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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십자가 / 고전2:6-16

2010.05.01 11:23

이상봉 조회 수:7898

20.성령 안에서 진리를 깨닫고 증거함

바울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지혜는 생명에 이르는 지혜요 구원의 지혜였다. 그 지혜는 삶의 완전한 지혜라고 할 수 있는 참 지혜였다. 바울이 그런 지혜를 가지게 된 것은 저절로 된 것도 아니고 배워서 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위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즉 성령을 받음으로써 얻게 된 지혜였다. 그의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생긴 것이다. 하나님을 앎으로써 인간을 알게 되었고 인간을 앎으로써 또한 인생을 알게 된 것이다.

바울이 성령님을 통해 얻은 지혜는 그로 하여금 구원의 길, 또는 인생의 참 길을 알게 하였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였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고 그의 십자가를 받아들임으로써 죄인이 하나님의 세계로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이 놀라운 비밀을 바울은 성령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성령님의 빛을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와 진리를 알게 된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2)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 곧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의 도는 성령으로써가 아니면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제대로 이해하기조차 어렵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을 찾는다. 그래서 그들은 제법 하나님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알고 그 구원의 세계를 깊이 경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 진리를 성령의 가르치심을 따라 가르치고 배우지 않고 사람의 생각과 지혜를 따라 가르치고 배우는데 큰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세계는 영의 세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님이 없이는 하나님의 세계를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9,10) 이처럼 하나님의 세계는 영의 세계이므로 두 눈을 뻔히 뜨고서도 성령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 보는 세계이며 모든 면에서 극히 총명한 머리를 가지고서도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이다. 이런 까닭에 특히 총명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세계를 깊이 알지 못하며 피상적으로만 아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그런 사람들일수록 성령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령을 의지하지 않으며 성령의 가르침을 받기 전에 자기 생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처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전혀 자기 지식과 경험과 지혜를 따라서 말하지 않았다. 바울은 한편으로 유대인이었으므로 여호와로 구약의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며 유대 종교의 여러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한편으로 상당한 정도로 헬라 철학과 로마 종교에 대해 지식을 가진 코스모폴리탄으로서 헬라 철학과 종교들에서 말하고 있는 신의 개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말하자면 얼마든지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하나님과 그의 뜻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오직 성령께서 자기에게 보이시고 말씀하시는 것만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신령한 사람만이) 분별하느니라"(고전2:13)

참으로 신령한 일은 오직 신령한 사람만이 분별할 수 있으며 영적인 일은 생각(마음)으로 분별할 수 없고 오직 영으로만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할지라도 그 모든 말들은 다 실제적이지 않은 것들이며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대해 말한다. 그 말만 들으면 대부분의 신자들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려고 하고 있고 그의 십자가에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흥사들이나 목사들이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대해 말하는 설교를 들어보면 끝에 가서 하는 말이 전혀 그리스도도 아니고 십자가도 아닌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십자가를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졌으니 우리는 그 십자가의 혜택으로 장차 천국에 갈 것이며, 주님이 십자가를 졌기 때문에 우리의 죄와 질병과 고통이 다 사라졌으니 평안하게 살자'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핵심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었다는데 있으며 십자가 곧 자기 부인을 체험함으로써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데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자기를 드려서 순종하는 아들의 길로 이해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이 사실은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오직 그야 말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보이지 않는다. 성령으로라야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 안에서 경험케 하는 일이 제대로 경험될 수 있다.

성령님은 누구신가?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그는 또한 진리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오직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우리로 그를 온전히 누리게 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보이시며 그의 모든 체험이 우리 안에서 우리 것이 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16:13,14)

성령님은 우리로 그리스도를 누리게 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은 십자가를 거친 후라야 가능하므로 성령님은 우리로 반드시 십자가를 경험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며 우리 생명이 되는 것은 먼저 우리 자아가 죽은 후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우리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죽게 하신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본받아) 죽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핵심적 역사이다. 그러므로 참 성령을 받은 증거는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참으로 아는(경험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참으로 성령을 받은 자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그에게 십자가의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된다. 십자가와 무관한 그리스도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아버지의 일을 위해 온전히 자기를 드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 무관한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제대로 성령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님은 사람을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여, 그 십자가 안으로 인도하여 사람을 구원하시며 사람을 회복하시는 분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은 피조물답게, 아버지께 순종할 아들답게 만드는 것이 성령의 일이다. 이를 위해 성령님은 사람을 먼저 낮추시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은 지금 헛되이 높아져 있어서 하늘에 둥둥 떠 있다. 사람의 생각은 아무 근거도 없이 헛되이 높아져 있다. 이것은 마귀에게 바람이 들어서 그런 것이다. 이 떠 있는 마음을 가라앉혀서 진실한 자리로 안정시키지 않으면 사람은 정상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 사람은 자기가 무엇이나 된 줄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터무니없이 건방을 떨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데리고 가시는 일을 하신다. 그래서 우리로 자신의 실상을 보게 하신다. 우리의 죄를 보게 하고 우리의 무능을 보게 하고 우리의 죽은 자 됨을 보게 하신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사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를 지셨음을 보게 하신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함께 죽음으로써 우리 옛 사람이 처리되었음을 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자기가 죽어야 마땅한 자요 또한 이미 죽은 자임을 아는 것이야말로 성령을 받은 증거 중의 증거이다. 바울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그러나 오늘날 성령을 받았다 하는 많은 사람들이 별로 이런 간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들이 아는 성령님은 주로 신기한 육체적 정신적 체험을 하게 하시는 분인 것 같다. 이런 성령님을 만나서 그런지 성령을 크게 받았다고 하는 사람을 보면 대체로 별로 '사람'답지 않고 무언가 귀신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이것은 모두 성령을 오해한 것이다. 그들이 받은 것은 거의 틀림없이 성령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다. 이렇게 성령이라는 것을 오해해서 유령같은 성령과 교통한다는 사람을 보면 영발과 신끼는 있지만 사람끼가 없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은 무언가 재주가 필요하고 신기한 능력이 필요할 때는 불러서 쓰겠지만 아마도 같이 살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성령은 가장 친밀하고 따뜻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성령을 그렇게 받고자 하는데 제대로 성령을 받지 못하고 엉뚱한 것이나 받고 마는가? 오늘날 성령 충만을 그렇게 원하고 그렇게 외치는데도 성령 충만이 안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성령은 사람을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인도하고, 십자가로 나아가는 사람은 또한 성령께로 인도되며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 성령과 십자가 이 둘은 서로 작용하는 것이다.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인데 그는 인생의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에게 영광스런 아들로 인증(認證)받은 분이다. 인생으로 사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부활됨으로써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으로 인정된 분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제사장이나 왕이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신약에 와서는 예수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로 나타났다.

하나님이 인증하셨다는 것은 기름을 부었다는 뜻이다. 구약시대에는 실제적으로 생명의 무궁한 능력 안에 있는 그런 기름부음 받은 자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임시로 제도를 통해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도를 통해서 기름부음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 안에 있는 아들의 생명을 따라서, 그 생명의 무궁한 능력을 따라서 그 자격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죽임 당하시고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 앞에 완전하게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제도로 인정받을 필요 없게 된 것이다. 그는 그의 생명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실질적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었다.

성령은 이런 분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성령은 십자가를 거친 사람에게 임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기름부음을 누리게 하신다. 성령이 오신 후에는 즉 생명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후에는 다른 방식으로 기름부음 받는 것이 없어지고 말았다. 오직 성령을 받음으로써, 즉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그 생명을 받고 그의 운명에 들어감으로써 기름부음을 받는다.

오늘날 천주교나 개신교 안에서 다시 기름을 붓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버스 지나간 뒤에 손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버스가 지나가 버렸는데 자기 혼자 손을 든다고 해서 세워주겠는가? 사또 지나간 후에 나팔부는 격이다. 원님은 지나가고 없는데 나팔을 불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생명의 무궁한 능력을 따라서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 나왔는데 다시 기름을 붓고 있다면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제도에 따라서 기름을 부었지만 완전한 생명의 무궁한 능력을 따라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 나왔는데 이제 와서 뚱딴지 같이 법을 따라서 기름을 붓고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하나님의 경륜을 역행하고 있는 일인가! 뒤로 후퇴하는 일이다. 2000년을 후퇴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가 또 다시 법이나 제도에 의해서 사람에게 기름을 붓고 있다면 그것은 2000년을 후퇴시키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모독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경륜이 점점 진보되었는데 이것을 방해하는 일이다.

지금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 그러고도 자기가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나는 장로 장립식을 했다"며 자랑하고 있다.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부음 받으심이 나온 이후로는 다른 기름부음은 없어져 버렸다. 아무 것도 없다. 바울이 그런 식으로 기름부은 일도 없고 베드로가 그렇게 기름부은 일도 없다.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다. 오직 생명의 무궁한 능력을 좇아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서 기름부음이 됐던 것이다. 그런 사람만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인정받은 사람이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에게 무엇을 인정받을 것인가? 제도로 인정받을 것인가, 법으로 인정받을 것인가, 총회장으로 인정받을 것인가, 공회원으로 인정받을 것인가? 그런 것들로 인정받는 일은 너무 너무 어리석은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생명의 무궁한 능력을 좇아서, 순종을 통해서 아들이시라도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그렇게 인정돼야 된다.

생명이 아니라 제도에 의해 인정되는 것은 부끄럽고 불완전한 것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은 자' 라는 이름으로 인정받기까지 주님은 많은 과정을 거쳤다. 오늘 교회 안에서 우리가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은 이런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되기 위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인정 안에 있기 위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이 아닌 세상의 다른 인정을 받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세상의 그런 다른 과정을 겪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인정과 무관한 것이다.

천주교에 가면 영세를 받기 위해서 6개월간의 과정을 거쳐서 그 과정을 통과하면 영세를 준다. 개신교에 가면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학습문답에 합격하면 학습을 준다. 그 다음에 얼마간 있으면 세례를 주고 또 얼마 있으면 집사가 되고 다시 장립 집사가 되고 또 다시 장로가 된다. 그리고 신학교를 나와서 얼마간 지나면 목사가 된다. 이렇게 인정받으려면 인격의 과정을 겪을 필요가 없다. 그런 과정만 겪으면 되는 것뿐이지 인격의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야곱처럼 다리가 부러진 사람, 허리가 부러진 사람 등 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생명과 진리와 능력이 없는 것은 성령을 받지 않았거나 충만하지 않기 때문이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적은 이유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고 편하게 신앙 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즉 자아가 죽지 않은 채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19-21).

바울의 놀라운 사역, 고난과 역경에서의 승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바울은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았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여러 번 맞고,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피하기 위해 성에서 광주리를 타고 피신하기도 하고,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했다. 결국은 유대인들의 모함을 받아 로마에까지 끌려가서 갇힌 상태에서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게 되었다. 바울은 이런 험난한 길을 걸어가면서 어떻게 항상 기쁘고, 충만하고, 감사하고,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19절부터 21절 까지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은 성령의 넘치는 공급으로 그가 모든 것을 감당했다는 뜻이다.

'성령의 넘치는 공급으로', '그리스도가 내 몸에서 존귀하게 하려 한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다.' 이 세 가지 표현이 그의 승리의 비결이다. 어떻게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한다는 그런 삶을 계속할 수 있는가. 이렇게 핍박이 많고 어려움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는가. 옥중에 갇힘에도 어떻게 찬송할 수 있는가. 험난한 길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가. 그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의 넘치는 공급 때문이다. 넘치는 공급이 바울로 하여금 오직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서 살아나게 하는 삶을 살아가게 했다. 그리고 옥중에 갇혔어도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결국 이 넘치는 공급이 없으면 사람은 자기 의지로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내가 근심하지 않아야지 해도 근심이 되는 것이고, 내가 불안하지 않아야지 해도 불안하게 되고, 내가 염려하지 않아야지 해도 염려가 되고, 내가 분노하지 않아야지 해도 분노가 된다. 넘치는 공급이 있냐 없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생은 풍요롭게 살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고로"
여기서 성령의 도우심은 곧 성령의 공급을 말한다. 에베소서 4:16의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엡4:16) 라는 말씀에서 '온 몸이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생명의 공급을 의미한다. 각 마디를 통하여 성령께서 생명을 공급하기 때문에 몸이 연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신체의 팔 다리는 어떻게 연합되어 있는가? 생명의 공급으로 가능하다. 생명이 각 지체에 공급됨으로서 하나가 되고 모두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 안에서 생명의 공급을 넘치게 받음으로써 일생동안 그리스도로 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온전히 할 수 있었다.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영의 충만, 바로 이것이 오늘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성령의 충만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요즘 흔히 말하는 성령과 다른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그 영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한 고로 그 영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7:38-39) 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살아있을 때는 아직 성령이 부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성령은 주님이 영광을 받으신 후에 오신 영이다. 하나님의 영은 성육신을 통해서 인생이 되었다. 인생의 과정을 거쳐서 십자가를 졌고 십자가를 지신 후에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살려주는 영,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 이것은 여러 과정을 거쳐서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셨음을 보여준다.

출애굽기 30:25에 보면 거룩한 관유라는 것이 나온다. 이것은 네 가지 향품을 섞은 향기름 즉 감람유를 말한다. 그냥 기름이 아니고 네 가지를 섞은 것이다. 성령은 이와 같다. 성령은 그냥 기름이 아니라 네 가지 향품이 섞어진 거룩한 기름이다.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 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 오십 세겔과 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대로 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취하여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출30:23-25)
몰약과 육계, 창포와 계피 이 네 가지 향품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향기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영 안에 이 네 성분이 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굳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씀한 것은 그 영이 이런 과정을 거친 영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주님은 인성을 통해서, 즉 인생의 길을 통해서 고난을 겪으셨고 죽음을 거친 후 부활하시고 높이 올려져서 하늘 우편 보좌에 앉았다. 그는 만유를 포함한 영이 되셨다. 즉 인생의 모든 과정을 거치셨다는 뜻이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 왜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가? 그것은 그분이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인생의 과정을 빠짐없이 겪고 그 안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이다. 그는 하늘에 계시는 분으로서 승리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인생을 모르는 분으로서 승리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표자로서 승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승리는 우리 모두의 승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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