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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그리스도인 / 고전2:11-3:2

2010.05.01 11:24

이상봉 조회 수:6765

21.육신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

바울은 고린도 교회 형제들에 대해 말하면서 그들이 많은 지식과 체험과 은사를 가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들은 성숙한 신자가 아니라 젖먹이 신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바울은 그 이유를 고린도 교회 형제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는 달리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지 않았거나 혹은 받기는 받았으되 그 영에게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고 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6,27)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이 두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새 영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영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킨다. 그것은 우리가 거듭날 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서 본래 우리 안에는 없던 것이다. 이 생명 곧 새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벧후1:4) 범죄할 수 없으며 죄를 알지도 못하는 생명이다.(요일3:9)

사람의 영은 사람이 거듭날 때 즉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안으로 들어올 때 살아난다. 이 일에 있어서는 성령님이 주동자이시다. 성령님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신다.(요16:8) 성령님은 인간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님을 구주로 믿게 하신다. 십자가의 일은 주님에 의해 완수되었지만 이 십자가를 죄인에게 적용시켜 경험케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난 주에 말한 바와 같이 십자가 없는 성령은 활동할 내용과 근거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성령이 없는 십자가는 공허하고 죽은 것이 된다. 구원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이지만 그 구원을 사람들에게 직접 적용하시는 것은 성령님의 일이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 영을 살리는 주체로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요"

성령님은 신자들이 거듭날 때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역사하실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 안에 영원히 거하신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이처럼 구속의 날까지 성령님은 신자를 떠나지 않으신다. 모든 거듭난 신자들은 자기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재하시는 성령님의 상태가 모든 성도에게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 사람은 성령님을 기쁘시게 만들 수도 있고 근심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성령님은 신자를 떠나지는 않지만 근심할 수는 있는 것이다.

신자의 경험은 거듭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거듭나는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생명 안에 성령님이 거하시도록 만드셨다. 성령님은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다. 우리가 이 사실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성령님께 주목할 것이고 순종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성령님을 바라보며 그의 음성에 순종한다면 우리의 영적 생활은 크게 진보하게 될 것이다.

영이 거듭나서 성령이 그 안에 내재하는 사람일지라도 얼마든지 육신적인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그 영이 아직 힘을 못쓰고 육신의 지배하에 놓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 되려면 성령님께 실제로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지만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성령님께 절대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을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듯이 성령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경험적으로 자기 영 안에서 성령님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몇 가지 영적 경험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장 중요한 경험은 육신적 생명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으로 사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신자에게는 여전히 육신의 생명, 곧 죄의 몸으로부터 나오는 자연적 생명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듭났다 해서 육신적 생명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보다 더 강한 생명으로 그것을 이기며 사는 것이 다. 이것이 신자의 삶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기는가? 우리는 생명으로 생명을 이긴다. 즉 영의 생명으로 육적 생명을 이기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으로 한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넣어졌음을 믿고 그 생명을 받아들이고 순종함으로 우리는 육신의 생명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즉 우리는 '믿음으로' 다른 말로 하면 '성령님을 의지하여' 육신적 생명을 이기고 영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바울은 "주와 연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했다.(고전6:17) 이 연합은 어떤 연합인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주님과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 이 말씀은 우리와 주님의 연합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의 죽음을 우리의 죽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주님과의 연합에 들어가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주님의 부활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이다.

이를 누리기 위해서는 믿음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 일단 주님의 죽음과 연합되면 우리는 우리 안의 죄된 것과 타고난 모든 것을 상실한다. 그리고 일단 주님의 부활과 연합되면 우리는 주님의 거룩하고 이기는 생명을 우리 것으로 누리게 된다. 따라서 이제 주님과 연합된 우리 속 사람은 주님과 한 영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경험을 하는 데 있어서는 성령님을 인식하고 성령님을 절대 의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무익함과 어리석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주님께 배우려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자유롭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는 길은 우리가 범사에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모든 것을 가르치고 인도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 영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를 아무 것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지난 주에도 말했지만 성령님은 우리를 먼저 십자가로 이끄신다. 즉 우리를 부수는 일부터 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께서 우리를 부수는 일을 할 때 우리가 그것을 허용하고 달게 순종하지 않는다면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누리게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혼의 생명을 부수고 수술하는 것은 우리에게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우리 영은 자라지 못할 것이며 우리의 영적 생활은 진보하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성령의 강건케 하심을 의지해야 한다. 바울은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옵소서"(엡3:16) 라고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다. 바울이 이렇게 기도한 것은 이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신자의 속 사람을 강건케 하는 일이 없으면 신자는 무기력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탄의 시험에 패하여 실패하고 말 것이다. 승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승리는 오직 주님의 힘을 우리가 누리는데서 온다. 이 누림은 상당 부분이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강한 영이 되면 많이 기도하며 끝까지 기도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다가 응답을 받지 못한 채 기도를 끝내버리는 것은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할 수 있는 강한 영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한 영은 기도 도중에 지쳐서 낙심하고 만다. 선을 행하다가도 낙심하고 감정에 좌우되어 영적 생활이 도무지 평탄케 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령의 강건케 하심을 따라 영이 강건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되 영의 강건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한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영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는 태도를 확실하게 취한다면 즉 믿고 순종하는 일에 우리가 충실한다면 성령의 능력은 얼마가지 않아 우리 영에 확실하게 역사하여 우리 생활에서 우리 속 사람을 강건케 하고 승리의 삶을 살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하며 기도하고 형제들의 모임에서 교통하는 것은 다 우리 영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즉 성령께 복종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성령을 주목하고 그의 음성을 들으며 거기에 자기를 맡기고 부수어지고 다루어지며 인도를 받는 것은 우리가 모든 방법을 다해서 온 힘을 다해서 힘써야 할 일이다. 우리는 헛된 육신의 훈련은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훈련은 오직 우리 영을 단련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우리 영적 생명을 충만케 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영이 우리 육신의 생명을 완전히 지배하여 우리 몸, 우리 삶이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만족할 수 없다.

우리의 영이 강력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깊이 헤아리게 될 것이다. 마치 우리 자신의 뜻을 우리 마음이 헤아려 알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알게 될 것이다. 바울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겠는가? 그라고 해서 하나님을 더 아는 무슨 특별한 기관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하나님을 안 것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웠기 때문이다. 성령을 알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가운데서 그의 영이 강화될 대로 강화되어 생각을 거치지 않고서도 직관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에 범사에 하나님을 깊이 알 수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깊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바울의 경험은 특별하고 신기한 경험이나 특별한 은사가 아니다. 사도직은 은사이지만 바울이 소유하고 있던 영과 그 영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님을 체험하는 것은 특별 은사가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고 있으며 또 마땅히 공유해야 하는 정상적인 경험이다. 영적인 감각이 둔한 사람은 젖먹이 신자에 불과하다. 이런 상태에서 오래 머무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성령께 주목하고 그를 의지하며 순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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