 뿐이다. 바울이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그 다음으로 그가 가는 곳에서 하나님이 증거되며 그 결과는 그를 접촉한 사람들이 또 하나의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일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먼저 그리스도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조성하셨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 이름이 어떻게 우리를 대표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의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를 순간적으로 매장하고 우리를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런 아들로 일으키셨는지를 보는 것이다.

여러분은 여기에 어떻게 나와 앉아 있는가? 대개 처음에는 누구의 권함을 받고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말하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안주는, 아니 줄래야 주지도 못하는 이 자리에까지 나와 앉아 있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선택이 아닐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나 어떤 사람의 권면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권면의 내용이 자기를 옹호하고 자랑스럽게 만들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부인되고 죽도록 만드는 것일진대 그것을 여러분이 받아들여서 여기 앉아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여러분이나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닐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 곧 그의 택하심과 성령님의 감화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화와 승리를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일이 사람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나도 여러분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만 전하고자 한다. 이것이 좋게 여겨지는지 좋지 않게 여겨지는지는 나의 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해도 그리스도고 저렇게 말해도 그리스도일 뿐이다. 그는 미화되지도 더럽혀지지도 않는다. 십자가 역시 그렇다. 그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십자가이고 나쁘게 말해도 오직 십자가일 뿐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죽이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욕망과 정욕, 고집과 자존심을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을 바탕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께 대하여만 살아 있는 새 사람으로 살린다. 십자가는 우리를 빼앗아 하나님께로 가져간다. 이것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는 여러분이 생각할 일이다. 성령께서 은혜를 베푸사 이것이 항상 좋은 말로 들리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러분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 큰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오직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말하기를 바란다.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의 것으로서 곧잘 전해지는 것들, 예를 들어 물질적인 축복과 병 고침과 출세, 만사형통, 좋은 친구를 사귐 등은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더 나아가서 그보다는 조금 낫다고 생각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늘 시대에 갈구하는 마음의 평안이나 순화(純化), 교화(敎化), 정신적 안위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것들을 약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때로 그것을 말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 말해야 한다. 그런 것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말하는 자리에서 말해져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가운데서 말해져야 한다. 그것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말하고 즉 그의 아름다움을 먼저 말하고 그 인격과 사역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열매들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교회에는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신자라는 이름을 얻고 종교적인 체험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누리거나 그의 구원을 누리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담대히 그리스도를 전하자. 우리가 그런 것처럼 이 시대, 이 세상 역시 얼마든지 그리고 절실하게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을 의지하여 그것을 전하자. 살아날 사람, 제 정신이 박힌 사람, 구원받을 사람은 그리스도를 들을 때 눈이 번쩍 뜨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접할 때, 그 안에서의 자기의 죽음과 부활을 접할 때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말고 그리스도를 전하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어려운 환경이나 우리를 반대하고 핍박하는 험악한 사람들이나 우리 자신의 부족한 지식과 지혜, 능력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게 될 우리 자신 즉 성령의 능력 없이 자기 스스로 무엇이나 할 줄 알고 나서서 덤비는 우리 자신의 교만함과 육신적 열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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