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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에 속한 삶 / 고전3:1-4

2010.05.01 11:25

이상봉 조회 수:7060

21.육신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 (2)

모든 성도는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행9:17-19) 믿고 세례를 받는 순간에 성령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 불행히도 많은 신자들이 마치 전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은 사람처럼 여전히 육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참으로 믿지 않기 때문이며 죽음과 부활의 원리를 따르도록 이끄시는 성령님의 부르심에 진실한 마음으로 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역사로 인해 그들은 죽었다가 이미 부활했다. 믿는 사람의 책임은 이러한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이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신자들은 비정상적인 신자라고 할 수 있는데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육신에 속한 자라고 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3:1-3)

여기서 신령한 자들이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고 육신에 속한 자란 앞에서 말한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다.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은 참으로 믿는 신자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령하지 못했고 육에 속한 자들이었다. 성령께서 주신 지혜로 말미암아 바울은 그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기 전에 그들의 상태를 먼저 밝힐 필요를 느꼈다. 그것은 듣는 것이 둔한 가운데서 많은 말을 해 보아야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1-14)

성경에서 말하는 중생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새 생명 곧 영을 받고 성령께서 그 영과 연합하여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게 되는 시점을 말한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이라고 바로 강력한 장년의 생명력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갓 중생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생명이 갓 탄생한 것이다. 새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열정적이고 믿음직스럽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도 죄와 자아의 사악함과 심각성을 깊이 절감할 수 있는 기회들을 가져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보다 분명히 알고 영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기 위한 많은 체험들이 필요하다. 아무리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한다 해도 어린 신자는 아직 감정과 생각의 영역에서 행하고 있기 마련인데 이는 그들이 불 시험과 연단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성령이 그 안에 있기는 하지만 그는 아직 육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을 철저히 의지하고 경험하는 삶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육신의 일이 육(자아)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라는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육신의 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갓 중생한 사람들 혹은 그런 상태로 오래 머문 신자들의 상태를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그들이 육에 속한 자임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새로 태어난 어린 신자가 즉시 신령하게 되는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난 후에도 어린아이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비참한 것이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바울의 기대에 못 미치는 상태로 너무 오래 머물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은 성령님이 사람의 온 인격을 지배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들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신령한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다.

성령님의 힘은 매우 강력한 것이고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이 구속이 실패로 끝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신령한 생활의 성장을 갈구함으로써 성령님이 우리의 모든 생활 방면을 지배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자리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자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앞서 가는 형제들이 갓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축복에 대해서만 말해 주고 그들에게 영적인 체험들을 추구하도록 격려하지 않는데 큰 이유가 있다. 즉 앞에서 인도하고 가르치는 이들이 어린 형제들의 영적 삶을 독려하지 않고 그냥 저절로 자라라는 듯이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앞에 있는 형제들이 이렇게 하는 데도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성령 충만한 생활, 성령의 인도를 온전히 좇는 생활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그런 생활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는 신자들 자신이 신령한 삶에 민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개 구원받은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거나, 영적인 의욕이 없거나, 전진을 위한 대가를 치를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교회에는 늙은 아이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육신적인 사람의 첫째 특징은 오랫동안 성장이나 진보가 없이 어린아이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이들이 영적인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2) 왜 못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지식과 지혜와 은사를 과대평가하여 헛된 자만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배울 필요가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상당히 지식이 있는 교회였던 것 같다. 바울은 그들의 부요한 지식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전1:5) 바울이 영적인 설교를 하면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그 설교를 다 알아듣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깨달음은 영적 깨달음이 아니라 머리로 깨닫는 깨달음이었다. 오늘날에도 고린도 교회 신자들과 같이 지식을 흡수하는데는 빨라서 남에게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이면서도 자기 자신은 아직 육신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순수한 영적 지식은 신비스럽고 놀라운 생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생활이 진리와 연합됨을 통하여 실제로 영적인 경험을 갖는데 있다. 영리한 머리는 여기에 아무 쓸모가 없다. 진리에 대한 열정만으로도 부족하다. 승리의 길은 우리를 참으로 가르치시는 성령님께 완전히 복종시키는 길뿐이다. 이미 많은 소위 영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신령한 가르침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을 맡기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가겠다는 순종의 마음과 태도뿐이다. 이것 없이 더 많은 비결과 지식만 축적하는 것은 사람을 더 육적으로 만들 따름이며 스스로 신령하다고 생각하도록 신자를 기만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종종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만일 신령하지 않다면 어떻게 이처럼 많은 영적인 일을 알고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 자신의 신앙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가릴 시금석을 던져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삶에서 확실하게 체험되어 내 것이 되어 있는 지식들인가? 나는 책에서만 이 여러 지식들을 습득하였는가? 아니면 생활을 통하여 이 여러 가지들을 참으로 깨달아 알고 있는가? 나의 지식은 혹시 단지 생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바울은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과 증거에 대해 말했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시기와 분쟁은 죄며 이러한 죄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영적이지 않고 육신적인 상태에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고 말하며 그들의 말씀들을 높이 받들고 그 귀중성을 논하는 사람들도 다 영적인 사람들이 아니요 육신에 속한 사람들인 것이다.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속했고 복음에 속했고 진리에 속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그 태도도 분명히 육신적인 것이었다. 말이 아무리 달콤하게 들릴지라도 분파적인 자랑은 그 어떤 것을 막론하고 갓난아기의 재잘거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교회 안의 분란은 그 표면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처럼 보이든지 간에 다 실제 이유는 사랑의 결핍과 육신을 따라 행하는데 있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자신들이 진리를 위해 싸우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고 또 그러한 것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그것은 위장에 속임에 불과한 것이다. 남을 고의적으로 속이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부터 스스로 속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을 얼마든지 이렇게 속여서 마치 거듭나지 않은 자처럼 행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신령한 가르침을 알고 아무리 신령한 경험들을 하고 아무리 칭찬받을만한 봉사를 했더라도 이런 것은 우리가 자신의 개성과 기질을 따라 이기심을 나타내고 분쟁과 허영, 질투심, 남을 용서하지 못함과 사랑하지 않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덮지 못한다. 아무리 놀라운 것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생명과 성품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않는다는 현저한 증거들이 우리에게서 나타난다면 우리는 성령께 복종하는 사람이 아니요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육신에 속했다, 육신적이다 라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듭난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건전한 상식을 따라 사는 사람도 아니다. 거듭난 사람이란 그 안에 무언가 세상에 없는 것이 있어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기 때문에 상식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우리의 상태가 이러한지 아니면 그저 무난하고 상식적인지,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하늘에 속한 영적 실체를 반영하고 있는지 아니면 땅에 속한 보통 사람과 같은지를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실제이지 허울좋은 이름이 아니다. 자신의 실제가 어떠하든지 신령한 사람이라는 이름을 굳이 고수하고 싶어하는 신자들이 많다. 그들은 마치 이름이 자신의 신앙을 좌우하는 줄로 생각한다.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자신이 영적이 되는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아무리 성령을 받았고 또 영에 속한 여러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실제로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있고 그래서 육신적인 삶을 그대로 살고 있다면 신령하다는 이름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이것은 결국 생명에 관한 문제요 실제 생활의 문제이지 이름 문제는 아닌 것이다.


22.육신의 죄들

아직 육에 빠져 있을 때 신자는 종종 그 안에 거하는 자에게 정복을 당한다. 시험이 많으므로 투쟁도 많고 범하는 죄도 많다. 몸을 가진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네 가지로 분류하면 [영양(營養), 생식(生殖), 휴식과 즐김, 방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타락 이전에는 이 모든 것이 죄와 상관없이 정당한 요구 조건이었다. 그러나 타락 후 이 모든 것은 다 죄를 위한 매개체로 전락했다.

영양의 경우는 어떤가? 마귀는 음식을 써서 사람을 유혹한다. 인간이 처음으로 받은 유혹은 바로 이 먹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먹고 마시는 것은 필요에 의해 적당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마치 인간 삶의 목표와 중심이라도 되는 것처럼 과도히 추구되고 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17:26-30)

더 나아가 사람들은 보통으로 먹고 마시는 것을 넘어서 신체에 영양을 공급하고 건강을 도모하는 데 별 상관없는 음식들 곧 술과 같은 것들을 얼마나 탐닉하고 있는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은 이 먹는 문제로 인해 형제들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많았다. 오직 신령한 사람만이 먹고 마시는 데 자신을 맡기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지 안다. "그런즉 너희가 먹는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둘째로는 생식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과도히 추구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타락 이후 생식은 번식을 위한 수단 혹은 부부간의 사랑과 연합을 누리는 정도의 수단이 아니라 육정(lust)으로 변하고 말았다. 아담과 하와가 먹는 문제로 인해 타락하자 즉시 그들은 벗은 것으로 인해 육정과 수치를 느꼈다. 술취함과 불의(음행)은 언제나 같이 간다.

세 번째로 휴식과 즐기는 생활 역시 과도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신체는 적당히 휴식을 해야 하며 적당히 안목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들과 접촉하며 그것들을 즐기고 누리는 것 곧 동물들을 돌보며 산과 들을 거닐며 꽃과 나무를 보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과도하고 비정상적으로 추구되어 모든 것이 정욕적이 되고 말았다. 안목의 즐거움은 안목의 정욕이 되고 말았다. 모든 정상적인 일들이 쾌락을 즐기기 위해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을 대체하는 적그리스도적인 그 무엇이 되고 말았다.

네 번째로 방어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방어는 신체의 보호 본능이다. 생명 유지와 보호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자기 생명에 위해(危害)를 가져오는 상황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은 사람 속에 그런 본능을 심어 놓으심으로 모든 생명들이 스스로 보호될 수 있도록 만드셨다. 그러나 타락 이후 죄가 득세하는 바람에 몸은 자기를 과도히 방어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은 자기 신체와 정신에 해를 끼치는 분명한 위해(危害)에 대해서만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안락과 쾌락에 방해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반대하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혈기 또는 기질이라고 부르는 것이나 거기서 가지쳐 나오는 분냄, 다툼 등은 다 육신의 자기 방어와 관련된 죄들이다. 세상의 수많은 죄들이 다 자기 생존, 자기 이익, 자기 영광, 자기 주장, 자존심 등과 관련되어 있다. 사탄에게 속은 이후 인류의 자기 방어는 이제 정상적인 본능, 정상적인 욕구가 아니라 범죄를 불러오는 악하고 왜곡된 정욕이 되었다.

이제 세상의 모든 죄가 다 무엇으로부터 오는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다 영양, 생식, 휴식, 방어라는 범주 안에 들어 있고 그 모든 요소들이 마귀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과도히 추구되는데서 죄가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이 네 가지 항목 중 하나나 둘 혹은 전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이다. 세상 사람이 그 몸의 죄에 얽매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오랫동안 육신에 남아 있거나 죄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여 굴곡이 심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신자는 성령의 빛 아래서 자기 마음을 살핌으로써, 자기 안에 무엇이 성령의 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으며, 무엇이 그를 절제와 자제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지, 무엇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지, 무엇이 영으로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주님의 빛으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죄들이 분명하게 깨달아지고 그것들을 버리지 않는 한 신령한 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스스로는 자기 죄와 자기 문제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우리의 상태를 계시해 주실 때만 육신의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성경은 육신의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육신의 일은 모호한 것이 아니라 '현저하다.' 참으로 깨닫기를 원한다면 우리 삶에서 무엇이 육신의 일이요 무엇이 성령의 일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육신의 일은 대체로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1) 몸을 더럽게 하는 죄들 즉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 술취함과 같이 자기 몸을 합당치 않게 사용하는 것

(2) 우상 숭배나 마술(술수)과 같이 사탄과 직접 관련된 신비적 초자연적 교통을 맺는 것

(3) 원수 맺는 것과 다툼과 시기, 질투, 분노 그리고 이기심과 교만으로 인해 공동체에서 분파를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 분열하는 것과 같이 다른 사람들과 합당치 않는 관계를 맺는 것

여기서 첫째는 '자기 몸'을 주님께 드리지 않고 합당치 않게 쓰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바로 갖지 않고 도리어 마귀와 합당치 않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며, 셋째는 함께 지음 받은 형제라고 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과 합당치 않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어떤 죄는 중하고 어떤 죄는 경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든 죄는 다 중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모든 죄가 다 한 가지 근원 곧 육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아주 추악한 죄를 범하는 사람은 자기가 육신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비교적 수월하다. 그것은 주로 첫째 계통의 죄를 범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죄들을 이겨낸 사람들은 자신이 육신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들은 대체로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월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육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 외모가 아무리 괜찮고 교양있게 보이더라도 육은 어디까지나 육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싸움이나 분파와 시기는 음행이나 술취함이나 방탕보다는 깨끗한 이미지를 풍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한 나무의 열매일 뿐이다.

승리의 길은 무엇인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육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우리도 죽은 자로 사는 것이다. 오직 죽은 자만이 죄에서 벗어난다.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육을 깨끗케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보혈이라도 육을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 피는 우리 죄를 씻는 것이지 육을 처리하는 것은 아니다. 육은 오직 십자가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나니"(갈5:24) 성령은 우리 육을 개조하거나 개선시키는 일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도 없다. 성령님이라도 우리의 부패한 마음과 정욕을 개선시킬 능력은 없다. 오직 그가 하시는 일은 육을 폐기시키고 우리 안에 새 영을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바라보자. 그 안에서 우리가 이미 죽은 자임을 바라보자. 우리는 이제 육체에 대해 우리의 정과 욕심에 대해 죽은 자이며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이다. 이 생명을 가진 우리가 여전히 세상에 속한 자처럼 육신으로 사는 자처럼 사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이며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의 인도를 온전히 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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