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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전함 / 고전2:1-5

2010.05.01 11:23

이상봉 조회 수:7131

19.성령의 능력을 따라 복음을 전함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 우리가 포함되어 죽었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항상 우리 몸에 지고 죽은 자로 살아야 하며 그의 고난과 낮아지심에 참여해야 한다는 십자가의 진리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증거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여서 실제로 십자가로 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더욱이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런 십자가의 진리를 전하는 사람 자체가 많지 않고 듣는 사람들도 그것을 이전보다 더 듣기 싫어하는 것 같다. 누구도 십자가를 반기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이름과 그의 나라를 위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진실한 사람들을 여럿 보존해 두셨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고 그것을 듣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왜 십자가의 진리는 잘 전해지지 않는가? 사람들은 왜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인 십자가를 달게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구원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하는가? 우리는 물론 십자가의 진리 자체가 본질적으로 사람들에게 달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것은 자기 부인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는 일단 사람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 생명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도 그래서 적어도 십자가가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거리끼는 것으로 생각되어지지 않도록 증거를 해도 십자가의 진리는 그렇게 썩 깊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거기에 무엇인가 다른 어려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요즘 십자가의 도에 대해 계속 서로 이야기하고 있다. 저도 여러분에게 십자가를 말하고 있고 여러분도 저에게 혹은 형제들 서로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바깥의 어떤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전해도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그렇게 현저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종종 느낀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하나님께 겸손히 기도하여 문제의 원인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으려면 덮어놓고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만 할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올바르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빛이 비추어져서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아져야 한다.

그런데 바로 오늘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이 고린도전서 2장의 말씀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복음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전하지 않는 데 있기보다는 그것을 성령의 역사, 성령의 능력을 따라 전하지 않고 지나치게 우리 자신의 말과 지혜를 의존하여 전하려고 하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때로 우리의 말은 그 자체도 부정확하고 온전치 않지만 대체로 우리의 말들은 옳고 정확한 편이다. 그러나 그 말이 사람의 심령을 사로잡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동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의 문제는 십자가를 말하기는 하되 성령의 능력으로 그것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고전2:1-5에 나타난 바울의 증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의 복음 증거에서 우리는 그의 승리의 비결을 세 가지로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이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 전했다. 그의 메시지는 언제나 그것뿐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말했다. 그는 사람을 솔깃하게 하는 다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고 오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만을 말했다. 전한 것이 그것뿐이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것을 받든지 아니면 안 받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가?

두 번째는 바울이 십자가라는 그의 메시지를 전하기에 적합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십자가를 말하기에 적합한 경험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는 십자가의 도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2:20) 그는 형제들 가운데 있을 때 실로 아무 지혜도 용맹도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2:3)

십자가의 진리를 전하는 데는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 필요하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조금도 의지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의지할 만한 데도 의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전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자기를 의지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실제로 약하고 두려웠다. 그는 자기 자신의 육신적 능력이 하나님의 일을 조금도 이루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자신을 전혀 믿을 수 없는 무용지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단지 십자가를 전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었다. 그는 십자가의 경험을 가지고 십자가의 도를 전했다. 그는 자기에게 없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실제로 있는 것을 말한 사람이었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가?

셋째로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전함에 있어서 십자가의 방식을 사용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십자가의 도를 전할 때도 십자가의 정신으로 전한다. 십자가를 전할 때 바울의 말과 태도, 그의 감정과 마음에는 십자가의 정신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십자가를 전함에 있어서 지혜롭고 고상한 말, 설득력 있는 호소나 달콤한 말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오직 단순히 그리스도 안에서 벌어진 역사(사실)에 대해서 말하고 성령께서 그 말과 함께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맡겼다. 그는 아마도 복음을 전하기 전에 성령의 함께 하심을 위해 많이 기도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사실 그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어리석은] 메시지를 선포할 때 우리는 [어리석은] 방법을 따라야 한다. 어리석고 단순한 태도, 어리석고 단순한 말이 이 어리석고 단순한 진리의 전파에 걸맞는 방법이다. 어리석은 방법을 쓰려면 사람이 어리석어야 한다. 사람이 너무 영리하고 살아있으면 어리석은 말과 어리석은 태도를 취하지 못한다. 자연히 말의 지혜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만이 십자가의 정신으로 일할 수 있다.

바울의 경험을 보면 우리가 종종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어떤 것들인가? 오직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전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 정당하고 올바른 메시지를 전하기에 합당한 사람인가? 우리는 십자가가 무엇인가 알고 있는 사람인가? 우리는 참으로 실제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임을 알고 있으며 실제로 십자가에 못박힌 자로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십자가를 전하기에 올바르고 합당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가 없이는 한 발짝도 꼼짝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함이 없이는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을 것이며 설사 어떤 일을 했다 우리 생각에 잘 처리했다고 느낄지라도 성령의 인정과 그로 말미암는 만족이 오지 않는다면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지식뿐이라면 우리는 지식만 줄 수 있을 따름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단지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라는 단순한 지식뿐이라면 우리는 십자가의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실제로 나누어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생애 가운데 죄를 이기고 자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당하는 것을 경험한 바도 없고 또한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고난과 희생)를 지고 주님과 함께 고난을 당한 경험도 없다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우리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지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의 진리를 책이나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만 알고 체험을 통해서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을 결코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가 그 십자가의 고난과 승리를 참되게 경험할 수 있을 만큼 깊숙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작용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십자가를 전할 때 생명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4-17)
바울이 사람들을 대할 때 나타난 그의 온유함, 인내, 연약함, 눈물, 환난, 고난당함 등 이 모든 것은 다 그의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을 나타낸 것들이다. 바울은 십자가를 생활화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설교하기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린후서 4장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과정을 겪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4:12)
바울은 다른 사람들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날마다 죽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이 자기 안에 깊숙이 들어오도록 만들었다.

특히 그의 죽음은 자기 개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죽음의 차원을 넘어선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죽음은 죄와 자아와 세상을 이기기 위한 죽음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죽음(고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죽음(고난)의 유일한 의미가 아닌가? 이러한 죽음이 우리 안에서 허용되어야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 성령님은 우리를 이러한 십자가로 이끄신다. 이 자리에서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주님은 어떠하셨는가?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3)
이 죽음은 죄와 자아와 세상에 대해 죽는 죽음보다 더 깊은 단계의 죽음이다.

우리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려면 즉 성령의 함께 하심을 체험하려면 먼저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재능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말재주에 능한 사람은 그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생성되는 주관적 {감정}이나 정함이 없는 {마음}과 {생각}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따라 역사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손길에만 주의해야 한다. 오직 우리 안에 성령께서 어떤 짐을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벗는 심정으로 그것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경험을 경험해야 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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